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125화 (124/202)

125. 인필리언의 구원자 (6).

날카로운 칼날 두 개가 목과 심장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모태 솔로 발현 전이라면 당황했을지도 모를 만큼 매서운 공격.

하지만 지금은.

‘느려.’

채-챙!

그 매서운 공격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리게 보였다.

가볍게 몽둥이를 휘둘러 찔러 들어오는 칼날의 궤도를 틀자 검은 그을음의 두 팔이 튕겨 나가며 빈틈이 열렸다.

하지만 반격은 무리였다.

‘오우씨. 이건 또 뭐냐?’

튕겨 나간 양팔이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검은 그을음의 몸뚱어리에서 창날이 솟아올라 쇄도해 왔으니까.

기괴한 공경방식이지만 허를 찌르는 공격이기도 했다.

터터터텅!

물론 내게는 별 효과가 없었지만.

놈의 팔이 튕겨 나가는 순간부터 증폭된 감각 영역이 위험신호를 보내왔고.

이미 알고 있는 위험에 당할 만큼 나의 수련은 허술하지 않았다.

양손에 든 몽둥이를 휘둘러 그것을 쳐내자 튕겨 나간 창들이 채찍으로 변화해 몽둥이를 휘감았다.

‘무기를 제압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건가?’

하긴, 지금껏 놈의 공격을 막은 것도 놈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준 것도 몽둥이뿐이었으니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몽둥이라면 말이다.

“크아악!”

결과적으로 말하면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적절했을 놈의 판단은 지금 상황에선 오판이 되었다.

서거거걱!

어서 와. 몽둥이에서 검기가 생성되는 건 처음이지?

몽둥이를 옭아매려 했던 채찍들이 갑작스럽게 생성된 검기에 의해 가닥가닥 끊겨나갔고.

꿀꺽.

그것은 수수께끼 알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몽둥이로 검기를 뽑아내는 것은 원래라면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몽둥이에서 검기를 뽑아내는 게 개나 소나 가능했으면 뭐하러 검기며 권기며 기의 종류를 분류하겠는가.

그냥 뭉뚱그려서 기라고 부르고 말지.

‘왠지 될 것 같긴 했는데 진짜로 가능할 줄 몰랐네.’

하지만 아공간 안에서라면 나는 그 불가능한 게 가능하다.

아공간과 아공간 조작이라는 특성의 발현.

이 두 가지 조건이 갖춰지면 말 그대로 아공간 내에 있는 모든 것을 ‘조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아공간 조작 특성의 대상을 공간의 벽과 균열 정도로 인식했었다.

지금이야 내 직업이 해피니스 청소부지만 처음엔 시스템이 정한 아공간 청소부였지 않은가.

그리고 그 청소 대상은 인벤토리와 아공간에 만들어진 균열이었고.

대상이 명확하기에 다른 사용법 같은 건 떠올리지도 않았다.

‘생각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검은 그을음과 상대하게 되고 시스템 상점창에서 놈을 상대하기 위한 아이템을 뒤적거리다 보니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레벨도 오르고 상점 등급이 올랐는데도 추가되는 전용아이템이 없다는 건 이미 이것들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 내가 너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금색 아공간.

인필리언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아공간 안에 세계가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공간 안엔 생명체가 살 수 없다.’ 그게 당연한 상식이었으니까.

검은 그을음이 봉인되어 있던 아공간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아공간 안에 아공간이 존재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모든 게 내 고정관념 때문이었던 거다.

상식이란 이름으로 묶여 있던 고정관념이 박살 났다.

그렇게 막혀 있던 생각이 트이자 내가 가진 특성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궁리해 보기 시작했다.

이건 그 과정에서 우연히 얻어걸린 거고.

아직은 고작 봉기(棒氣)를 검기(劍氣)로 바꾸는 정도밖에 활용하지 못하지만, 특성 레벨이 오르면 어디까지 가능할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아공간은 말 그대로 이 공간 전부였으니까.

‘나중에 아공간 조작 특성 SSS급 찍으면 막 전지전능해지는 거 아냐?’

이게 미친 소리 같다는 건 나도 아는데 적어도 아공간이라는 공간에 한해서라면 그게 정말로 가능할 것 같았다.

물론 당장은 내 앞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는 크롤러를 처리하는 게 먼저겠지만.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이젠 그것도 껌이지.’

내게 사나운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검은 그을음을 쳐다봤다.

포식자의 권위를 잃고 영락(零落)해 버린 상처 입은 짐승을.

***

강현이 검은 그을음을 상대하는 방식은 단순했다.

날아온 공격을 피하고 막고 잘라내면 그 잘린 파편은 수수께끼 알이 흡수한다.

그 단순한 행위의 반복이 수십 번 이어지자 검은 그을음은 강현을 공격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온몸을 뾰족한 가시로 채운 채 고슴도치처럼 몸을 웅크린 검은 그을음.

어느새 그 체구는 몰라보게 줄어들어 처음의 그 위세는 사라지고 없었다.

덕분에 강현은 조금 난감해진 상황이었다.

“대련 상대로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내 평가가 너무 후했네.”

“…….”

정확하게는 모태 솔로 특성의 발현으로 인해 상승한 스택과 능력치에 익숙해질 좋은 기회라 여겼는데 그 상대가 전의를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태어나길 포식자로 태어나, 한 세계의 먹이사슬 그 꼭대기에 존재해 왔던 검은 그을음.

녀석에게 강현이 선사한 소멸의 고통은 공포와 두려움을 뛰어넘어 절망이라는 감정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리고 녀석에겐 그 절망을 이겨낼 정신력이 없었다.

사실 녀석이 강현을 만나 느낀 모든 것이 처음이라는 말이 맞았다.

그게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말이다.

아공간 기생생명체 크롤러.

아공간 전용 청소도구가 아니면 타격조차 가할 수 없는 존재에게 감히 누가 대적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기에 녀석의 정신상태는 현재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황이었다.

공포, 두려움, 절망, 고통, 상실.

어느 하나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들이 선물 보따리처럼 한꺼번에 덮쳐왔고, 그 모든 것들을 태어나 처음 겪은 검은 그을음이 마지막으로 느낀 감정은 무력감과 체념이었다.

인간은 아기로 태어나 어른으로 성장을 하며 감정을 배운다.

좋은 감정도 나쁜 감정도 학습을 통해 배우고 내성을 키우며 통제하는 법을 배우고 성장하는 거다.

그렇기에 살아가며 좌절하고 절망에 빠지더라도 그것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거다.

반면 검은 그을음은 그에 대한 내성이 없다.

태어나기를 포식자로 태어나 상처받을 일도 아파할 일도 없었기에 처음 느끼는 고통과 절망이라는 감정을 이겨낼 수 없었다.

“어쩌면 자아가 없는 것이 수련 상대로는 더욱 적합했을지도 모르겠어.”

짜게 식은 눈으로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운 채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검은 그을음을 노려본 강현은 이내 양손에 든 몽둥이에 검기를 생성했다.

언뜻 보면 불쌍하기까지 한 모습이지만.

‘동정도 연민도 저딴 놈에겐 사치지.’

강현에게 검은 그을음은 20년 동안 20만이 넘는 사람들을 잡아먹은 괴물.

그리고 퀘스트 클리어를 위해 처리해야 할 종말의 마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서걱. 서걱. 서걱!

일 초에 수십 번씩 움직이는 팔의 궤도에 따라 빼곡하게 돋아나 있던 가시가 순식간에 잘려 나갔다.

금세 새로운 가시가 돋아났지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어차피 내 목적은 수수께끼 알이 먹기 좋게 파편을 만들어 내는 거니까.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쩌어억.

꿀꺽.

축구공만 한 크기로 줄어든 검은 그을음을 수수께끼 알이 삼켜 버리는 것으로, 녀석과 나의 싸움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포식자니 뭐니, 먹이가 어쩌고 제물이 어쩌고 하던 녀석의 최후치곤 별 볼 일 없었다.

‘최후의 발악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유언 한마디 없이 수수께끼 알의 맛좋은 영양간식이 되어 버린 녀석을 뒤로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허공을 부유하는 아이템들과 아공간 벽에 만들어진 균열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길 빠져나가려면 균열을 청소해야 하는 건가?’

시스템이 바로 아공간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걸 보니 여길 나가려면 청소를 해야 할 모양이다.

‘그나저나 종말의 마순지 뭔지 처치했는데 왜 퀘스트 완료가 안 뜨는 거지?’

청소하는 건 하는 건데, 당연히 완료되어야 할 퀘스트가 완료되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퀘스트 창을 열어 확인했지만 분명 검은 그을음을 처치했음에도 퀘스트는 진행 중이었다.

‘아공간 청소까지 해야 퀘스트가 완료되는 건가? 퀘스트 내용 중에 그런 내용은 없는데?’

다시 퀘스트 내용을 확인해 봐도 분명 임무는 종말의 마수 처치까지다.

‘그럼…. 아직 종말의 마수를 처치하지 못했다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아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크고 작은 균열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일단 아공간 내에 검은 그을음의 파편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남은 파편이 있었다면 수수께끼 알이 이렇게 얌전하게 있을 리가 없었을 테니. 패스.’

그럼 남은 사실은 하나였다.

‘놈이 이 아공간 밖에 존재한다?’

어째 얌전히 소멸을 받아들이는 것 같더라니. 이런 꼼수를 부릴 줄 몰랐다.

아공간 안의 균열 크기를 보자면 틈으로 빠져나가는 게 불가능한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놈이 어떻게 아공간을 빠져나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시라도 빨리 아공간 청소를 마쳐야 할 이유가 생겼다.

***

아공간 청소를 마치고 나오자 날카로운 조그마한 외침이 귓가를 울렸다.

“강현 경!”

어 씨. 아무 생각 없이 발을 내딛다가 퍼드릭을 밟을 뻔했다.

시선을 내려 아래를 바라보니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는 퍼드릭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퍼드릭 경. 미처 아래를 살피지 못했네요.’

내가 사과를 하자 퍼드릭은 아니라는 듯 손은 흔들더니 내게 질문했다.

‘괜찮습니다. 강현 경. 그보다 종말의 마수. 그 괴물은 어찌 됐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퍼드릭에게 그가 기절하고 나서 일어났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퍼드릭이 울적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죄송합니다. 강현 경. 용사 된 자로서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도 모자라 짐이 되었다니…. 제가 강현 경을 볼 낯이 없습니다.’

시무룩해진 엄지손톱 크기의 미니미가 안쓰러워 뭐라 위로를 하려고 해도 딱히 위로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주제를 돌렷다.

‘봉인되어 있던 종말의 마수는 제가 완전하게 처리했지만 제 임무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퍼드릭.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종말의 마수를 퇴치하셨는데 임무가 끝나지 않으셨다니요?’

‘아무래도 봉인되어 있던 마수의 파편 중 일부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 말과 함께 나는 검은 그을음과 싸우며 느낀 것들을 퍼드릭에게 설명했다.

제물, 먹이, 그리고 검은 그을음이 가지고 있는 언어능력.

‘어…떻게 그런 일이…….’

퍼드릭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느끼는 감정의 동요가 뇌파 통신을 통해 전해졌다.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무려 2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그들이 처치해야 할 마수에게 제물로 바쳐졌다.

용사라면, 그것도 태양신의 신탁을 받아 용사가 된 자라면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퍼드릭이라는 용사가 숭고하게 지켜 왔던 신념과 소명이 모두 거짓이라는 뜻이었으니까.

그런 퍼드릭의 심경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퍼드릭에게 뇌파 통신으로 질문을 던졌다.

풀리지 않은 한 가지 의문.

모든 용사와 군대가 봉인지에서 전멸했다면 절대로 남길 수 없는 기록에 관해서.

‘전대 용사들의 전승된 기록이라는 건 누가 관리하는 겁니까?’

‘…태양신의 사제들이 관리합니다. 신탁을 받아 전달하는 것도 그들의 의무지요.’

‘이미 전멸해 버린 이들의 기록이 어떻게 사제들에 의해 관리될 수 있는 거죠?’

이건 처음 전대 용사들의 기록이 전승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퍼드릭에게 듣는 순간부터 들었던 의문이었다.

아공간 안에서 전멸해 버린 이들이 어떻게 기록을 남겼는지 말이다.

왠지 아공간에 들어가기 전보다 심해진 구린내가 코점막을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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