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인필리언의 구원자 (5).
‘역시 안 되네.’
예상은 했지만, 수수께끼 알은 크롤러를 흡수하지 못했다.
‘격의 차이는 넘어설 수 없다는 거군.’
상대가 기존의 크롤러였다면 1초도 걸리지 않았을 흡수 과정이었다.
하지만 ‘검은 그을음’을 집어삼킨 수수께끼 알은 아직 원래의 형태인 알로 되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A급에 불과한 수수께끼 알이 SS급 이상인 게 확실한 검은 그을음을 흡수하는 건 요원해 보였다.
마치 소화불량에 걸린 보아뱀 같다고나 할까?
검은 그을음을 감싼 장막 이곳저곳이 늘어나고 수축하길 반복하는 거로 봐선 저항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뭐. 상관없지. 혹시나 해서 테스트해 본 것뿐이니까.’
나는 비어있는 왼손으로 부유하고 있던 몽둥이를 움켜쥐었다.
‘씨드. 퍼드릭 경은?’
‘안전하게 초원에 안착시켰습니다.’
‘그럼. 너도 인벤토리로 들어가자.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 같으니까.’
‘네. 사령관님.’
내가 몽둥이 하나를 놓아야만 했던 이유.
녀석의 시선(?)을 피해 균열을 키우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퍼드릭을 아공간 밖으로 빼내지 못하면 이 싸움은 가망이 없었으니까.
검은 그을음의 공격을 한 손으로 막아내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결국엔 퍼드릭을 아공간 밖으로 내보내는 것에 성공했고.
[특성]
……
모태 솔로 A (LV2)[발현중]
모태 솔로 특성을 발현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는 해 볼 만하지.’
2천 초중반이었던 모든 스탯이 3배가 늘어나 9천에 가까워졌다.
꿀꺽꿀꺽.
포션으로 상처를 치료하고 마나를 채웠다.
양손에 쥔 몽둥이를 휘두르며 몸의 상태를 점검했다.
만전(萬全)의 상태는 아니지만, 퍼드릭을 내보내기 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나는 고개를 들어 아직도 검은 그을음을 흡수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수수께끼 알을 바라봤다.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네.’
욕심이 과한 녀석이라 어떻게든 검은 그을음을 흡수하기 위해 버티고는 있지만, 장막이 늘어나는 범위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그건 수수께끼 알이 버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
“너…. 대체 정체가 뭐지?”
검은 그을음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묻어 나왔다.
‘나’라는 존재를 인지하고 나서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그의 내면을 거칠게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포식자(捕食者).
그는 자아가 생김과 동시에 자신이 인필리언이라는 이 작은 세계의 포식자임을 자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생명체들과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달랐다.
두려움과 불안감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고 양심의 가책도 없기에 다른 생명체와 공감은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존재.
모든 생물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당연한 존재.
적어도 알 수 없는 장막에 뒤덮이기 전까지, 검은 그을음은 자신이 그런 존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
“…어떻게 저런 것을 부릴 수 있는 거지?”
그의 목소리는 두려움에 물들어 있었다.
수수께끼 알이 만들어낸 장막을 탈출하기 위해 검은 그을음은 발버둥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자신이 가진 모든 수단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소멸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것이 당연했다.
“저런 것은 감히 너 따위가 부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말해라 먹이. 네 분에 넘치는 저것을 어떻게 얻은 거지?”
그런 검은 그을음의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또 다른 감정.
그것은 탐욕이었다.
검은 그을음은 수수께끼 알의 격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자신이 반항할 새도 없이 잡아먹혔으리라는 것을 인지했다.
욕심이 났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자 하는 생명체의 당연한 본능이었다.
그간 당연하게 여겼던 포식자의 위치가 흔들리는 순간 검은 그을음은 흔하디흔한 피식자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그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자신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인간. 강현의 눈빛이 달라져 있음을.
‘이제 목소리를 들어도 감정의 동요가 없네. 지혜 스탯이 늘었기 때문인가?’
피식자였던 강현은 이제 포식자의 시선으로 검은 그을음을 노려봤다.
“내가 말했지? 그 말 책임져야 할 거라고.”
“뭐?”
수수께끼 알에 정신이 팔려있던 검은 그을음은 그제야 어떤 이질감을 느꼈다.
‘분위기가 바뀌었어?’
그저 먹잇감에 불과했던 강현에게서 풍기는 기세가 달라져 있었다.
“너…. 어떻게……?”
자기 자신과 비슷한, 어쩌면 더 강할지도 모를 분위기를 풍기는 강현을 보며 검은 그을음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저 눈….’
자신을 바라보는 강현의 눈빛은 더는 피식자의 그것이 아니었으니까.
***
나는 왼손에 쥐고 있던 몽둥이를 놓고 허공을 부유하는 수수께끼 알을 손에 쥐었다.
‘아무래도 방어엔 이게 더 좋을 것 같단 말이지.’
무려 SSS급 세 사람의 공격을 받고도 멀쩡했던 게 수수께끼 알이다.
살기를 지운 서 영감님의 공격엔 작은 흠집이 생기긴 했지만, 곧 회복되었고. 무엇보다 좀 전에 봤듯이 크롤러의 부식 공격에도 면역이었다.
검은 그을음의 공격을 막을 이렇다 할 방어구가 없는 지금, 굳이 장막 형태가 아니더라도 수수께끼 알은 그 쓰임새가 많았다.
당장 내가 수수께끼 알을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검은 그을음의 몸이 움찔거리지 않는가.
“뭐랬더라? 약한 것이 강한 것에게 잡아먹히는 것이 태초의 진리라고 했던가?”
“…….”
“설마 네가 한 말을 기억 못 하는 단세포는 아니지?”
나는 아무런 대답이 없는 검은 그을음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니까 이제 태초의 진리대로 처맞아보자!”
나는 등지고 있던 아공간 벽을 박차고 놈을 향해 몸을 날렸다.
별다른 보법을 사용한 것이 아님에도 9천에 가까운 민첩 스탯은 놈과 나 사이에 존재하던 공간을 삭제해 버렸다.
서 영감님에게 배운 뇌격세의 검로를 따라 뻗어진 몽둥이가 놈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비록 아공간 조작의 마나 회로를 돌리느라 뇌격세의 마나를 담지는 못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모태 솔로 특성으로 펌핑이 된 건 스탯만이 아니었으니까.
공격력과 방어력을 포함한 모든 능력치가 3배 추가된다는 건.
퍼엉!!
가벼운 몽둥이질 하나에도 태산을 무너트릴 힘이 실린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고.
“크아아악!”
급한 마음에 어설프게 만들어낸 촉수로 내 공격을 막으려 한 놈에게 고통을 선물해 줬다.
“뭐…. 이 정도로 비명을…. 설마, 너 고통이라는 걸 느껴 본 적이 없는 거야?”
오히려 내가 놀랄 정도로 커다란 비명에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선 순간.
쫘아악!
꿀꺽.
어느새 튀어 나간 수수께끼 알이 검은 그을음에게서 떨어져나온 촉수 일부분을 삼켜 버렸다.
“오….”
“!!”
그러곤 다시 돌아와 마치 칭찬해 달라는 듯 살랑살랑 움직이는 수수께끼 알.
나는 그저 탄성을 내지른 정도였지만 검은 그을음의 반응은 더욱 격렬했다.
덤프트럭만큼 거대한 덩치를 잔뜩 움츠린 채 뾰족한 가시를 세우고 경계하는 모습이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허-.”
누군 몸뚱이가 부식되어 수십 번 떨어져 나가고 재생됐는데 고작 촉수 하나 뜯겼다고 저런 꼴이라니.
“먹이가 된 기분이 어때. 포식자 씨?”
내 말을 들은 녀석이 발끈했는지 빽빽하게 세워져 있던 가시 중 몇 개를 쏘아 보냈다.
시시식!
모태 솔로 특성이 발현되기 전이라면 눈으로 쫓기도 힘들었을 공격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모태 솔로 특성이 상승시키는 것은 모든 능력치.
그 모든 능력치에는 감각의 영역 또한 포함되는 것이었나 보다.
가시의 뾰족한 첨단(尖端)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것이 느릿하게 보였다.
틱.
오른손에 들린 몽둥이 하나로.
티팅.
수십 개에 달하는 그 모든 가시를.
티티티티팅-!
무리 없이 쳐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쩌어억-!
그렇게 몽둥이질에 튕겨 나간 가시는 검은 그을음이 무언가를 시도하기도 전에.
꿀꺽.
수수께끼 알에게 잡아먹혀 버렸다.
“…어?”
“…….”
‘이러면 굳이 수수께끼 알을 손에 쥐고 있을 필요가 없네?’
수수께끼 알은 학습능력을 갖추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검은 그을음의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들만을 먹어 치웠다.
그렇게 가시를 흡수한 수수께끼 알은 마치 인공위성처럼 내 주변을 돌고 있었다.
본체는 아직 자기가 잡아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시 본체에 쇄도하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검은 그을음의 원거리 공격은 봉쇄돼 버린 셈이었다.
“이러면 또 얘기가 달라지지.”
그런 내 말에 움츠러드는 검은 그을음.
나는 원래 내가 있던 자리로 돌아가 부유하고 있던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검보다는 길고 창보다는 짧은 애매한 길이.
하지만 검술과 창술을 모두 익힌 내겐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검은 그을음의 원거리 공격이 봉쇄된 순간 남은 건 근접전뿐이며.
꾸욱.
서태촌, 구정철, 도연우, 그 이름이 쟁쟁한 근접전의 전문가들의 제자인 내게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가 바라던 바였다.
그렇게 내가 양손에 몽둥이를 쥐고 검은 그을음을 돌아봤을 때였다.
“새끼, 눈치는 있네. 생존 본능 같은 건가?”
덤프트럭만큼 거대한 체구를 유지하던 검은 그을음은 그 형태를 변환하고 있었다.
검은 안개, 혹은 기체처럼 일렁이던 녀석의 몸은 압축에 압축을 거듭해 나와 비슷한 인간의 형태로 변환했다.
손발 대신 날카로운 검은색 칼날이 달려 있고 피부는 가느다란 가시들이 빼곡하게 돋아난 기괴한 모습이었지만.
일단 그 형태만은 인간에 가까웠다.
“오-. 이제 좀 재미있겠네.”
“먹이가 제 주제를 모르고 한 수 득세했다고 기고만장하는 꼴이라니…. 네 비루한 몸뚱이가 내게 먹히는 것을 보면서도 그렇게 주둥이를 나불댈 수 있는지 지켜보마.”
발끈한 검은 그을음이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젠 무섭기보단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모태 솔로 특성을 얻은 이후 내가 상대했던 몬스터나 크롤러들은 모두 나보다 한참 급이 낮은 종류들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레벨업보다는 아공간과 인벤토리 청소에 중점을 두었었으니까.
그런 내게 검은 그을음은 훌륭한 대련 상대가 되어줄 것 같았다.
수수께끼 알 때문에 잔뜩 쫄아 있기는 했지만. 일단 놈은 각성자 등급으로 치면 SS급 이상이며 헌터로 치면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는 물론 원거리 공격도 가능한 전천후 딜러다.
거기에 놈은 공격 하나하나는 치명적이지 않은가.
막지 못하면 살점이 부식돼 떨어져 나간다.
긴장을 풀 수 없는 상대라는 뜻이었다.
이처럼 훌륭한 대련 상대가 어디 있단 말인가?
9천 대에 가까워진 스탯과 업그레이드된 방어력과 공격력. 거기에 증폭된 감각 영역까지.
익숙해져야 할 게 많은 나에겐 맞춤 훈련 상대라 할 수 있겠다.
여느 몬스터처럼 대가리 날아가고 심장이 터진다고 뒈질 놈도 아니니까.
“어이 포식자 양반. 이제 제대로 한번 놀아보자고. 명색이 포식자라는 놈이 쫄아서 가시를 바짝 세우고 있는 꼴은 좀 아니지 않아?”
상태 이상 ‘공포’가 적용되지 않아서일까?
왠지 아까보다 혀가 자유분방했다.
모태 솔로 특성 때문에 팩트 폭력 공격력도 업그레이드된 건지도 모르겠다.
“…그 저열한 혓바닥부터 썰어내 주지.”
발끈한 검은 그을음이 허공을 박차고 내게 쇄도해 왔다.
날카로운 칼끝을 내게 들이밀며.
아무래도 이 새끼는 격장지계(激將之計)라는 말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미끼를 던지는 족족 이렇게 반응하는 걸 보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