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인필리언의 구원자 (4).
크롤러의 선공으로 시작된 전투는 일방적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내게 불리했다.
쿠앙!
푸시식!
검은 그을음.
형태조차 정립되지 않은 녀석은 안개처럼 또는 연기처럼 모습을 변환하며 나를 압박했고.
불과 몇 번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아공간의 구석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간 겪어 봤던 크롤러들의 모든 공격방식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나를 구석으로 몰아넣은 후.
녀석은 마치 샌드백을 두고 연습을 하는 것처럼 공격방식을 바꿔가며 나를 두들기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 개X끼가…….’
놈은 나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네가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라는 듯 점점 빠르고 강해지는 공격들.
마치, 고양이가 다잡은 쥐를 구석에 몰아 놓고 가지고 노는 것처럼 말이다.
크롤러에게 자아가 있다는 것이 이토록 위험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애초에 크롤러라는 몬스터가 지능을 가지게 될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는 말이 맞겠다.
‘단계를 건너뛴 페널티 같은 건가?’
이제 와서 후회하기엔 늦었지만.
푸른색 아공간을 청소하고 순서대로 노란색 아공간을 청소했다면 겪지 않았을 위협이었을지도 몰랐다.
쫘좌좍!
기다랗게 늘어진 촉수가 채찍처럼 하체를 노리고 쏘아져 왔다.
“큭!”
나는 마나를 발바닥으로 뿜어내 그 반동을 이용해 놈의 공격을 회피했다.
그러자 채찍이 분절(分節)하며 날카로운 칼날로 변해 급소를 노리고 쇄도해 왔다.
낭심과 심장, 목과 머리.
캉캉캉!
인체의 관절부와 급소를 노리고 들어오는 놈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두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쳐낸 칼날의 개수가 수십 개.
하지만 놈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튕겨 나간 칼날들이 또다시 형태를 바꾼 것이다.
어떤 것은 작은 구체로 또 어떤 것은 가느다란 가시로 변해 내게 쏘아져 왔다.
“X발….”
퍼퍼펑!
푸푸푸푹-.
가까운 거리에서 날아온 그 공격을 피하기엔 내 움직임은 너무 느렸고, 양손에 든 몽둥이로 막아내기엔 개수가 너무 많았다.
“끄아아악!”
가까스로 급소 부위를 방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피부와 근육 뼈가 부식되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은 내 입에서 비명을 토해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제법 버티는구나.”
본능에 각인된 공포를 자극하는 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여유 있는 놈과 다르게 나는 그 말에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박아넣은 가시에 의해 살점이 부식되어 떨어져 나갔고.
그 상처가 만들어 낸 끔찍한 고통에 전기로 지지는 것처럼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후우. 후우.
거칠어진 숨소리.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인벤토리에서 힐링 포션을 꺼내 마셨다.
꿀꺽.
놈은 그런 나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는 오락거리라도 되는 양 그 목소리엔 호기심과 즐거움이 가득했다.
“호오…. 몸을 회복하는 건가?”
인간의 본능 깊숙한 곳에 자리한 공포를 자극하는 그 목소리를 듣는 내겐 고역이었지만.
힐링 포션의 효과로 떨어져 나갔던 근육과 피부가 재생되는 모습을 지켜보던 놈이 흥미롭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한 너와 같은 생명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흡수한 그와 같은 물건도 존재하지 않지. 너,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구나. 어디서 온 것이냐? 어떻게 올 수 있었던 거지?”
놈의 목소리에는 놀람과 호기심이라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맙소사 몬스터가 호기심이라니.
‘이 새끼…. 몬스터 따위가 아니야.’
악마.
굳이 분류하자면 지금 내 앞에 있는 놈은 공포의 악마라 칭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놈이 한마디 한마디 말을 내뱉을 때마다 본능은 놈에게서 도망치라 소리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심력을 낭비해야만 했다.
‘젠장. 싸움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나는 그동안 정립했던 크롤러에 대한 정보를 대폭 수정하며, 전용 던전과 일반 던전을 번갈아 가며 사냥하려 했던 기존계획을 폐기했다.
만일, 내 전용 던전에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 저런 녀석들이 세상에 퍼지게 된다면 그 순간 그곳은 지옥이 될 테니까.
무엇보다 아공간 청소를 우선순위로 두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 계획도 이곳에서 살아나가야지만 실행 가능한 것이겠지만.
꿀꺽.
입안이 바짝 말랐다.
“입을 열어 대답할 필요도, 나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어느새 내 상처는 모두 치료되었지만, 녀석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 몸은 나의 통제를 벗어나 떨고 있었다.
짜악.
손을 들어 뺨을 후려갈겼다.
순간, 눈앞에 별이 반짝이며 턱이 바스러질 것 같은 고통이 몰려왔다.
‘정신 차려. 고작 이딴 새끼에게 먹이 취급을 당하려고 그 힘든 수련을 자처했던 게 아니잖아.’
이게 효과가 있었는지 몸의 떨림은 곧 진정이 됐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공포를 이겨내다니. 보면 볼수록 맛있어 보이는구나.”
그렇다 해도 눈앞에 적이 나보다 강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해.’
눈동자를 굴려 놈을 바라봤다.
지금 당장 공격하려는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인벤토리를 뒤적여 봤지만, 놈에게 사용할 만한 아이템이 없었다.
지능을 가지고 있다곤 하지만 놈은 여전히 아공간 기생 생명체 ‘크롤러’.
내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아이템으론 놈에게 타격을 줄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상점창을 열어 아공간 청소부 전용 아이템을 빠르게 검색했지만, 여전히 쓸 만한 아이템들은 없었다.
‘이 빌어먹을 청소부 컨셉은 언제까지 가져갈 생각인지….’
나를 시스템 사용자로 선정하고 해피니스 청소부라는 직업을 던져 준 관리자라는 존재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애당초 크롤러라는 몬스터가 버젓이 존재하는 아공간을 청소하는데 무기나 방어구 정도는 만들어 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내게 주어진 건 고작해야 쓰레받기와 빗자루 그리고 마대 걸레를 분리해 만들어 낸 몽둥이가 전부였다.
다른 건 몰라도 관리자의 성향이 진성 컨셉충이라는 건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씨X. 진짜 X 같네….’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상점창을 닫으며 오랜만에 육두문자를 내뱉을 때였다.
[특성]
아공간 청소부 B (LV5)[발현중]
공간시 A (LV4)[발현중]
아공간 조작 B (LV9)[발현중]
모태 솔로 A (LV2)
기존 아공간이었다면 8천을 넘었어야 할 스탯이 2천 대에 머무는 것이 이상해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자 모태 솔로 특성이 발현되지 않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이유는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설마 퍼드릭 경과 함께 들어와서 그런 건가?’
시스템은 지금 이 상황을 솔로잉이 아니라 파티플레이로 판단한 것이다.
‘그럼 퍼드릭 경을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건데….’
그렇게 상태창을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나를 앞에 두고 한눈을 팔 정도로 여유가 있나?”
쉬익!
내가 상태창을 확인하는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은색 그을음으로 만들어진 창이 날아왔다.
터억.
아공간 벽을 밀치며 그 반동을 이용해 급하게 몸을 틀었지만.
푸욱!
창은 옆구리를 관통하고 그을음이 되어 흩어졌다.
‘제길.’
그나마 다행인 점은 원래 창이 노렸던 심장을 피해 즉사는 면했단 점이었다.
‘끄윽.’
그렇다고 고통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창에 관통된 옆구리의 살점이 뭉텅 떨어져 나가고, 흘러나온 피와 함께 검게 부식되어 크롤러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그것들을 흡수한 놈의 목소리가 다시 아공간 안을 울렸다.
“역시 맛있군. 여태 먹었던 제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야.”
검은 구체처럼 뭉쳐있던 그을음의 한가운데가 벌어지며 불쾌한 무언가가 튀어나와 주변을 훑고는 다시 들어갔다.
‘저 생기다만 새끼가…?’
놈은 나를 보고 입맛을 다신 것이다.
마치 맛있는 요리를 눈앞에 둔 미식가처럼.
***
아공간에 들어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강현의 옷은 거의 넝마가 되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급소 부위를 제외한 모든 곳이 너덜너덜해진 상태라는 표현이 맞았다.
“이래도 한 손으로 나를 상대하겠다고?”
“…….”
강현은 검은 그을음의 물음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검은 그을음.
일렁이는 어둠은, 한 손으로 몽둥이를 쥔 채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강현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구석에 몰아넣은 사냥감.
언제든 잡아먹을 수 있는 먹이라 여겼던 강현의 반항이 의외로 거셌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양손에 쥐고 있던 몽둥이 중 하나를 놓을 때만 해도 검은 그을음은 강현이 반항하기를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유일하게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던 몽둥이 두 개.
그중 하나를 놓아 버렸다는 사실은 죽겠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그저 맛있게 먹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부터 강현의 반항은 더욱 거세졌다.
마치 포기라는 단어를 모르는 것처럼.
그간 제물로 바쳐졌던 인필리언인들과는 다른 반응에 흥미를 느끼던 것도 잠시.
검은 그을음은 이제 끝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없군.”
의미 없는 발버둥을 지켜보는 것도 지겨워졌다.
어차피 먹이가 가진 힘과 능력 그리고 기억은 놈을 흡수하는 순간, 자신의 것이 될 터.
놈이 어디에서 어떻게 이 세계로 오게 된 것인지는 포식과 함께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었다.
“장난은 여기까지다. 먹이.”
말을 마친 검은 그을음은 자신의 몸에서 촉수를 뽑아냈다.
“이번에도 막을 수 있다면 어디 막아봐.”
검은 그을음의 몸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촉수를 본 강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의 머리카락처럼 일렁이는 수백 개의 촉수는 그간 검은 그을음이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으니까.
뿌득.
이를 바스러트릴 것처럼 악다문 강현의 입에서 상처 입은 짐승의 울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게 전부냐?”
그 목소리를 들은 검은 그을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이 그리 분한 거지?”
그가 흡수한 인필리언인의 기억 속에서 보통 저런 감정은 약하디약한 것들이 짓는 표정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그런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에게 잡아 먹히는 것이 어찌하여 분한 일인가?
그것이야말로 세계를 관통하는 진리이자 법칙인 것을.
기억은 흡수하되 감정은 공감할 수 없기에 생기는 괴리.
“무엇이 분하냐고?”
“약한 것이 강한 것에게 잡아 먹히는 것은 태초부터 내려온 진리다. 화가 난다면 그 대상이 내가 아닌 너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검은 그을음은 촉수의 길이를 늘여 강현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하며 말을 이었다.
“네 약함에 화를 내고 강해지지 않은 너를 탓하라. 오지 말아야 할 곳에 발을 디딘 너의 멍청한 두뇌를 원망하라. 네가 나에게 먹히는 이유는 바로 너의 부족함 때문이니까.”
그 말을 들은 강현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비릿하게 지어지는 미소.
비웃음.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그 미소 사이로 들려오는 강현의 목소리에 검은 그을음은 자신이라는 존재를 인지하고 나서 느껴본 적이 없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기에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기분.
“나는 책임지는 존재가 아니다. 어리석은 피식자야.”
만일 누군가가 검은 그을음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면 이렇게 정의를 내렸을 것이다.
위화감.
그리고 불안감.
그에 따라 강현의 변화를 경계했을 것이며 비어 있던 왼손에 들린 구체를 주의했을 것이다.
“아니. 책임져야 할 거야.”
“뭐?”
강현은 왼손을 통해 전해지는 진동을 느끼며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젠 네가 피식자가 될 테니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강현은 수수께끼 알을 쥐고 있던 왼손의 힘을 풀어버렸다.
쩌어억!
그와 함께 생겨난 장막이 아공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