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인필리언의 구원자 (3).
산꼭대기에 하얀 눈이 뒤덮인 설산.
퍼드릭이 말한 태초의 산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5층 빌딩 높이의 그 산이었다.
‘저긴 아까 정찰을 했던 곳인데?’
씨드의 보고대로라면 생명체라고는 아주 작은 곤충들만 사는 바위산이라고 했었다.
이게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드는 순간 퍼드릭의 설명이 이어졌다.
‘오래전 세상 만물을 비추는 태양신께서 마수를 저 태초의 산 깊은 곳에 봉인하셨습니다. 덕분에 세상은 평온했죠.’
그렇게 말하는 퍼드릭의 목소리에는 신에 대한 감사와 공경이 묻어 나왔지만 내 머릿속엔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왜 봉인이지?’
비록 작은 세계였지만 신이라는 존재라면 크롤러 정도는 가볍게 처릴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 말이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때 퍼드릭의 말은 이어졌다.
‘신께선 종말의 마수를 태초의 산 깊숙한 곳에 가두시고 소명을 내리셨습니다. 바로 용사와 군대로 하여금 마수를 처리하게 하는 것이죠.’
그 말을 들으니 이건 어쩌면 신이라는 존재가 인필리언 사람들에게 내리는 시련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뭐. 그건 확인해 보면 될 일이고.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을 골머리 썩여가며 고민하는 취미는 없기에 나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 움직임에 놀란 퍼드릭이 흠칫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 눈에 들어왔지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원하는 정보는 다 얻었고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니.
‘씨드. 비행 준비 부탁해.’
씨드에게 명령을 내리고 씨드와 나를 연결할 와이어를 주섬주섬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강현 경. 지금 떠나시려는 겁니까?’
퍼드릭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네. 제가 이곳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어서요.’
‘강현 경. 죄송한 부탁이지만 저도 경과 함께 갈 수 있겠습니까?’
‘퍼드릭 경도 함께요?’
‘종말의 마수를 처치하는 것은 용사의 소명. 비록 제가 가진 힘은 미약하지만 분명 경께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정말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이어지는 퍼드릭의 말에 나는 그의 합류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께서 펼치신 봉인은 오직 용사에게만 출입을 허락하니 말입니다.’
그런 건 미리미리 말하라고 이 양반아.
그렇게 나는 신이 펼쳐 놓은 봉인을 해제할 퍼드릭이라는 열쇠와 함께 샤이닝 에로우에 몸을 맡겼다.
물론 체중을 극단적으로 줄여주는 바람 사냥꾼의 하품 아이템을 사용한 채.
쉬이이잇!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 때쯤, 내 머릿속엔 또 다른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왜 궤에 에 엑.’
내 옷깃을 붙들고 있는 퍼드릭의 비명이었다.
‘이 양반아. 그런 건 그냥 육성으로 하라고…. 머리 울리니까.’
뇌파 통신의 폐해였다.
***
태초의 산.
퍼드릭의 말대로라면 인필리언의 생명이 시작됐다는 이곳은 씨드의 보고대로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평지에 외로이 우뚝 솟은, 풀 한 포기 없이 바윗덩어리들로 이루어진 산.
그리고 그 정상에 소담하게 쌓여 있는 눈.
인필리언인들의 시선에서야 이곳이 오르기 힘든 산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작은 언덕배기일 뿐이었다.
그 산의 정상.
소담하게 뒤덮인 눈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귓가를 간질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웨에에엑-.”
흘끗 시선을 내리자 내 가슴팍쯤에서 옷깃을 붙잡고 토악질을 하는 퍼드릭이 보였다.
투구는 어디에 벗어던진 것인지 창백한 안색으로 연신 먹은 것을 게워 내는 퍼드릭.
그가 토해낸 토사물이 옷을 더럽히고 있어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그냥 놔두기로 했다.
그래 봐야 새똥보다도 작은 크기였으니까.
‘괜찮아요. 퍼드릭 경?’
‘우붓에 에 갠….’
안 괜찮은 모양이다.
잠시 퍼드릭이 진정할 시간도 줄 겸 나는 감각의 영역을 확장해 산을 훑어 내렸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고작 1m 정도에 불과했던 감각의 영역이 이젠 이 산을 뒤덮고도 남을 만큼 넓어졌다.
이게 다 태초의 별에서 피땀 흘려 수련한 결과란 말씀.
하지만 자신 있게 감각의 영역을 확장한 것치곤 경과가 그리 좋지 못했다.
‘이 산 전체가 무언가에 둘러싸인 느낌인데?’
감각의 영역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었다.
분명 공기의 흐름도 미세한 생명체들의 움직임도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원래라면 느껴졌어야 할, 지표 아래로 흐르는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말이다.
‘이게 그 봉인인가 보네.’
힘으로 부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열쇠 역할을 할 인물이 있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잠시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행여 잘못 건드렸다가 이 세계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으니까.
퀘스트에도 명백하게 나와 있지 않던가.
크롤러를 처치해 인필리언이 하나의 세계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말이다.
‘크롤러 잡겠다고 세계를 파괴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게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강현 경. 하늘을 날아본 것이 처음인지라….’
좀 진정 됐는지 제 혈색을 되찾은 퍼드릭이 내게 사과를 건네왔다.
‘속은 좀 괜찮으십니까?’
시선을 내려 바라보니 내 옷깃에 흘린 토사물까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네. 이제 진정이 되었습니다. 용사된 자로서 못난 모습을 보여 송구합니다. 강현 경.’
‘괜찮습니다. 비행이 처음이시라니까 그럴 수도 있죠. 그럼 안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입구를 찾아보려 했지만 느껴지는 게 없더군요.’
‘전승된 기록에 의하면 입구의 봉인을 풀기 위해선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전승된 기록이라고요? 퍼드릭 경 이전에 이곳에 방문한 사람이 있습니까?’
내 물음에 퍼드릭이 자그마한 머리를 끄덕였다.
‘네. 저 이전에 용사들이 종말의 괴수를 토벌하기 위해 이곳에 방문하셨었죠. 모두 실패했지만 말입니다.’
‘용사들…이라면?’
‘아. 강현 경은 모르시겠군요. 제가 태양신의 신탁을 받은 17번째 용사입니다.’
‘…17번째요?’
어이가 없었다.
마수 토벌을 위해 17번이나 용사를 보냈다는 사실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 시간 동안 크롤러가 이 세계를 파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어이가 없었다.
종말의 마수라며? 뭔놈의 종말이 이렇게 여유로워?
나는 산 아래로 걸음을 옮기며 퍼드릭에게 물었다.
‘제가 잘 몰라서 드리는 질문인데, 처음 종말의 마수가 나타난 게 언제죠?’
‘기록에 의하면 대략 20년 전입니다.’
‘20년…….’
이번이 17번째라면 거의 매년 한 번은 종말의 마수를 잡기 위해 원정대를 꾸린 셈이다.
그 결과는 전멸.
용사와 수천의 군대로 이루어진 원정대가 16번이나 전멸한 거다.
왠지 구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용사 16명 포함 20년간 마수 토벌 원정으로 인해 죽은 병사들의 수를 헤아려 보면 거의 20만에 가까울 터.
이 세계의 인구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20만이라는 수는 인구 1억이 넘는 대한민국에서도 적은 수가 아니다.
그런데 전투를 전담하는 병사들을 이런 식으로 축차(逐次) 소모한다고?
이건 지휘관이 바보가 아닌 이상 시도하지 않을 전략이었다.
마음속에서 작은 의구심이 싹을 틔웠다.
그렇게 퍼드릭과 대화를 나누며 인필리언의 정보를 수집하는 동안 나는 퍼드릭이 말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과 평야가 만나는 지점.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태초의 산과 푸르른 초원이 만나는 경계선에 도착하자 퍼드릭은 내게 자신을 아래로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읏-차.’
아니 선원이 배에서 내릴 때나 하는 추임새를 왜 뇌파 통신으로 하는 건지.
그렇게 바닥에 내려선 퍼드릭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산과 평야의 경계점에 찔러 넣었다.
지-잉!
동시에 소리굽쇠가 울릴 때나 들릴 법한 진동음이 뒤따랐다.
그리고 피어오르는 황금빛 오라.
마치 영혼을 불태우는 것처럼 퍼드릭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오라는 환하게 주변을 밝히더니 그가 쥐고 있는 검의 손잡이로 빨려 들어갔다.
‘이래서 용사만 입구를 열 수 있다고 했구나.’
“허억. 허억.”
황금빛 오러를 불길처럼 발산하던 퍼드릭이 검의 손잡이를 놓고 거친 숨을 몰아쉴 때였다.
드드드드드.
강렬한 진동과 함께 태초의 산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딛고선 푸른 초원은 미약한 울림도 없었지만, 강렬한 진동과 함께 태초의 산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눈앞의 태초의 산만 산사태가 나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 몸뚱이를 떨어댔다.
드드드드.
그리고 그 떨림이 끝날 무렵.
샤아아아.
청명한 바람 소리와 함께 퍼드릭의 앞에 황금빛 구체가 떠올랐다.
퍼드릭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던 오라와 닮은 황금색 빛 덩어리.
분명히 처음 보는 광경임에도.
‘어…. 왠지 낯익은데?’
나는 그 빛 덩어리가 낯설지가 않았다.
***
‘역시 아공간이었던 건가?’
퍼드릭이 만든 입구를 통해 들어선 공간에선 너무나도 익숙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허공을 부유하는 잡다한 아이템들과 사방에 퍼져 일렁이는 검은 그을음.
아공간이 분명했다.
‘아. 이곳이 봉인지….’
뇌파 통신으로 퍼드릭의 중얼거림이 전해졌지만, 그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아공간 안에 아공간이 존재할 수가 있나?’
또다시 나의 상식이 무너져 버렸으니까.
분명 저 그을음은 크롤러가 맞았다.
그러니 이곳이 아공간인 것이 맞을 터.
그렇다면 나는 아공간 안에 존재하는 아공간에 들어와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혼란스러워진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사령관님. 조심하십시오. 크롤러가 움직입니다.’
씨드의 경고에 시선을 돌리자 벽에 붙어 균열을 갉아먹고 있던 그을음들이 한곳으로 뭉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 아직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푸른색 아공간에 기생하던 크롤러는 직접적인 공격이나 위협을 받아야지만 적의를 드러냈는데, 이 녀석은 그것들과 조금 달랐다.
나와 퍼드릭이 아무런 위협을 가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로 뭉치고 있었던 것.
‘진화된 개체인가?’
황금색 아공간, 그것에 맞게 진화된 개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스스로 이해시키고 있을 때.
“너는…. 뭐지?”
검은 그을음이 뭉쳐 만들어진 덩어리.
크롤러가 말을 걸어왔다.
“제물은 아닌 것 같은데….”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공포라는 감정을 긁어모아 만든 듯한 목소리.
“끄으으윽.”
그 목소리를 들은 퍼드릭은 눈을 까뒤집은 채 게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렸고.
“씨드. 퍼드릭을 보호해.”
“네. 사령관님.”
나는 인벤토리에서 두 자루의 몽둥이를 꺼내 들고 전투태세를 취했다.
오소소소.
‘SS급. 혹은 그 이상.’
온몸이 떨리고 소름이 일었다.
녀석의 기운은 연우 형이나 두 영감님이 뿜어내던 기운과는 또 달랐다.
완벽한 적의.
녀석이 뿜어내는 기운은 태고룡 쿠아르탐파와 닮아 있었다.
생태계의 정점에서 군림하는 자의 기운 말이다.
내 본능은 지금 당장 등을 돌리고 도망치라고 요란한 경고음을 토해냈지만 애초에 퇴로는 없었다.
“흠…. 나와 대적할 셈인가?”
“물론.”
“쿡. 비루하기 그지없는 그깟 몽둥이로?”
“…….”
녀석의 비웃음이 가시처럼 심장을 찔러 왔다.
비겁하게 팩트로 공격하다니, 풍겨오는 기운만큼 나쁜 녀석이 분명했다.
‘나도 다른 무기가 있었으면 이딴 거 안 꺼내 들었어! 새끼야!’
마음 같아서는 수수께끼 알을 꺼내고 싶지만, 퍼드릭이 있기에 그것도 불가능했다.
만에 하나라도 수수께끼 알이 퍼드릭을 몬스터로 알고 공격한다면 그것을 막을 수단이 없었으니까.
아직 A급에 불과한 수수께끼 알이 과연 SS급 이상의 기운을 풍기는 크롤러를 흡수하는 게 가능할지도 의문이었고.
“재미있는 생명체군. 오랜만이니 어울려 주도록 하마.”
언어는 어떻게 배운 것인지 녀석의 어휘는 인간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자연스러웠고 잔뜩 긴장한 나와 달리 여유가 넘쳐 흘렀다.
‘빌어먹을….’
양손에 몽둥이를 틀어쥔 나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