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121화 (120/202)

121. 인필리언의 구원자 (2).

푸르른 초원이 펼쳐진 산등성이.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종말의 마수를 잡기 위해 움직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야 위치만 알면 혼자서도 움직일 수 있지만, 퍼드릭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수천의 군대를 이끄는 용사에게 군대를 내팽개치라곤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웅성웅성.

조잘조잘.

퍼드릭은 하나둘 정신을 차리는 이들을 부려 기절해 있는 이들을 내게서 멀리 옮기라 지시했고 그렇게 군대는 내게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진지를 꾸렸다.

그래 봐야 나한테는 수십 미터 정도밖에 안 됐지만.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둥근 밤이 찾아왔다.

‘오…. 이런 식으로 밤을 만들어 낸 건가?’

테라포밍 시스템 인필리언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의 밤은 꽤 그럴싸했다.

‘왜 태양보다 달이 더 크게 만들어진 건지 이해가 되네.’

축구공만 한 크기의 태양과 그보다 지름이 열 배는 클법한 두 개의 달.

달은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며 빛을 막아 이 세계에 밤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마치 전등 앞을 손바닥으로 가려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효과에 불과했지만, 밤은 밤이었다.

‘그러니까 저게 인공태양이라는 거지?’

어떤 원리로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 것은 인필리언이라는 테라포밍 시스템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퍼드릭이 군대를 물리고 진지를 구축하는 사이에 바닥에 주저앉아 상점창을 열었다.

[상점 등급: A]

[검색: ]

[구매] [판매]

[보유 포인트: 294,527]

‘어디 보자…. 검색. 인필리언.’

그러자 인필리언이란 단어와 관련된 아이템들이 등급을 불문하고 주르륵 떠올랐다.

검색된 아이템은 A급에서부터 SSS급까지 총 9개.

그중 내가 구매할 수 있는 A급 두 개는 딱 봐도 테라포밍과는 관련 없어 보이는 검과 갑옷이었다.

용기사 인필리언의 검과 갑옷이라는 이름의 무구들.

용기사라는 인물이 사용했다는 무구의 성능은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상세정보를 열어봤지만, 별것 없었다.

지구에서 생산되는 것보다 조금 성능이 좋은 정도?

‘굳이 100만 포인트나 주고 이 아이템을 살 바에야 지구에서 현찰로 비슷한 아이템을 사는 게 훨씬 싸게 먹히지.’

흥미를 잃은 나는 페이지를 넘겼고 S급 아이템 중에서 내가 찾던 아이템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템: 테라포밍 시스템 인필리언(ver 1.0)]

[등급: S급]

[설명: 랑데르칸 제국의 마법사들이 식민행성 개척을 위해 만들어낸 인공지능 테라포밍 시스템의 초기 버전으로 현재는 더욱 개선된 버전의 인필리언이 존재한다. 시스템 가동을 위한 에너지원으로는 드래곤 하트를 소모하며, 가동 시 테라포밍을 완료하기 전까지 시스템을 중단할 수 없기에 외부 공격으로부터 취약하다.]

[추가 설명: 가동 시 행성 면적에 상관없이 1개의 드래곤 하트를 소모하는 극악한 에너지 효율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는 SS급 마나석으로 가동이 가능한 개선된 인필리언(ver 4.0)이 존재하나 판매자의 능력 부족으로 구하지 못했다.]

가격은 S급에서는 최저가라고 볼 수 있는 101만 포인트.

무려 테라포밍이 가능한 아이템 임에도 가격이 저렴한 이유는 설명란을 보자 충분히 이해가 됐다.

1회 가동을 위해 필요한 에너지원이 드래곤 하트 1개.

드래곤이 길가에 굴러다니는 고블린도 아니고 당연히 드래곤 하트를 구하는 게 쉬울 리가 없다.

참고로 드래곤 하트의 등급은 무려 EX급.

태고룡 쿠아르탐파를 사냥하기 위해 아이템을 구할 때 이미 검색해 봤다.

‘랑데르칸?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어디였지?’

‘이건 사지마!’라고 뜯어말리는 것 같은 추가 설명을 뒤로하고 기억을 더듬던 나는 곳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아. 묘약 시리즈를 만들어낸 곳이 랑데르칸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맞나?’

확인해 보니 맞았다.

‘마도 제국이라더니 다른 행성 테라포밍도 하는 건가?’

저것만 있으면 지구의 달에도 사람이 사는 것이 불가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아공간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냈을 정도니.

추론해 보건대. 이 아공간의 주인은 테라포밍을 위해 이동하던 중에 사망한 것으로 보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그 과정 중에 아공간 내에서 인필리언이 가동되었고 수천 년이 지나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진 것 같았다.

‘아공간 안에 만들어진 세계니 외부의 공격도 없었을 테고 인필리언이 안정적으로 가동되는 게 가능했겠지.’

그렇게 이 세계의 창세기에 대한 추측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태양신의 용사 퍼드릭이 돌아왔다.

***

길드장들과 회의 아닌 회의를 끝마친 도연우는 각성자 센터에 마련된 자신의 길드장실로 돌아왔다.

“도 길드장님. 강현 씨가 그들과 대화할 거라 예상하십니까? 그들의 권위적인 행동을 보면 대화는커녕 거래도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길드장실로 들어온 것은 도연우 혼자가 아니었다.

신임 싸울아비 길드장 곽영철과 화랑 길드장 구지석이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것이다.

원래는 경쟁상대였을 이들이지만 어찌 되었건 지금은 한배를 탔기에 현 상황에 대해 도연우와 의논을 하기 위함이었다.

곽영철의 뒤를 따라 들어온 구지석이 대회의실에서 보여 줬던 여유로운 모습과는 다르게 걱정 섞인 목소리를 토해냈다.

“저도 곽 길드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저들은 10대 길드의 장으로서 누군가에게 고개 숙인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온 지 오래된 사람들입니다. 혹여 저들의 거만한 행동이 강현 씨의 심기를 거스를까 걱정되는군요.”

그들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본 도연우가 웃었다.

“현이가요? 그 녀석 오래전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했습니다.”

“예상했다고요?”

“강현 씨는 7대 길드가 이렇게 나올 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두 길드장의 물음에 도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과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한 것도 제가 독단적으로 꺼낸 말이 아니라 현이가 제게 부탁 한 거니까요.”

도연우의 말대로라면 7대 길드장들은 강현의 손바닥 위에서 논 셈이었다.

그 사실에 구지석은 나직하게 탄성을 토해냈고 곽영철은 강현에 대한 서태촌의 평가를 떠올렸다.

“허….”

“전임 길드장님께서 인중용이라 평가하시더니 과연….”

그 말을 들은 도연우는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인중용이라…. 서 영감님다운 평가네.’

그가 태초의 별에서 처음 강현의 수련을 도울 때 했던 생각은 단순했다.

키워 놓으면 괜찮은 자극을 주는 맞수가 될 수 있겠다는 기대.

하지만 그곳에서 한 달을 함께 보내고 난 뒤 그는 그 생각을 180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잘못하면 나도 잡아먹힐지도 모른다.’

여유는 사라지고 그 자리엔 불안과 초조함이 자리 잡았다.

비슷한 나이 또래에게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

이미 SSS급 각성자라 인정받은 도연우가 그런 생각을 해야 할 정도로 강현의 성장세는 무척이나 가팔랐다.

‘현이의 성장에는 브레이크도 방지턱도 없어. 앞에서 미적거리고 있다가는 순식간에 나를 추월할 거야.’

그리고 깨달았다.

강현은 자신의 그릇으로 평가할 만한 그릇이 아니라는 것을.

만일 강현이 시스템에만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도연우는 결단코 이런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태초의 별에서 수련하는 강현의 모습은 시스템 따윈 배제한 무인(武人) 그 자체였다.

무려 한 달이 넘는 시간을 수련에 매진했지만 단 하나의 무와 관련된 스킬도 생성되지 않았음에도 강현은 좌절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각성자라면 좌절했을 것이 분명한 상황.

하지만 강현은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당연한 것처럼 가르침을 받은 모든 마나 회로를 머릿속에 저장하고 몸에 각인을 시켰다.

마치 각성자가 등장하기 전 세상의 무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길산 분리법이 폐지되면…….”

“사업 방향을 다 각도로…….”

도연우는 어느새 길산 분리법 폐지와 길드의 사업 방향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누고 있는 두 길드장을 놔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분발해야지 적어도 못난 형이 될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도연우는 강현을 통해 그가 그토록 원했던 자극을 느끼기 시작했다.

길드장실을 나선 도연우가 향한 곳은 153층에 마련된 수련실.

‘지금, 이 순간에도 녀석은 성장하고 있을 테니까.’

지금 도연우에게 강현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충분한 자극을 주는 자극제이자 경쟁자이며 동생이었다.

***

태양신의 용사 퍼드릭.

그는 밀려오는 공포와 두려움을 무릅쓰고 용기를 냈다.

고개를 꺾어 올려다봐도 그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키를 가진 괴인(怪人).

퍼드릭의 입장에서 그런 괴인과 마주하는 것은 커다란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대화가 통하는 인간이었어.’

그나마 다행인 점은 괴인이 적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자신과 함께 모든 병력이 기절했음에도 공격하지 않았고.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마나 파동에 병사들이 쓰러지는 걸 확인하고는 뇌파 통신이라는 신비로운 마법을 부려 대화를 시도해 오지 않았던가.

퍼드릭은 그가 괴인이긴 하지만 배려심이 깊은 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 거체를 마주하면 몸이 떨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지 위에 앉아있는 지금도 그 체구가 자그마한 산과 같을 정도니까.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돌아온 퍼드릭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던 괴인이 반색했다.

‘아. 그럼 이제 종말의 마수에게 안내해 주실 수 있나요?’

퍼드릭은 군대가 주둔해 있는 진지를 돌아보곤 말을 이었다.

‘물론입니다. 그전에 귀공의 존함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퍼드릭의 물음에 강현은 그제야 아직 제대로 된 통성명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죄송합니다. 저도 이 세계는 처음이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제 이름은 강현. 종말의 마수를 처치하기 위해 왔습니다.’

강현의 말에 퍼드릭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태양신의 신탁을 받은 용사란 말인가?’

그도 그럴 것이 이곳 인필리언에서는 종말의 마수를 퇴치하는 것이 용사의 의무이자 용사의 증명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퍼드릭의 생각은 그대로 강현에게 흘러 들어갔다.

아직 뇌파 통신이 미숙하기에 벌어진 일.

강현은 새삼 세계의 룰이 다름을 느끼고 쓴웃음을 지었다.

태양신의 신탁을 받은 용사만이 종말의 마수를 잡을 수 있으며 또 그게 용사의 의무이자 증명이라니.

‘지구에서 말한다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욕먹을 각인데. 여긴 또 다르네.’

강현은 퍼드릭의 오해가 더 깊어지기 전에 그것을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용사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태양신이 다른 세상에서 용사를 불러온 것으로 생각한 퍼드릭이 침울해지는 것이 뇌파 통신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퍼드릭 경.’

부름을 받은 퍼드릭이 침울한 기색으로 강현을 올려다봤다.

‘저는 태양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강현경? 설마 태양신께서 경을 부르신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퍼드릭의 물음에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는 경의 말처럼 태양신의 부름을 받고 이 세계로 넘어온 것이 아닙니다. 자세한 이유는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제가 종말의 마수를 처치하려고 하는 이유는 태양신의 신탁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제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임무…라니. 그게 무슨?’

‘네. 저는 종말의 마수를 처치하는 임무를 받았고, 마수 처치를 완료하면 임무의 보상을 받습니다. 그러니 굳이 제가 하는 일을 정의하자면 용사보단 사냥꾼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네요.’

원래 직업은 청소부지만, 강현은 이쪽이 설명하기 편할 것 같다는 생각에 약간의 거짓말을 섞었다.

그렇게 강현의 설명이 끝나자 침울해하던 퍼드릭의 몸에 활기가 돌아왔다.

‘참 알기 쉬운 사람이네.’

그도 그럴 것이 강현의 설명을 들은 퍼드릭의 몸에서 은은한 황금빛 오라가 흘러나와 주변을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침울할 땐 오라가 줄어들더니 또 기분이 나아지자 주변에 찬란한 황금빛을 흩뿌렸다.

자신이 태양신의 가호를 받았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퍼드릭의 기분이 나아진 것을 확인한 강현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종말의 마수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사실 퍼드릭에게 질문을 하기 전부터 샤이닝 에로우를 풀어 주변을 정찰하고 있었지만, 아직 종말의 마수, 그러니까 크롤러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푸른색 아공간이었다면 입장과 동시에 균열에 달라붙어 있는 크롤러를 발견할 수 있었을 테지만 여긴 사정이 달랐다.

작긴 하지만 하나의 세상이 만들어져 있는 이곳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생명으로 가득했고 그중 크롤러를 찾아내는 것은 샤이닝 에로우라 해도 힘든 일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강현은 퍼드릭의 안내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었다.

강현의 물음에 황금빛으로 주변을 밝히고 있던 용사 퍼드릭이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종말의 마수가 있는 곳은….’

강현은 퍼드릭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태초의 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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