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120화 (119/202)

120. 인필리언의 구원자 (1).

난장판이라 불러도 할 말이 없을 만큼 파괴된 공간.

원래라면 욱일회주의 거처였을 이곳을 차지한 이는 얼굴 전체를 가린 기괴하고 새하얀 가면을 쓴 가면인이었다.

새하얀 가면을 쓴 가면인.

그는 마치 동상같이 멍하니 서 있는 욱일회주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수천 개에 달하는 은침이 온몸에 빼곡하게 꽂힌 회주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할 뿐,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흠…. 이제 완벽해졌군.”

그렇게 회주에게 손길을 거둔 가면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리나. 효고?”

이제는 불러주는 이조차 없는 회주의 이름.

성별도 나이도 분간할 수 없는 기괴한 가면인의 목소리가 회주의 귀를 타고 들어가는 순간.

수천 개에 달하는 은침이 회주의 몸을 파고 들어가며 자취를 감추었고.

번쩍.

마치 그의 이름이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채색이었던 회주의 눈에 생기가 깃들며 빛이 났다.

“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어딘가 경직된, 딱딱한 목소리였지만 그것은 분명 ‘인형’이 되기 전 회주의 목소리였다.

가면인은 홀로그램 지도를 띄워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첫 번째 명령이다. 내일까지 욱일회의 전 병력을 이곳으로 집결시켜라.”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회주가 닫혀 있던 문을 열고 내실을 빠져나간 후 홀로 남은 가면인은 짙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며 중얼거렸다.

“앞으로 재미있어지겠군…. 쿡쿡.”

***

“와---.”

아공간 안에서 눈을 뜬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푸른색 아공간과 무언가가 다를 거라는 걸 예상은 했었다.

조금 긴장을 하기도 했다.

황금색 아공간이 내가 청소해야 할 아공간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었지만, 이 아공간에 대해 내가 아는 정보라곤 없었으니까.

두려움 반 기대 반.

그런데도 내가 노란색 아공간을 건너뛰고 황금색 아공간을 고른 이유는 왠지 모를 끌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단코 이런 광경이 눈앞에 펼쳐질 거란 상상은 하지 못했다.

중앙에서 빛을 내는 태양.

그 주위를 맴도는 두 개의 달.

낮게 깔린 구름과 길게 이어진 산맥 그 사이를 흐르는 강줄기와 커다란 바다.

하나의 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것도 내가 전혀 상상해 본 적 없는 모습으로.

거대한 원형의 구체 안에 세상을 창조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전후좌우 위아래.

어느 방향으로 눈길을 돌려도 초록의 숲과 강 그리고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하나의 세계.

황금빛 아공간 안엔 하나의 세계가 존재했다.

마치 지구처럼.

단지 지구와 다른 점이 있다면 모든 것이 작다는 것이었다.

내가 딛고 선 대지에서 가장 큰 나무의 키가 종아리에 닿을 듯 말 듯 했고, 가장 높은 산의 꼭대기라고 해 봤자 5층 빌딩 정도에 불과했다.

강줄기의 폭은 가장 넓은 곳이 1m를 넘지 못했고 바다는 기껏해야 초등학교 운동장 크기였다.

모든 것이 작은 세상.

내가 이곳이 하나의 세계라고 단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세계에 살아가는 생명체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공간 안에 생명체라니.

분명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공간 안에선 생명이 살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상식은 더는 상식이 아니게 되었다.

‘씨드. 혹시 여기가 플리피 행성이야?’

씨드가 만들어진 플리피 행성이 이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고 작은 생명체들이 초원 위에서, 바닷속에서, 그리고 마땅히 하늘이라고 불러야 할 곳들에서 느껴졌다.

처음 크롤러를 상대하면서 깨달았던 감각의 영역.

레벨업과 함께 확장된 그 영역의 모든 곳에서 생명체의 움직임이 느껴졌으니까.

분명히 아공간 안인 이곳에서….

그렇게 어쩌면 편견이었을지도 모를 상식 하나가 부서졌다.

‘……이곳은 플리피 행성이 아닙니다. 하지만 충분히 플리피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만한 공간이긴 하군요.’

뒤늦게 씨드의 대답이 들려왔지만 나는 미처 그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저 아래.

그러니까 내 발치쯤에서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인간 수천이 중무장을 한 채 내게 무기를 겨누고 있었으니까.

“[email protected]$#%$^^%*$!!”

그중 선두에 선 황금색 갑옷을 입은 기사가 날카로운 가시와 같은 검을 빼 들고 뭐라 뭐라 소리를 쳤다.

딱 봐도 내가 악역인 모양이다.

‘어우. 설마 내가 왕국을 침략한 멸세의 마왕 같은 건가?’

아니, 아공간 청소를 해야 하니 마왕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아직 속단하기엔 일렀다.

“$#$$#^$#^@#!!”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검을 든 기사가 화가 난 것처럼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봐야 내겐 앵알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정체를 밝히라는 것 같지?”

나는 무심결에 씨드를 향해 질문을 던졌고 순간 아래쪽에선 난리가 났다.

단순히 말 몇 마디 내뱉었을 뿐인데. 기사를 위시한 수천의 미니미들이 귀를 틀어막은 채로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아…. 이건 생각 못 했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미안하다는 말도 못 하겠다.

죄다 거품을 물고 기절할까 봐.

일단 미니미들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게 확실하기도 했고.

‘아! 그게 있었지?’

그러다 문득 스킬창에서 잠자고 있는 스킬 하나가 떠올랐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획득하고 얻은 스킬.

처음엔 씨드와 대화를 하기 위해 사용했지만, 씨드가 한국어를 익힌 이후엔 사용할 일이 없었던 스킬이기도 했다.

“스킬 사용. 언어의 마술사.”

내가 스킬 사용을 위해 입을 열자 비척비척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던 미니미들이 다시 한번 뒤집혔다.

거참. 작게 말한다고 한 건데.

-스킬: 언어의 마술사 E가 사용됩니다.

-해당 언어를 한국어로 동기화합니다.

-1.2…100%.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렇게 스킬이 사용됐지만 나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 쓰러진 미니미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어우야…. 쟤들은 지렸는데?

그중 몇몇은 하의가 누렇게 변해 있었다.

***

잠시 후.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황금 기사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바로 세우며 내게 검을 겨눴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적과 대적하려는 기사의 기개가 그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 체구는 비록 손톱만 한 크기였지만 기개만큼은 대단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태고룡 쿠아르탐파가 습격했을 때가 생각나네. 난 T-렉스가 토해낸 피어도 못 버티고 몸이 굳었었는데….’

아다만티움 바디가 활성화 중이었기에 물려도 죽거나 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땐 연우 형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T-렉스 입속 관광을 할 뻔했었다.

‘씨드 혹시 저 기사에게 뇌파 통신 적용해 줄 수 있어?’

‘해당 개체가 뇌파 간섭을 허락한다면 가능합니다.’

그럼 일단 먼저 허락을 구해야 한다는 건데….

나는 눈동자를 움직여 황금갑옷의 기사를 내려다봤다.

황금색 마나가 일렁이는 검을 치켜들고 당장이라도 내게 달려들 것처럼 적의를 내뿜는 기사.

“이봐. 일단 대화를 하자.”

조용히 귓속말을 속삭이듯 말하자 기사가 고개를 꺾어 나를 올려다봤다.

“괴물! 정체를 밝혀라! 왕국을 침략한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라! 설마 종말의 마수가 보낸 하수인이냐!!”

대화하자고 했더니 냅다 고함을 친다.

물론 그래 봐야 여전히 옹알이 수준이지만.

나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아-. 이봐. 종말의 마수가 뭔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놈의 하수인이면 이렇게 대화를 할 시간에 너희를 밟아 죽였겠지. 네 일행 전부 다시 기절시키려는 거 아니면 일단 이거 먼저 수락해.”

그러자 내 목소리에 움찔 몸을 떨던 황금 기사가 이내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주변에 있는 건 오로지 바닥을 뒹굴며 게거품을 물고 있는 동료들뿐.

그 광경을 확인한 기사가 검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씨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가 뇌파 간섭을 허락했습니다. 다자간 뇌파 통신 채널이 열립니다.’

그리고 씨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선이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뇌파 통신을 통해 들려왔다.

‘그대.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오해해서 미안하오. 하지만 오해를 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상황도 이해해주길 바라겠소.’

묵직하고 단단한, 바위를 떠올리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어…. 저도 갑작스럽게 나타나 혼란을 준 것 죄송합니다.’

내가 사과를 하자 황금 기사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니외다. 그 또한 나의 불찰. 그대의 사과를 들을 자격이 나에겐 없소.’

여전히 묵직하지만, 왠지 시무룩 한 기사의 목소리.

하긴 그대로 내게 덤벼들었다면 전멸이나 다름없었을 테니 수천의 군대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반성해야 할 일이긴 했다.

적의 정보도 알지 못하면서 돌격을 감행하는 지휘관은 말 그대로 최악이니까.

나는 그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황금 기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런 대군을 이끌고 어디로 가고 있었던 건가요?’

솔직히 이 세계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 더 컸다.

푸른색 아공간과 다르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처럼 하나의 세계가 존재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이곳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정신이 없다 보니 소개가 늦었구려. 나는 태양신의 가호를 받는 용사. 퍼드릭이라 하오. 신탁을 받아 종말의 마수를 처치하기 위해 가던 중이었소.’

그리고 자신을 퍼드릭이라 소개한 황금 기사의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신? 신탁? 용사?’

아공간을 청소하러 들어왔더니 갑자기 웬 신?

그런 내 반응과는 무관하게 퍼드릭의 말은 이어졌다.

신탁(神託)과 종말(終末)의 마수(魔獸)에 관한 그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띠링.

-아공간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퀘스트창을 확인해 주세요.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잠시만…. 확인해야 할 게 있습니다.’

퍼드릭에게 양해를 구한 나는 퀘스트창을 열었다.

[아공간 퀘스트: 인필리언의 구원자]

[등급: SS]

[내용: 해당 아공간은 테라포밍 시스템 인필리언에 의해 하나의 세계로 재창조되었습니다. 수천 년의 시간(인필리언 시간 기준)에 걸쳐 생명체가 탄생하고 진화하여 문명을 이루어낸 인필리언. 이 ‘아공간 안의 세계’는 세계수에게 하나의 세계로 인정받기 전 아공간 기생 생명체 ‘크롤러’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크롤러를 처치해 인필리언이 하나의 세계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경고: 인필리언을 침략한 크롤러는 지금껏 당신이 상대해 왔던 크롤러와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진행상태: 대기 중]

[보상: 보너스 스탯 100. 칭호: 인필리언의 구원자. 상점 포인트 1,000,000. 선업 포인트 1,000,000. 특성카탈로그.]

[수락] [거절]

-퀘스트를 거부할 경우 사용자는 지구로 돌아가며, 재입장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SS급 퀘스트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화려하기 그지없는 보상.

하지만 그것들보다 내 눈을 끈 것은 경고문구였다.

지금껏 내가 상대했던 크롤러와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가지고 있다는 경고문구.

어찌 보면 시스템은 내가 이대로 퇴각하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지금까지 없었던 퇴로까지 제공해 주지 않았나.

하지만.

‘해 볼 만할 것 같은데?’

나는 왠지 이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퀘스트 창을 벗어난 내 눈은 시스템 메시지를 훑었다.

-특성: 아공간 청소부 B (LV5) 가 발현됩니다.

-특성: 공간시 A (LV4) 가 발현됩니다.

-특성: 아공간 조작 B(LV9)가 발현됩니다.

-특성: 모태 솔로 A (LV2) 가 발현됩니다.

지난 3주간 성장한 특성과 스킬 그리고 레벨은 내게 이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줬다.

특히 모태 솔로 특성은 A급으로 레벨업 한 뒤 솔로잉 시 모든 능력치를 3배나 상승시켜줬다.

원래 내 스탯은 2천 대지만, 솔로잉이라는 조건이 성립된 지금, 내 스탯은 3배가 상승해 9천 대에 가까워졌다.

상태창으로 확인할 수 없는 공격력과 방어력 등도 마찬가지로 3배 상승했을 테고 말이다.

수수께끼 알이 모든 몬스터를 먹어치운 덕에 이 능력치를 가지고 실제 전투를 치러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자신이 있었다.

이 퀘스트를 클리어할 자신이.

딸칵-.

손가락을 움직여 수락 버튼을 클릭한 후, 나는 퍼드릭을 향해 물었다.

‘그 종말의 마수라는 놈은 어디에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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