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116화 (115/202)

116. 본업에 충실할 때 (3).

갑작스럽게 카페에 내려앉은 침묵.

은은하게 흐르는 음악만이 그 침묵을 깨고 있을 때.

파티원들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다른 손님들의 시선까지 해찬이에게 향해 있었다.

“어…. 일단 손은 좀 놓고….”

내 말에 화들짝 놀란 해찬이 쥐고 있던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어. 죄송해요. 형. 제가 너무 기뻐서.”

발모제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뻐할 일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내 옆에 앉아 있던 기적 형님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자 측은한 눈으로 해찬을 바라보던 기적 형님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바르고 남은 거 해찬이 줘도 돼?”

“아…. 네. 그건 제가 형님 드린 거니까. 형님 마음대로 하셔도 되죠.”

엊그제 드린 발모제가 100㎖짜리였으니 한 아홉 명은 더 바를 수 있을 만한 양이 남아 있으리라.

내게 허락을 구한 기적 형님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해찬을 바라보더니 이내 녀석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거. 형이 줄게. 해찬아.”

“크흡. 감사해요. 기적형.”

감동한 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해찬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녀석의 머리에 자라있는 머리카락이 녀석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고 보니 머리 모양이 변하는 걸 본 적이 없네. 하하.’

동병상련을 느낀 것인지 해찬의 손을 붙잡고 다독이는 기적 형님을 본 나는 분위기를 전환할 겸 업무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일 얘기 좀 할까요?”

원래 본론은 이거였으니까.

아직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

***

이해찬을 부 길드장에, 기적 형님을 사업부 사장에 임명한다는 발표 아닌 발표에 파티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작 당사자인 두 사람은 아직도 손을 맞잡고 끈끈한 우정을 확인하고 있었지만.

길드 사무실을 어디에 차릴 것인지도 말했다.

조금 전에 봤던 건물을 구매해 1, 2층을 경매장 오프라인 매장과 사무실로 3, 4층을 길드 사무실로 쓸 거라는 말에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냥 사무실 임대하는 건 줄 알았다나?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이루미가 손을 번쩍 들더니 질문을 던졌다.

학교도 아닌데 질문할 때 손은 왜 드는 것인지.

“질문 있어요. 길드장님.”

“네. 말씀하세요.”

“‘길드 산업 분리법’ 때문에 길드는 사업체를 운영할 수 없고, 기업들은 길드를 만들 수 없는 걸로 아는데 어떻게 두 가지를 같이하실 생각이시죠?”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수긍하는 다른 두 사람에 비하면 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아. 길산 분리법은 곧 폐지될 겁니다.”

“네? 그게 무슨…. 길드장님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발끈하는 이루미.

“그거 현이 형 말이 맞아. 그 법 곧 폐지될 거야. 최근 워낙 큰 이슈가 많아서 매스컴엔 노출이 되지 않았는데 이미 국회에서 내년 1월부터 폐지되는 거로 통과됐어.”

하지만 옆에서 들려온 이해찬의 말에 이루미는 곧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이루미가 이해찬을 좋아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이해찬의 배경을 알고 있다고.

눈치를 보니 해찬이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뭔가 어색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감도는 듯했지만, 채민하와 백영웅은 그다지 신경을 쓰는 모습이 아니었다.

이미 익숙해진 듯한 느낌이랄까?

두 사람을 일별한 나는 설명을 이었다.

“법안이 통과되긴 했지만, 아직 시행 전이라 길드와 사업을 병행하는 건 어렵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나는 진지한 눈으로 해찬과 기적 형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따라서 올 연말까지는 이해찬 부 길드장을 중심으로 한 파티사냥, 그리고 이기적 경매사업부 사장님을 중심으로 한 경매사업이 따로 진행될 겁니다. 이기적 사장님은 건물 리모델링과 직원채용을 빈틈없이 해 내년 초에 길드가 설립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해 주시고, 이해찬 부 길드장님은 지금부터 신규 길드원 영입에 신경을 써 주십시오.”

“네. 대표님.”

“네. 길드장님.”

내 말이 끝나자 두 사람은 단단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렇게 보니 뭔가 좀 든든했다.

기껏해야 다섯 명에 불과하지만, 이들이 내가 쌓을 성의 기둥이 되어줄 것이다.

이제 시작인 거다.

나는 테이블에 앉은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강철의 성벽이라는 직업을 가진 탱커 백영웅.

선혈의 검사라는 직업을 가진 검사 채민하.

겁화의 마도사라는 직업을 가진 마법사 이해찬과 명품 힐러라는 직업을 가진 이루미까지.

거기에 기적 형님까지 함께하니 든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들과 함께 나의 성을 만들 것이다.

크고 단단하며 아름다운 성을.

내가 그렇게 다섯 사람의 얼굴을 눈에 담고 있을 때 채민하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 길드장님.”

“네. 말하세요. 채민하 씨.”

“혹시 신규 길드원을 추천해도 될까요?”

긴장한 듯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 동생이 길드장님이 주신 포션을 먹고 마나 중독이 나았는데…. 각성을 한 것 같다고 말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까 함께 각성자 센터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정말 각성을 했어요. 그래서 은혜를 갚겠다고 길드에 가입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조만간에 부 길드장님과 면접을 한번 보도록 하죠.”

채민하의 말에 기적 형님을 제외한 다른 세 사람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형. 아니 길드장님. 설마 그 포션이…?”

“그렇지 않아도 부 길드장에게 전달을 하려고 했는데, 신규 길드원들 영입할 때 각성 여부는 상관없이 인성과 길드에 대한 의리를 중점으로 두도록 하세요.”

솔직히 충성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을 성장시켜 준 길드에 대한 의리 정도는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면 싶었다.

“우리 즈믄나래 길드는 영입한 길드원의 각성과 성장을 지원할 겁니다.”

내 말의 의미를 파악한 해찬이가 탄성을 내질렀다.

“와…!”

“우리의 영입 대상은 이미 각성을 한 각성자들이 주가 아닙니다.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마나 적응도가 낮은 일반인들, 이를테면 격투기 선수나 무도의 달인들, 그들이 우리의 영입 대상입니다.”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길드장님.”

“그게 우리 즈믄나래 길드와 다른 길드들과의 차별점이자 강점이 될 겁니다.”

나 이외에도 마나의 묘약을 가진 길드가 세 군데 더 있지만, 그들은 각자 운영하는 각성자 전문대학이 있으니 경쟁상대가 아니었다.

뭐. 경쟁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거고.

개인적인 친분이 두텁긴 하지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

***

“일이 꽤 크게 틀어졌군.”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고 지나가자 주위에서 타오르던 촛불들이 거친 바람을 맞은 것처럼 일렁거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설마 그들이 사혼 감옥을 탈출할 거라고는 회주님도 예상하지 못하셨잖습니까.”

살기를 뿜으며 분노를 토해 내는 회주와는 다르게 천연덕스럽기 그지없는 가면인의 목소리가 회주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니!! 자네의 그 말이 이토의 뜻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낮고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 살기.

콰직. 퍼버벅!

순간 다다미방을 밝히던 촛불들이 꺼지고 실내에 있던 가구와 전자기기들이 굉음을 내며 터져나갔다.

후드득.

“이 정도 일에 총리님의 이름을 입에 담다니 경솔하시군요.”

“…뭐라?”

회주의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가면인.

퍼엉!

그 모습에 분노한 회주가 내뿜은 기운에 가면인의 앞에 놓여 있던 다탁이 터지며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들이 살아 돌아온 것이 이렇게까지 분노할 일인지 의문이 드는군요. 그들이 사혼 감옥을 탈출한 것은 예상 밖이긴 했지만 우리는 충분한 시간을 벌었지 않습니까.”

“고작 시간 따위를 벌자고 벌인 일이 아니니까 문제지!”

“한 달 보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는 세 개의 길드를 만들었고 음지에 있던 회의 전력을 양지로 끌어올리는 것에 성공했잖습니까.”

“그래, 그렇게 움직인 덕에 놈들의 표적이 되겠지.”

한울, 화랑, 싸울아비.

세 개 길드에 심어 두었던 첩자들의 활약으로 꽤 많은 인원을 새로 만든 길드로 끌어올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든 세 개의 길드.

길드장들의 등급이 S급일 뿐이지 규모 면에서는 10대 길드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길드들이었다.

그리고 회주 또한 며칠 전까지 그 사실에 만족하고 있었다.

회의 돈을 먹은 정치인들을 이용해 길산 분리법을 철폐하는 데 성공했고, 길산 분리법이 철폐되는 내년을 기점으로 욱일회의 자금으로 성장한 기업들과 연계할 계획이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서태촌, 구정철, 도연우.

그들이 사혼 감옥에서 죽지 않고 돌아오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그들의 칼끝이 욱일회를 향할 거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 시작은 자신이 10대 길드 진입을 노리고 만들어 놓은 세 개 길드일 테고 말이다.

“그렇게 되겠지요. 화주께서 만든 세 개 길드는 아주 훌륭한 떡밥이 되어줄 겁니다.”

어딘가 나른한 가면인의 목소리.

그제야 회주는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네놈…. 감히 무슨 말을 지껄이는 것이냐. 욱일회가 떡밥이라고?”

상처 입은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이럴까?

낮게 깔린 회주의 목소리에는 인간의 본능 깊숙한 곳에 자리한 공포를 자극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욱일회…. 그것 말고는 딱히 쓸 곳이 없는 조직이더라고요. 80년이라는 세월 동안 낡고 낡아 더는 굴러갈 수 없는 자동차 같달까요? 떡밥 정도의 효용 가치라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회주?”

그 말을 듣는 순간 욱일회주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폭발적인 기운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꾸구구궁.

우지직.

그 기운을 감당하지 못한 건물이 거친 파열음과 함께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네놈…. 그 목을 잘라. 총리에게 직접 그 말의 책임을 묻도록 하마.”

살기 어린 회주의 목소리를 들은 가면인은 피식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쿡. 당신이 나를? 하하하. 미안해요. 웃으면 안 되는데 너무 웃기네요.”

마치 재미있는 유머라도 들은 사람처럼 허리를 뒤로 꺾으며 박장대소를 하는 가면인의 행동에 회주의 새하얀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 나도 재미있는 얘기 해줄까요? 욱일회는 떡밥. 당신은 미끼. 당신과 욱일회의 희생으로 본국과 반도를 잇는 워프 게이트를 열 거랍니다.”

“감히!!”

“참. 고루하고 낡아 빠졌어요. 당신이나 욱일회나 말이죠. 그렇게 낡아빠진 생각을 버리지 못하니까 아직도 음지에서 테러단체 소리나 듣고 있는 겁니다. 쯧.”

그렇게 혀를 찬 가면인이 자신의 옷에 붙은 먼지를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의 SS급 스킬. 불사(不死)라고 했던가요?”

“그, 그걸 네놈이 어떻게?”

여태껏 숨겨왔던 자신의 SS급 스킬의 이름이 가면인의 입에서 나오자 회주의 눈동자가 파도를 만난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놀랐어요? 그게 뭐 큰 비밀이라고 그렇게 놀라요? 재미없게….”

그렇게 회주와 마주 선 가면인의 두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차라리 불로(不老) 스킬이었으면 더 좋을 뻔했는데 말이죠. 그럼 그 낡고 고루한 생각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욱일회를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사박사박.

가벼운 발걸음으로 회주의 앞까지 다가온 가면인이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회주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큭. 끄으윽.”

그리고 가면인이 그렇게 움직이는 동안 흔들리는 눈동자를 움직여 그를 바라볼 뿐 회주는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흠….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요.”

“크륵. 끄으윽.”

“어어? 자꾸 그렇게 움직이려고 하지 말아요. 그런다고 풀리는 거 아니니까.”

가면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온몸에 힘을 주며 움직이려 하던 회주의 몸이 덜컥 멈춰 섰다.

“자- 이제 앉아요.”

그러자 박살이 난 다다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는 회주.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면 그것이 자신의 의지가 아님이 명확했다.

“신기하죠? 재미있죠?”

그런 회주의 앞에 털썩 주저앉은 가면인이 전에 없이 흥에 넘치는 목소리로 말하더니 품속에서 가느다란 은색 침 하나를 꺼내 들었다.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막 화내거나 복수하겠다거나 그런 생각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가느다란 은침이 허공으로 떠올라 회주의 백회혈에 가서 닿았다.

“좋은 생각 해요. 좋은 생각. 행복하고 기쁜 생각. 지금 하는 생각이 자기 의지로 하는 마지막 생각이 될 텐데. 그게 나에 대한 복수라면 당신 인생이 너무 비루하잖아.”

그 말을 끝으로 가면인의 손이 가볍게 허공을 휘젓자 회주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은침이 벼락같이 백회혈을 파고 들어갔다.

털썩.

정신을 잃은 회주의 몸이 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으로 쓰러지고.

그것을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가면인이 흥미롭다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흠. 그래도 꼴에 불사 스킬을 지니고 있다고 제법 반항을 하네. 조율하는 데 시간이 걸리겠어….”

그의 직업은 백은의 인형술사.

“불사의 인형이라…. 쓸만하려나?”

일본 정부가 키운 인술의 대가이자 SSS급 각성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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