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114화 (114/202)

114. 본업에 충실할 때 (1).

행성 랑데르칸.

제도 랑플 외곽의 한 허름한 건물에서 커다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다 팔았다!! 꺄하하하!”

건물이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분주하게 움직이던 이들의 시선이 한 사무실로 향했다.

과연 제구실을 할지 의심이 되는 낡고 허름한 문에 걸린 명패에는 ‘사장실’이란 직함이 적혀 있었다.

덜컥!

시선이 집중된 그 순간 사장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꾀죄죄한 몰골의 여성이 튀어나왔다.

“회식하자. 회식!! 가게 문 닫아!!”

부스스한 머리칼,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한 여성의 몰골은 노숙자 그 자체.

“하아-.”

상점점원 중 점장이자 동업자인 이탄은 그 모습을 보고 머리를 짚었다.

“뭐해 이탄! 회식 가자니까?!”

이탄은 다시 한번 회식이란 말을 외치며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사장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켁! 아-왜에?!”

“지금 그 꼴로 밖에 나가면 경찰이 잡아다가 노숙자 재활센터로 보낼걸?”

“응?”

“설마 모르고 있었어? 아리안 너 냄새 나. 대체 며칠을 안 씻은 거냐?”

직원이 사장에게 하는 말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직설적인 말투였지만 주변에 있는 다른 직원들은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20년 지기 친구이자 동업자니까.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회식이 아니라 밀린 월급입니다. 사장님. 누가 무리한 투자를 하는 바람에 회식은커녕 몇 달 동안 월급 구경도 못 했어요.”

무리한 투자를 한 누군가는 물론 아리안이었다.

상회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공격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며 은행 대출까지 받아 투자한 회사가 부도나서 주식이 휴짓조각이 되어 버렸으니까.

덕분에 쌓이는 건 은행의 독촉장이요. 월급을 받지 못한 직원들의 한숨뿐이었다.

“아? 미안….”

그제야 주위를 둘러본 아리안은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사장실로 들어갔다.

낡은 사장실의 문이 앓는 소리를 내며 닫히고 나서야 그 광경을 본 직원 하나가 조심스럽게 이탄에게 다가와 물었다.

“저…. 점장님. 사장님 괜찮으실까요? 상처받으신 것 같은데.”

“괜찮아. 이렇게 하지 않으면 또 어디에다가 투자하겠다고 설레발 칠지도 모르니까 미리 극약처방을 해야 해. 뭐. 이런 거로 기죽을 녀석이 아니기도 하고.”

그렇게 말을 마친 이탄은 사장실로 다가가 노크를 했다.

똑똑.

“사장님. 이탄입니다.”

“들어오세요.”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선 이탄은 좀 전과는 다른 아리안의 모습에 나직한 감탄을 토해 냈다.

“허어….”

아무리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지만 이건 변신이 아니라 사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리안의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폭포수처럼 웨이브 져서 떨어져 내린 푸른색 머리칼, 땟국물이 줄줄 흐르던 얼굴은 깔끔하게 씻은 듯 뽀얀 빛을 내고 있었다.

물론 이탄은 이 모든 게 마법의 힘임을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 여러모로 모자라 보이긴 하지만 아리안은 무려 6클래스의 마법사니까.

“무슨 일이죠 점장님?”

바다처럼 짙은 푸른색 눈동자만큼 촉촉하게 물기에 젖은 듯한 목소리.

이탄은 그 짧은 시간에 노숙자에서 미녀로 변신을 마친 아리안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20년 지기 친구가 아니었다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를 만큼 완벽한 변신이었다.

“이번 거래에서 얼마나 매출을 올리셨는지 말씀을 안 해 주신 것 같아서 그걸 여쭤 보려고 왔습니다.”

투자에 실패한 아리안이 뭐에 꽂힌 건지 이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 모은 묘약은 모두 2만 2천여 개.

그중 지난 몇 달 동안 판매된 건 고작 천여 개에 불과했다.

덕분엔 지난 몇 달간 이탄은 상회 운영에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야 했다.

상회 운영은 이탄, 이계 거래는 아리안.

처음 동업을 시작하면서 정한 규칙이기에 아리안의 독단을 제지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 될 정도로 지난 몇 달간 상회 운영은 너무 어려웠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묘약들을 모두 판매했다고 했으니 꽤 큰 포인트를 벌어들인 것은 확실한데.

2만 개에 가까운 묘약을 하루 만에 판매했다는 건 이탄의 상식선에선 떨이를 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포인트를 얼마나 벌었냐고 물었나요. 점장?”

이탄의 물음에 아리안이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흠…. 저러는 거 보면 다행히 손해는 안 본 모양인데?’

마치 제도(帝都) 높은 곳에 사시는 귀족들을 흉내 내는 듯한 고고한 그 모습에 이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킁. 지랄 말고 얼마나 버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사장님? 이건 동업자로서 정당한 요구입니다만?”

이탄의 말에도 여전히 고자세를 유지하던 아리안은 선 분홍빛 입술을 열어 우아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천만 포인트.”

“…얼마?”

믿을 수 없는 포인트 양에 이탄은 재차 되물었고 아리안은 다시 우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천만 포인트.”

“……이천만?”

“이천만.”

“…….”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아리안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탄은 이내 사장실의 문을 열고 밖에 소리쳤다.

“그만! 정리하고 가게 문 닫아! 오늘 회식이다!!”

매일 똥만 푸던 사장이 큰 건을 터트렸다.

그것도 장사를 시작한 지 8년 만에 처음으로.

떨이를 친 줄 알았더니, 모두 제 가격보다도 높은 가격에 판매했다.

***

별천지라고 하던가?

그. 왜 별이 지천으로 깔린 땅 말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전용 던전의 내부는 그 별천지라는 말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풍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축구장 넓이의 땅덩어리에 색색의 빛으로 반짝거리는 수천 개의 아공간 입구.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방치된 전용 던전은 입구 주변을 제외하면 발 디딜 틈도 없이 아공간이 가득 차 있었다.

“후아-. 보는 건 장관인데 청소할 걸 생각하니 암담하네. 씨드. 지금 아공간 개수가 모두 몇 개야?”

“모두 1541개의 아공간이 던전 안에 존재하며 그중 사령관님께서 청소해 본 경험이 있는 푸른색 아공간은 935개입니다.”

씨드의 보고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1541개의 아공간.

이걸 다 청소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생각해 보면 눈앞이 캄캄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청소 경험이 있는 푸른색 아공간이 935개라는 점이다.

“일단 푸른색 아공간을 먼저 정리하는 거로 하자.”

무려 935개나 되는 아공간이다.

태초의 별에 다녀오기 전이었다면 하루에 열 개를 청소하는 게 고작이었을 거다. 그것도 온갖 상처를 입어가며.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나는 한 달 보름 전보다 강해졌고 이젠 푸른색 아공간쯤은 숨 쉬는 것처럼 쉽게 정리할 자신이 생겼다.

‘지금 내 스팩은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어. 새로운 특성도 생겼고.’

새로운 카탈로그에서 특성을 선택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하나 빼곤 전부 쓰레기였으니까.’

선택 장애가 있는 사람도 아무런 고민 없이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이번 카탈로그에 나온 특성들은 단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쓰레기였다.

모태 솔로 B-450,000P

└홀로 적을 상대할 시 모든 능력치가 두 배로 상승한다. (공격력, 방어력 포함)

고작 B등급에 불과하지만 다른 A급 특성들보다 비싼 45만 포인트짜리 특성.

‘현아. 네 말대로면 모태 솔로라는 특성이 제일 좋은 거 아니야?’

어젯밤, 특성 카탈로그를 열고 고민하는 내게 연우 형이 한 말이었다.

처음에 난 이게 뭔 생뚱맞은 소린가 싶었다.

같은 가격이면 A급이 좋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당연한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연우 형의 말에 나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일반적인 물건이라면 같은 가격에 급이 높은 게 이득이 되는 거겠지만, 특성은 물건이 아니잖아. 성장이 가능하다며? 그럼 45만 포인트짜리 특성이 성장해서 A급이 되면 더 비싸지는 거 아니야?’

듣고 보니 그 말이 맞았다.

성장형 장구류가 어마어마하게 비싼 이유가 그것이지 않은가.

그래서 난 쓰레기 같은 A급 특성 속에서 유일한 B급 특성을 골랐다.

모태 솔로.

특성 이름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효과는 확실했다.

솔로잉 시 모든 능력치 두 배.

한마디로 혼자서 적을 상대 시 SS급 각성자의 능력치를 가지게 되는 거다.

당장 전용 던전에서 혼자 크롤러를 상대해야 하는 내게 이보다 더 적합한 특성은 없었다.

‘그럼 시작해볼까.’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푸른색 아공간 포탈로 향했다.

그 어느 때 보다 자신감이 가득한 발걸음으로.

***

힘을 주체할 수 없다는 게 이런 걸까?

쉬워도 너무 쉬웠다.

크롤러의 공격은 단 한 번도 내 몸을 스치지 못했고, 놈은 내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이렇게 쉬워도 되나 싶을 정도로 크롤러를 상대하는 건 쉬웠다. 오히려 균열을 메꾸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정도로.

불과 5분.

한 개의 아공간을 청소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그렇게 청소를 마치고 나온 내 머릿속엔 한가지 생각이 번뜩이며 지나갔다.

과연 수수께끼 알은 몬스터의 부산물에만 반응하는 걸까?

살아있는 몬스터를 포식하지는 못하는 걸까?

[아이템: 수수께끼 알]

[등급: A급]

[설명: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 알. 태고룡 쿠아르탐파를 흡수해 성장 중이다. 사용 시, 스킬: 몬스터 포식(捕食) A (LV 1)을 습득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확인해본 수수께끼 알의 설명은 분명 몬스터 포식이다.

그 어디에도 몬스터의 사체만 먹는다는 문구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수수께끼 알을 아공간에 풀어놔 보기로 했다.

일단 크롤러도….

‘아공간 기생 생명체.’

생명체니까.

그리고 그 시도는 너무나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쫘아아악-.

마치 천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수수께끼 알이 장막처럼 펼쳐지며 아공간 안에 부유하는 모든 것을(나를 포함해서) 감쌀 때는 ‘이거 위험한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지만.

수수께끼 알은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말라는 것처럼, 딱 크롤러만을 골라서 포식해 버렸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나는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거 어쩌면 상상도 못 할 무기를 얻은 것 같은데?’

태고룡 쿠아르탐파.

SSS급 헌터 세 명이 준비에 준비를 거듭하고 나서야 잡을 수 있었던 괴물.

그런 괴물을 흡수한 수수께끼 알이 과연 평범할까?

어쩌면 이게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한 세계의 정점에 있던 몬스터를 흡수한 녀석이 평범하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거다.

‘시스템이 부산물 챙길 시간도 주지 않고 태초의 별에서 쫓아내려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수수께끼 알은 시스템 버그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성능을 보여 주고 있었다.

태고룡 쿠아르탐파.

태초의 별에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의 머리 위에 군림하던 그 녀석처럼.

크롤러를 집어삼킨 녀석은 아공간을 부유하며 묵직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고작 알 주제에 말이다.

“정말 괴물이군요.”

지켜보던 씨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을 정도니까.

“이 녀석을 전용 던전이 아니라 일반 던전에서 풀어 놓으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기록 자체가 무의미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부산물과 마나석은 포기한다는 전제하에.

‘아. 마나석은 남기려나? 인벤토리에 있던 마나석도 안 먹었으니까.’

그렇게 수수께끼 알이 크롤러를 상대하는 모습을 보던 나는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특성]

아공간 청소부 E (LV1)

공간시 E (LV6)

아공간 조작 E (LV2)

가장 먼저 얻었지만 아직 E급에 불과한 세 개의 특성.

내 직업인 해피니스 청소부와 연관이 있는 특성들임에도 사용빈도가 낮아 레벨업이 어려웠다.

하지만 이젠 달랐다.

전용 던전에 있는 아공간들뿐만 아니라 일반 던전에 있는 인벤토리들도 모두 손쉽게 청소할 수 있을 테니까.

그동안 나 자신의 성장을 위해 미루고 미뤘던 숙제를 이제 드디어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스탯도 많이 올랐으니까 저번처럼 아공간 조작 쓰다가 코피 쏟는 일은 안 생기겠지.’

이젠 본업에 충실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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