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드러내다 (5).
서쪽으로 저물어 가는 해를 등 뒤에 두고 모습을 드러낸 한 남자.
묵직한 걸음 소리와 함께 나타난 남자의 손엔 자그마한 상자가 쥐어져 있었다.
“어…. 괜찮으세요? 넘어지신 것 같은데 구급차 불러드릴까요?”
쓸데없이 친절한 남자의 목소리에 안지민은 괜스레 짜증이 났다.
“신경 끄고 갈 길 가세요.”
“아…. 예….”
마치 상처 입은 고양이처럼 사람을 경계하는 듯한 안지민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남자는 인상을 굳히더니 그녀를 지나쳐 계단을 올라갔다.
탁탁탁.
걸음을 옮기는 남자의 발걸음 소리에서는 불쾌감이 묻어나왔다.
그렇게 남자가 안지민을 지나쳐가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띠리리리링-.
그녀의 핸드백 속에서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분명 집으로 들어오라는 부모님의 전화일 테니까.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힘차게 울어대던 전화벨 소리가 멈추자 계단은 다시 적막에 휩싸였다.
‘미안…. 엄마 아빠…. 이런 딸이라서 미안해….’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은 이유.
부모님의 물기 젖은 목소리를 감내할 만한 정신력이 더는 그녀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부모님의 품에 안겨 살고 싶다고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안지민은 그만큼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무너져 내려 있었다.
집에서 나올 때 했던 굳은 결심이 흔들릴 만큼.
그렇게 그녀가 계단의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띠리링-.
핸드백 속 전화기가 다시 힘찬 울음을 터트렸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는 안지민.
그때.
탁탁탁.
위층에서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계단을 울렸다.
그녀가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 남자.
조금 전에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했던 남자였다.
황급히 눈가를 훔친 안지민이 물끄러미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를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죠?! 우는 사람 첨 봐요?”
그러자 여전히 굳은 얼굴로 안지민을 내려다보던 남자의 입이 열렸다.
“안지민 씨?”
띠릭.
남자가 한쪽 귀에 끼고 있던 블루투스 이어폰을 조작하자 시끄럽게 울리던 전화벨 소리가 뚝 하고 멈췄다.
“안지민 씨 맞으시죠? 퀵 서비스입니다.”
“퀵…이요?”
퀵 배달원의 말에 안지민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누가 퀵 서비스를…. 저한테 그런 거 보낼 곳이 없는데요?”
“각성자 센터에서 물건 받아서 온 거예요. 물건 받으시고요. 여기 사인해 주세요.”
“각성자 센터에서 저한테 왜…?”
“그건 저도 모르죠. 일단 이거 받으시고요. 싸인 좀 부탁드릴게요. 저도 바빠서요.”
퀵 배달원은 거의 떠넘기다시피 안지민의 손에 상자를 건네준 뒤 손바닥만 한 태블릿을 내밀었다.
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는 그녀에 대한 불쾌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긴 호의로 손을 내밀었는데 그런 식으로 거절을 당하면 누구라도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아…. 네.”
안지민이 사인을 마치자 빼앗듯이 태블릿을 회수한 퀵 배달원이 거칠게 계단을 내려가다가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곤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안지민을 바라보더니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힘내세요. 일단 살려고 노력하면 무슨 방법이라도 생기지 않겠어요?”
그렇게 말을 마친 퀵 배달원은 다시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잘…알지도 못하면서…….”
안지민은 괜스레 퉁명스럽게 중얼거렸지만, 배달원의 말이 조금은 마음을 위로해 주는 걸 느꼈다.
힘을 내 자리를 털고 일어선 그녀는 다시 계단을 올라 집에 도착했다.
하악. 하악.
고장 난 몸뚱이는 그 몇 개 안 되는 계단에 죽겠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잠시 현관에 앉아 숨을 고른 안지민은 이내 손에 들려있는 작은 상자를 내려다봤다.
확실히 발신인은 각성자 센터였고 수신인은 자신이 맞았다.
문제는 자신이 각성자 센터에서 무언가를 받을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전산 오류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상자를 열자 보이는 건 완충재 속에 들어있는 푸른색으로 빛나는 유리병과 종이 한 장.
의아한 눈으로 유리병을 내려다보던 안지민은 이내 곱게 접혀 있는 종이를 펼쳐보곤 쓴웃음을 지었다.
[마나 중독 치료제 복용법.]
누군가의 고약한 장난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설명서의 내용은 간결했다.
이것저것 말을 갖다 붙이긴 했지만, 결론은 뚜껑을 열고 마시라는 소리였으니까.
싸울아비 길드장 서태촌과 한울 길드장 도연우 그리고 구정철 전 대통령과 강현이라는 각성자가 합심해서 만들어 냈다는 설명도 있었지만, 안지민으로선 오히려 그 말이 더 불신을 심어줄 뿐이었다.
‘그 사람들이 할 일이 없어서 치료제나 만들고 있었겠어?’
세상과 유리되다시피 지내는 안지민도 알고 있었다.
강현이라는 사람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남은 세 사람은 한가하게 치료제나 만들고 있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무려 SSS급 헌터들인데 할 일 없이 이런 거나….’
거기다 이렇게 무료로 나눠주는 거면 돈도 안 되는 일 아닌가.
부스럭.
하지만 그녀의 손은 어느새 포션 병을 둘러싸고 있는 완충재를 벗겨내고 있었다.
푸른색 영롱한 빛으로 반짝이는 치료제.
“정말 치료제면….”
잠시 뒷말을 잇지 못하던 안지민은 핸드백을 뒤져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이게 정말 치료제라면 인터넷에 기사 한 줄이라도 나는 게 정상이었으니까.
토토 토 톡.
포털사이트를 열어 자판을 치는 그녀의 손길이 빨라지고.
‘마나 중독 치료제.’라는 문구를 완성한 그녀가 엔터키를 누르자.
‘서태촌, 구정철, 도연우, 강현. 마나 중독 치료제를 만들다!’
‘치사율 100%의 불치병 마나 중독 드디어 정복되다!!’
‘각성자 센터가 인증한 마나 중독 치료제 생명이 위급한 환자들을 위한 무료배송 시작!!’
‘마나 중독 치료제 제작에 참여한 의외의 인물 강현은 누구인가?’
……
그 뒤로 이어진 수많은 기사.
덜그럭 툭.
순간 안지민의 손에 쥐어져 있던 스마트폰이 떨어져 내려 바닥을 굴렀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살 수…있어?’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과 떨리는 손.
“흐으으으……. 흐으으….”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흐느낌.
그녀는 절망의 끝에서 푸른색으로 반짝이는 희망을 만났다.
그리고 그녀는 그 희망을 손에 꼭 쥔 채 놓지 않았다.
***
그날 저녁.
각성자 센터에서 발표한 뉴스에 대한민국이 뜨겁게 타올랐다.
마나 중독.
지난 80여 년간 그 누구도 치료하지 못한 불치의 병.
치사율 100%.
대한민국 내에서만 매년 1000여 명이 마나 중독으로 죽어 간다.
돈이 많건 적건 상관없이 공평하게.
마법 치료와 힐링 치료를 병행해도 발병 후 생존 기간이 1년을 넘지 못하는 극악의 질병.
드디어 그 불치병이 정복된 것이었다.
그것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 명의 각성자들에 의해서.
그러니 어떻게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일반인들이 서태촌과 구정철 그리고 도연우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을 때 헌터 업계 관계자들의 눈은 다른 이름에 쏠려있었다.
강현.
‘혜성처럼’이라는 구닥다리 수식어가 어울릴 만큼 갑작스럽게 나타난 대한민국 109번째 S급 각성자.
거기에 이번엔 마나 중독 치료제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단다.
SSS급 각성자 세 사람의 이름과 강현의 이름이 같이 언급되는 순간 그들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번 마나 중독 치료제의 메인은 그 셋이 아닌 강현이라는 것을.
서태촌, 구정철, 도연우. 각자 이름값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이 공동제작자라고 발표해야 할 정도로 강현이라는 인물이 중요한 일을 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길드는 물론이고 각성자와 관련된 상품을 생산하는 대기업들마저 강현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성삼이나 GL, 대현 같은 포션을 생산하는 대기업들부터 제약회사들까지.
강현이라는 이름 두 글자가 업계 관계자들의 머릿속에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
각성자 센터 154층 한울 길드장실.
“…이번 치료제 개발로 세계 각국에서 우리나라의 각성자 센터로 러브콜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각성자 센터 측에서는 이번 치료제 개발이 자신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네 사람의 독자적인 개발임을 밝히며…….”
도연우의 가벼운 손짓에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홀로그램 티브이가 꺼졌다.
“와…. 화력 엄청나네. 거의 모든 채널이 우리 이야기밖에 안 하는데요?”
“우리 이야기가 아니라 마나 중독 치료제 이야기겠지.”
호들갑을 떠는 도연우의 말에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서태촌이었지만 그의 입가에도 살포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이번 일로 세 사람은 물론 세 길드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떡상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상승하는 중이었으니까.
항간엔 이제 10대 길드가 아닌 3대 길드라고 불러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 당연히 입꼬리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거참. 좋으면 좋다고 말씀하시지 무뚝뚝하시긴.”
앉아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긴 도연우.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는 강현이 있었다.
“올-. 유명인-. 매스컴에 이름 나왔는데 기분이 어때?”
장난기가 다분한 도연우의 목소리.
하지만 그 내용은 장난스럽게 치부할 일이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이제 강현은 점점 더 주목을 받고 유명해질 테니까.
그들 세 사람과 이름을 나란히 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강현은 도연우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멍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현아 왜 그래? 밖에 뭐 있어?”
서쪽 지평선 너머로 해가 넘어가고 우둑한 어둠이 찾아오는 시간.
창밖에는 하나둘씩 켜지는 가로등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그냥…. 야경이 좋아서요.”
“하긴, 여기서 보는 야경이 또 예술이긴 하지.”
확실히 각성자 센터 154층, 750m의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야경은 돈을 주고 봐야 할 만큼 가치가 있었다.
비록 강현이 바라보고 있는 야경은 도연우가 보는 야경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지만.
어둠이 찾아옴과 동시에 하나둘 켜지는 가로등과 차량의 불빛들.
그사이에 점점이 피어오르는 황금색 빛.
그 빛은 점점 영역을 넓혀가며 주변을 환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마치 황금색 별처럼.
강현은 멍한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네 사람의 이름으로 무료로 푼 마나의 묘약은 고작 2000개.
하지만 눈에 보이는 황금색 별은 그보다도 훨씬 많은 수였다.
-간호사 김소림 님이 환자 이상철 님의 완치에 기뻐합니다. 0.1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이찬원 님이 아들 이상철 님의 완치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낍니다. 0.2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병원에서….
-차우림 님이 친구 진하윤 님의 완치에 기뻐합니다. 0.1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학교에서….
-장석철 님이 아내 박지윤 님의 완치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표출합니다. 0.2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한 황금색 빛의 그 따스한 아우라가 사방으로 번져가며 수많은 별을 만들어 냈다.
해피니스 포인트 알림창이 쉴새 없이 올라가며 2천 개의 마나의 묘약이 만들어 낸 ‘기적’을 여과 없이 보여 줄 때쯤.
띠링.
시스템 알림음과 함께 하나의 메시지가 강현의 눈앞에 떠올랐다.
-기적과도 같은 업적!
-2022년 9월 7일.
-시스템을 사용해 2천 명의 목숨의 살린 사용자 강현 님의 행동에 찬사를 바칩니다.
-사용자 강현 님이 세운 업적은 업적 창에 기록되며,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강현 님이 세우신 업적에 대한 보상으로 200,000의 선업(善業) 포인트와 특성 카탈로그 1매가 지급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업적 창을 통해 확인해 주세요.
시스템이 그의 선행에 대한 보상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