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드러내다 (4).
저벅저벅.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수수께끼 알에 다가가는 서태촌의 몸에서는 어떤 기세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도연우가 뿜어냈던 날카로운 송곳과도 같은 기세도.
구정철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던 세상을 무너뜨릴 것 같은 패도 적인 기세도 없이.
저벅저벅.
톡.
그저 걸음을 옮겨 날카로운 환두대도의 날을 수수께끼 알 껍질 위에 살포시 올려놓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강현의 머릿속에 번갯불이 번뜩였다.
도연우와 구정철의 날카롭고 패도 적인 공격을 모조리 흡수했음에도 장난스러운 발길질에 데굴데굴 굴러가 버리던 수수께끼 알.
‘답은 살기였던 건가?’
강현은 왠지 지금 서태촌의 모습을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태촌의 주변엔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분명 도연우와 구정철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수련실 내부를 울리고 있음에도 서태촌의 주위는 고요했다.
적어도 강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서 영감님에게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
날카로운 칼날 같던 기세가 사라지고 그 존재감마저 희미해졌다.
마치 그 자리에서 서태촌이라는 존재가 지워진 것처럼.
그렇다고 무턱대고 서태촌에게 다가설 수도 없기에 그저 그 자리에 선 채로 서태촌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할 뿐이었다.
서태촌의 변화를 느낀 것은 강현뿐만이 아니었다.
“어…? 이게?”
“쉬…….”
“영감님?”
“아무래도 서가 놈이 뭔가를 깨달은 모양이군.”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고요하게 내려앉은 저 막을 깨부수기엔 충분했고.
그렇게 서태촌의 주변에 머물던 고요하고 차분한 공기가 깨어지려는 찰나.
서걱.
그저 가볍게 손목을 내리긋는 듯한 움직임이 만들어 낸 절삭음이 강현의 귓가에 울렸다.
‘베었어?!’
강현은 서태촌이 수수께끼 알을 베었다고 생각했다.
“허허…. 실패했군.”
서태촌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 전까지는.
“실패라고요?”
분명히 절삭음이 울렸음에도 실패라 말하는 서태촌.
그는 허리를 굽혀 수수께끼 알을 주워 들더니 강현에게 던져 줬다.
“하지만 소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
강현은 손에 쥔 수수께끼 알을 내려다봤다.
눈으로 봐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미약한 실금.
하지만 손끝으로 느껴지는 그것은 명백한 흉터였다.
길이 1㎝ 정도에 불과한 작은 균열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난 체면치레는 한 것 같구나.”
빙긋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놀리듯이 말한 서태촌은 이내 수련실을 벗어났고.
“아니?! 어떻게??”
“서가야! 한 번 더 해! 이번엔 확실하게 내가 박살 낼 수 있으니까 한 번 더 하자고!”
그의 등 뒤로 절규에 가까운 두 사람의 외침이 울려 퍼졌지만, 서태촌은 무시하고 걸음을 움직였다.
이미 이긴 게임을 다시 할 이유가 그에게는 없었으니까.
***
다시 돌아온 154층.
수수께끼 알에서 부산물을 회수할 수 없고, 알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얻기도 쉽지 않다는 걸 확인한 이상 남은 것은 마나석과 상점 포인트의 정산뿐이었다.
미리 준비해 온 이사 박스를 인벤토리에서 꺼내 바닥에 펼친 나는 그곳에 마나석을 쏟아 냈다.
굳이 개수는 세지 않았다.
어차피 저 안에 내 것은 없었으니까.
이사 박스 열 개를 마나석으로 가득 채운 후 상점창에서 아직 팔리지 않은 부산물들을 취소해 한쪽 옆으로 차곡차곡 쌓았다.
무려 삼천 개가 넘는 부산물들.
A급 이하의 부산물들이었지만, 세 사람은 충분히 만족한 듯싶었다.
이것들은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몬스터의 부산물이라는 희소성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정리를 마친 나는 세 사람을 보며 물었다.
“포인트는 어떻게 정산해 드릴까요? 대략 2천만 포인트 정도 남았는데.”
태고룡 쿠아르탐파를 사냥하며 모두 소진했음에도 상점창에 올려놓았던 몬스터 부산물과 아이템이 워낙 많다 보니 그것들이 팔리며 금세 늘어났다.
물론 내 지분이 없다고 말할 순 없다.
사혼 감옥에서 태초의 별로 넘어가기 전에 지니고 있던 포인트만 150만 포인트가 넘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것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나도 염치가 있지.
수수께끼 알이 인벤토리 안에 있던,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는 부산물들을 모조리 먹어치운 마당에 내 지분을 주장할 수는 없었다.
당분간 포인트 거지가 되겠지만 굳이 욕심을 내 세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싶지도 않았고.
“이천 만 포인트라…. 그 정도면 마나의 묘약이라는 포션을 몇 개나 구매할 수 있나?”
마나의 묘약 등급은 D급.
D급 아이템의 거래가는 개당 101~1000포인트. 마나의 묘약은 최고가인 1000포인트에 거래되고 있었다.
“대략 2만 개 정도 구매할 수 있겠네요.”
내 대답에 세 사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나의 묘약 2만 개.
F급에 불과하지만, 한순간에 2만 명의 각성자를 양성할 수 있는 양이다.
나는 고민에 빠진 세 사람 앞에 6개의 포션을 꺼내 놓았다.
기적 형님도 복용하고 해찬이도 복용한 D급 묘약 세트였다.
“이게 뭔가?”
서 영감님의 물음에 나는 각 묘약의 효과에 대해 설명했다.
“호오-. 그러니까 이거 네 세트를 복용하면 D급 각성자 한 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거군?”
“네. 최대치로 잡았을 때 24병을 복용해야 하는 거고, 이미 각성한 자나 수련을 통해 자기 계발을 마친 사람이라면 더 적은 양으로 D급 승급이 가능할 겁니다.”
내 말에 구 영감님이 붉은색 힘의 묘약을 집어 들며 말했다.
“하긴 자네의 해피니스 시스템에 비하면 우리 승급 시스템은 조악하기 그지없지.”
연우 형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 말을 받았다.
“스탯 네 개중 두 개만 D급 판정을 받아도 승급할 수 있으니까요. 능력도 안 되는 어중이떠중이도 승급할 수 있죠.”
60년 전 미국 헌터 협회에서 처음 만들어져 이제는 전 세계의 기본이 되어 버린 각성자 승급 시스템.
어찌 보면 구멍이 숭숭 뚫린 허점투성이 시스템이었다.
분명히 허점이 명백한 각성자 테스트 시스템이지만 인류는 아직 그 시스템을 대체할 방법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어쩌면 이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기에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말이 맞겠지.’
힘. 민첩. 체력. 마나.
네 가지 스탯 중 두 가지만 기준을 넘어가면 상위등급으로 승급할 수 있으니까.
극단적인 예를 들면 힘과 민첩이 A급인 각성자는 체력과 마나가 F급이 나오더라도 A급으로 승급이 되는 거다.
현 각성자 센터의 승급 시스템은 네 가지 스탯이 전부니까.
하지만 내가 건넨 묘약은 두 가지가 더해진다.
내구와 지혜.
각성자 센터에서는 측정조차 하지 못하는 두 개의 스탯이지만 분명한 건 각성자에게 효과가 있을 거라는 것이다.
내가 파악해 본 바로는, 내구 스탯은 뼈와 근육 그리고 피부를 질기고 단단하게 만들어 주며 지혜 스탯은 소모된 마나의 회복을 빠르게 하고 스킬의 위력을 강화해 준다.
모두 태초의 별에서 몬스터들과 뒹굴며 개고생을 한 끝에 깨달은 것들이다.
물론 현 각성자 승급 시스템에선 측정하지도 못하는 스탯이기에 승급을 위해서라면 먹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결국 던전에 들어가면 칼빵을 한 번 더 버티고 스킬 한 번을 더 쓸 수 있다는 게 생과 사를 가른다는 것을 여기 있는 세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세 사람은 각자 한 손에 포션 병을 든 채로 생각에 잠겼다.
마나의 묘약만을 구매한다면 2만 명의 각성자를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고작 F급이다.
그렇기에 고민을 하는 거다.
그저 각성만 한 2만 명이냐 완전히 D급까지 성장시킨 800여 명의 각성자냐 하는 선택의 기로니까.
두 가지 다 던전 경험이 전혀 없는 일반인을 각성시킨다는 전제였으니 만약 이미 각성한 E~F급 각성자를 대상으로 한다면 묘약의 소모량은 줄고 인원은 더 늘릴 수 있을 터였다.
“일단. 분배비율부터 정하도록 하죠.”
길고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연 연우 형의 말에 두 영감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산물과 마나석들은 우리가 갖는 거로 하고 포인트는 계산하기 좋게 600만씩 나눴으면 하는데 어때요? 현이도 고생한 게 있으니까 200만 정도는 챙겨야 하지 않을까요?”
연우 형의 말에 깜짝 놀랐다.
솔직하게 빈손으로 돌아갈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200만 포인트나 준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흠…. 그게 적당할 것 같군.”
“나도 찬성일세.”
더욱 놀라운 점은 두 영감님도 별다른 고민 없이 흔쾌히 동의했다는 점이었다.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한 배려를 받아서였을까?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목소리는 내가 느끼기에도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너무 고마워할 필요 없어.”
“네?”
“네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거라고. 일종의 뇌물인 셈이니까. 그리고 네가 없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다.”
연우 형은 손에 들고 있던 묘약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상점창이 없었으면 부산물이고 뭐고 없었을 거야. 물론 우리가 해치운 것들에서 나온 부산물이긴 하겠지. 하지만 네가 없었으면, 그 자리에 버려져서 그걸로 끝이었을 거야. 막말로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그 사혼 감옥이라는 결계에 갇혀 죽어갔을걸?”
연우 형의 말이 끝났을 때 두 영감님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도 정 고마우면 상점창 표 아이템 하나 정도만 구매해서 주면…안 되려나요 영감님들?”
역시 연우 형이 덧붙인 말에 두 영감님은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하나가 아니라 두….”
“아직도 철이 덜 들었구만. 쯧쯧”
“…크흠. 두 개라고 말했으면 우리 손에 두 쪽이 났을 거야.”
앞선 구 영감님의 말이 서 영감님의 말소리에 묻혀 안 들렸지만, 세 사람의 반응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정말 진심인 듯한 세 사람의 태도에, 서서히 감동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솔직히 수수께끼 알이 처먹은 부산물들을 빼더라도 우리 네 사람 중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은 나였으니까.
레벨업과 스팩업은 물론이고 상점창까지 A급으로 승급했다.
거기에 무려 SSS급 각성자인 세 사람의 가르침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다.
그런데도 세 사람은 나를 배려해 주는 것이었다.
이러니 어찌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뜨끈하게 달아오른 눈으로 세 사람을 보며 말했다.
“사용될 포인트에 제한은 있겠지만, 그럼 각자 아이템 두 개씩 구매할 수 있도록 해 드릴 테니까. 이참에 좋은 일 한번 하시죠.”
“응?”
갑작스러운 내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세 사람.
나는 그들을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좋은 일은 함께하면 더 좋은 거니까.’
***
하아. 하아.
계단 몇 개 오르지도 않았는데 벌써 숨이 차다.
털썩.
결국, 계단 중간쯤에서 주저앉아 버린 안지민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X발. 인생 정말 X 같네….”
6개월 전만 해도 입에 담지도 않았을 욕설이 이제는 너무 익숙하게 흘러나왔다.
그녀 나이 스물여섯.
이름만 대도 알아주는 서울주제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그 흔한 취준생 시절도 없이 당당하게 국내 탑 티어 중 하나로 꼽히는 대기업에 입사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인생이 탄탄대로일 줄 알았다.
6개월 전.
평소와는 다른 극심한 피로감에 그냥 건강검진이나 한번 받아보자고 생각하고 방문한 병원에서 청천벽력같은 말을 들었다.
마나 중독.
의사는 그녀에게 그 생존율 0%의 불치병에 걸렸다고 통보했다.
현재까지 치료법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그날.
그녀의 세상은 무너졌다.
하루하루 피폐해져 가는 일상생활.
당연한 이야기지만 힘들게 들어간 회사는 더 다닐 수 없어 그만둬야 했고, 그녀가 마나 중독에 걸렸다는 사실을 안 부모님은 눈물로 밤을 새우셨다.
그녀 앞에서는 치료방법이 있을 거라며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던 아버지가 늦은 밤 홀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본 그날, 안지민은 집을 나오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부모님께 고통에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기도 했고, 없는 형편에 마법 치료니 힐링 치료니 하는 터무니 없이 비싸기만 한 치료법에 기댈 수도 없었으니까.
물론 부모님의 생각은 달랐지만, 그녀의 판단엔 이게 맞는 것이었다.
고작 몇 개월 생명 연장을 하겠다고 집안을 빚더미에 올려놓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녀는 부모님이 잠든 밤, 조용히 짐을 싸서 나왔다.
혼자서 조용히 죽기 위해서.
어쩌면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정신상태가 아니었기에 실수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매일 밤 삶에 대한 미련에, 그리고 부모님이 보고 싶은 마음에 눈물로 잠자리에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요 며칠, 그녀는 매 순간 죽음이 자신을 찾아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검게 죽은 눈두덩이와 푸석한 피부, 허옇게 일어난 입술과 손만 가져다 대도 툭툭 끊어져 내리는 머리카락.
생기 넘치고 아름다웠던 26살의 안지민은 이제 없었다.
계단 층의 창문으로 내리쬐는 햇살.
유난히도 따사롭고 눈부신 그 빛이 벽에 기댄 채로 주저앉은 그녀를 내리쬐는 순간, 안지민은 생각했다.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
이 지긋지긋한 고통도 이제는 끝냈으면 좋겠다고.
이 햇빛 아래에서라면 그래도 좋을 것 같다고.
그렇게 그녀가 힘들게 붙잡고 있던 삶의 마지막 줄을 놓으려는 순간.
저벅.
묵직한 걸음 소리와 함께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그녀에게 내리쬐는 햇살을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