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드러내다 (2).
길드 설립 신청서.
태블릿을 본 해찬이가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형. 길드 설립하시게요?”
해찬의 물음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 설립 조건은 생각보다 빡빡하지 않다.
길드 사무실과 자본금 10억. 그리고 한 파티 최소 조건인 5명의 길드원만 있으면 길드 설립이 가능하다.
물론 제약도 분명히 존재했다.
길드장은 A급 이상의 각성자여야 하고 기본적으로 지역방어의 의무를 지며, 정부의 동원령을 거부할 수 없다.
한마디로 특정 지역의 던전을 의무적으로 클리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배당받은 던전의 대부분은 돈은 돈대로 들고 그 보상이 좋지 않은 던전들이었다.
미믹이 나오는 남한산 F급 던전 같은 던전들 말이다.
그리고 사냥 후 나오는 부산물과 마나석은 각성자 센터를 통해서만 판매할 수 있다는 단점도 있었다.
하지만 길드를 설립했을 시 따라오는 이점도 분명히 있었다.
일단은 수수료 및 세금이 낮아진다.
기존의 파티 체제로 사냥하면 수령금의 50%를 세금과 수수료 명목으로 떼 가는데 길드 사냥 시엔 그 세금과 수수료가 25%로 줄어드는 것이다.
거기에 길드를 설립하면 각성자 센터 이용이 일반 파티원들보다 자유로워진다.
이런 장단점이 명확하기에 A급 각성자가 되었음에도 길드에 가입하지 않고 사냥을 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주로 기업들과 뒷거래를 하는 파티들이나 파티원 중 메이커가 속해 있는 파티들이었다.
기업과 뒷거래를 하는 이들 중 일부는 길·산 분리 법의 허점을 파고든 일종의 하청 파티인 셈이었고. 메이커와 함께하는 파티의 경우는 부산물로 아이템을 만들어 파는 것이 훨씬 이득이기 때문에 파티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해찬이가 놀란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형. 근데 우리 파티엔 A급 각성자가 없잖아요.”
해찬의 말처럼 우리 파티에는 공식적으로 A급 각성자가 없으니까.
태블릿에 나와 있는 길드원 이름을 확인한 해찬이의 목소리엔 어쩐지 지금 상황이 달갑지 않은 듯한 기색이 보였다.
그리고 난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네가 싫다면 그 명단에서 네 이름을 뺄 수도 있어. 그런데 해찬아. 지금 네가 사람들을 모아 파티를 키운다고 네 친척 형들을 이길 수 있을까?”
내 물음에 해찬이는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굴을 굳혔다.
“알고…계셨어요?”
“네가 화연 길드 후계자 중 하나라는 거? 얼마 전에 알게 됐어.”
“대체 어떻게…? 잘 감춘다고 감췄는데요.”
화연 길드.
10대 길드 중 하나로 경기도를 장악하고 있는 길드.
그런 화연 길드의 후계자 중 하나가 해찬이라는 사실은 이계에 있을 때 연우 형과 대화를 하던 도중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현재 후계자 자리를 두고 직계와 방계를 불문하고 경쟁을 하고 있다는 실정과 해찬이가 그 방계 중 가장 늦게 경쟁에 참여했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건 녀석이 길드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 하는 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 네가 어떤 선택을 할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내가 보기엔 지금 네 능력으로 후계자 경쟁에서 승리하긴 힘들어 보이는데, 아니야?”
그렇기에 뼈가 있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택…이라고요?”
해찬과 경쟁하고 있는 경쟁자들은 이미 B급과 C급을 달성한 각성자들이고 해찬이보다 적어도 몇 년은 앞서가고 있었다.
거기다 후계자 경쟁의 승리조건이 단순하게 A급 각성자가 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후계자 경쟁의 승리조건은 길드를 설립하고 운영해 S급 헌터까지 올라가는 것.
시작이 늦은 해찬이는 이미 경쟁에서 한참을 뒤처진 상황이었다.
S급 각성자까지 성장해야 하는 만큼 단기간에 끝날 후계자 경쟁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출발이 늦은 해찬이가 다른 경쟁자들을 추월해 승리할 수 있을 만큼 녹록한 상황도 아니었다.
이제 와서 분발한다고 해도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그 격차는 크게 벌어져 있었고.
거기에 A급에서 S급으로 올라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깨달음의 벽은 노력만으로 넘을 수 있는 게 아니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끼어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이건 내가 해찬이에게 주는 기회였다.
시스템을 사용하는 나와 함께한다면 녀석의 성장은 기존 각성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를 테고 지금 B급, C급에 올라서 있는 경쟁자들을 빠르게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의 벽을 넘는 건 개인의 역량이니 S급에 올라서는 일은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일단 그 뒤에 있는 계약서들까지 읽고 판단하도록 해.”
내 말에 해찬이는 심각한 얼굴로 태블릿을 넘기며 계약서들을 확인했다.
이윽고 모든 페이지를 확인한 녀석이 말문을 열었다.
“계약 기간이 3년이네요?”
3년 계약은 일반적인 길드 전속 계약보다 2년이나 짧은 기간이었다.
보통 길드 전속 계약은 기본 5년이니까.
“3년이면 네가 성장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니까.”
다른 이들과 비교를 불허하는 내 던전 클리어 속도를 떠올린 것인지 고개를 끄덕거리던 해찬이는 태블릿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물었다.
“계약서에 표시된 ‘성장 지원’이라는 건 뭘 말하는 거예요?”
그 물음에 나는 인벤토리에서 포션 한 병을 꺼내 해찬의 앞으로 밀었다.
푸른색으로 반짝이는 포션.
마나의 묘약.
이게 나와 의리를 지켜준 해찬과 파티원들을 위해 내가 준비한 선물이었다.
일종의 미끼이기도 했고.
“마셔. 이게 성장 지원이니까.”
“이게…. 뭔데요?”
겉으로 보기에 마나 포션과 다를 바가 없는 마나의 묘약. 그 때문인지 내 얼굴과 포션 병을 번갈아 보는 해찬의 눈빛이 요상했다.
마치 ‘이 형이 어디서 장난질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달까?
“마셔보면 알게 돼. 근데 그거 마시면 내 길드에 가입하는 거다.”
“흐음….”
내 말이 끝나자 녀석은 의자에 앉은 자세로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딱 보기에도 뭔가 불손한 자세.
“형. 제가 막 편견이 있는 사람은 아닌데.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취향이 아니에요.”
이건 또 뭔 개소리지?
“취향? 무슨 취향?”
“방금 말씀하신 거, 그거 영화 대사 따라 한 거 아니에요?”
그제야 내 머릿속으로 어떤 로맨스 영화의 장면이 오버랩됐다.
남주가 여주를 꼬실 때, 소주를 가득 따라주며 내뱉었던 대사.
‘그거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
그 장면이 떠오르자 가슴 어딘가에서 불쾌한 무언가가 울컥 올라왔다.
모쏠 인생 30년이지만 내 성 정체성은 확고하다.
“마시기 싫으면 말아 새끼야. 좋은 걸 줘도 지랄이야.”
그렇게 테이블 위에 놓인 마나의 묘약을 회수하기 위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휙.
팔짱을 끼고 있던 해찬이 녀석이 재빨리 손을 움직여 테이블 위의 묘약을 낚아채 갔다.
“아니. 누가 싫대요? 그냥 좀 튕겨본 거지. 솔직히 저 정도 되면 삼고초려는 아니더라도 한 번 정도 튕겨 볼 수는 있잖아요.”
녀석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보다 느리다뿐이지 해찬의 성장 속도는 일반 각성자들보다 빨랐으니까.
물론 그것도 내 덕이긴 했지만.
꿀꺽.
“자 이제 말해 주세요. 무슨 포션이길래….”
묘약을 마시고 입을 털던 해찬이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역시.’
마나를 다루는 데 예민한 마법사답게 해찬의 반응은 빨랐다.
“형. 이게. 어떻게…? 마나가….”
와르르.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녀석 앞에 나는 나머지 포션들도 무더기로 올려두었다.
‘미끼를 물었으면 확실히 낚아 올려야지.’
마나의 묘약이 미끼라면 남은 묘약들은 낚싯바늘이다.
“일단 나머지도 하나씩 마시면서 네 한계치까지 스탯 업을 해. 많이 마신다고 마냥 스탯 등급이 올라가는 건 아니니까 잘 판단하고.”
이해찬이라는 물고기를 낚을 낚싯바늘.
“남은 건 다른 파티원들 계약서에 사인하면 넘겨주도록 하고. 무슨 의미인지 알지?”
“아…. 네…….”
“그리고 채민하에게는 마나의 묘약 하나 더 챙겨주도록 해. 그거 마나 중독 치료제로도 쓸 수 있는 거니까. 동생을 치료할 수 있을 거야.”
내 말에 해찬의 눈이 다시 한번 휘둥그레졌다.
녀석도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각성자와 던전이 나타나고 80여 년.
지금껏 불치의 병이라 여겨왔던 마나 중독의 치료제가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한다. 부 길드장.”
해찬에게 태블릿과 낚싯바늘로 쓸 묘약을 잔뜩 넘겨주고 카페를 나선 내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각성자 센터였다.
내 생각에 남은 파티원들 설득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성장을 거부하는 각성자는 없으니까.
***
여느 때처럼 수많은 인파로 바글거리는 각성자 센터.
그들 중 누군가는 기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좌절한다.
각성자 센터 15층.
승급 검사실.
저번 달부터 승급 검사실로 보직변경을 받아 근무하게 된 김미소는 그녀의 이름처럼 밝은 미소로 고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딩동-.
“37번 고객님. 승급절차 진행해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번호표를 들고 걸어오는 남자.
김미소는 왠지 그 남자의 얼굴이 눈에 익은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친절한 목소리로 안내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이곳에 헌터 와치를 올려 주시겠습니까?”
김미소의 안내에 남자가 테이블 위로 손을 올리자 그녀의 모니터에 사진과 함께 남자의 정보가 간략하게 떠올랐다.
[이름: 강현]
[등급: E]
[나이: 30]
그리고 그 이름을 본 순간 김미소는 남자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그 청소부?’
자신의 직업을 확인하고 호구에서 진상으로 흑화해 보안요원들에게 제압돼 끌려나갔던 그 남자.
‘벌써 E급이라고?’
혹시나 해서 사진을 확인해 봤지만, 그 남자가 맞았다. 워낙 임팩트 있던 일이라 한동안 회식 자리에서 안줏거리가 되었을 정도니까.
그런 남자가 불과 5개월도 지나지 않았는데 E급 각성자가 되어 다시 나타난 거다.
그것도 승급검사를 받기 위해서.
한동안 말이 없는 김미소를 이상하게 여긴 강현이 물었다.
“혹시 무슨 이상이 있나요?”
강현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 김미소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안내를 시작했다.
“아. 아닙니다. 고객님 검사실로 들어가시면 바로 승급검사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후 진행된 검사.
힘.
민첩.
체력.
네 가지 검사가 차례대로 진행되고 그 결과가 모니터에 출력될수록 김미소의 얼굴엔 미소가 아닌 경악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검사인 마나 검사결과가 출력되자 그녀는 굳은 얼굴로 전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연락을 취했다.
“네. 승급검사실장 허영준입니다.”
“실장님. D 승급 검사실 김미소입니다. 다름 아니라 방금 검사를 마치신 고객님이 정밀 승급검사가 필요할 것 같아서 연락 드렸습니다.”
“음? 그게 무슨 말입니까. 김미소 씨? 정밀 승급검사는 A급 이상에서만 진행되는 거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고작 D 승급 검사실에서 정밀 승급검사가 필요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상황을 모르는 검사실장의 짜증 어린 목소리에 김미소는 다시 조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방금 검사를 마치신 고객님의 검사결과가 모두 S급으로 나왔습니다. 기계와 측정 마법의 오작동이 아니라면 정밀 승급검사를 진행해야 할 상황이라고 판단되어 연락 드렸습니다.”
“…….”
김미소의 말에 한동안 말이 없던 검사실장은 잠시 후 진중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말. 사실입니까?”
“지금 바로 검사결과를 인트라 넷으로 공유하겠습니다.”
“…확인 후 다시 연락하도록 하죠.”
실장과 통화를 마친 김미소는 강화유리 너머 검사실 내부를 쳐다봤다.
마나량 측정 중 발생한 푸른색 마나 잔흔이 여전히 일렁이고 있는 내부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남자.
‘청소부라며….’
5개월 전쯤 자신의 직업을 확인하고 절규했던 그 남자를.
그날 오후.
세 명의 SSS급 헌터가 생환했다는 뉴스로 떠들썩한 포털뉴스 한구석에, 새로운 기사가 떠올랐다.
‘대한민국 109번째 S급 헌터 등장.’
‘새로운 신성의 등장! 강현! 각성한 지 5개월 만에 S급!’
비록 구정철, 서태촌, 도연우라는 유명인들이 쉴 새 없이 던지는 떡밥에 순식간에 묻혀버리긴 했지만, 강현이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뉴스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