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106화 (106/202)

106. 집으로 (4).

“자네. 내 진전을 이을 생각 없나?”

서태촌의 말이 끝나는 순간 도연우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구정철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어허! 서가야 남의 제자에게 뭐 하는 짓이야! 넘볼 걸 넘봐야지!”

“강현 군이 왜 네놈 제자야?”

“붕천격을 따라 했잖아! 붕천격을!! 그게 나한테 배우고 싶다는 뜻이 아니면 뭐야!!”

구정철의 말에 도연우와 서태촌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마치 이 말이 사실이냐는 듯 추궁하는 그 눈빛에 강현의 이마엔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이거 말 한마디 잘못하면 큰일 나겠는데?’

사실 강현이 붕천격을 흉내 낸 이유는 다른 게 없었다.

그저 맨손이었으니까.

검을 들고 있었다면 서태촌의 단천세를 흉내 냈을 것이고, 창을 들었었다면 도연우의 만영창(萬影槍)을 흉내 냈을 거다.

그러니 이건 어찌 보면 구정철의 억지나 다름이 없었다.

붕천격의 마나 회로를 모르는 강현이 그저 주먹에 마나를 모아 내지른 것을 붕천격의 형(形)을 따라 한 것이라고 우기고 있었으니까.

“자네가 말해 보게. 정녕 저 구가 놈의 제자가 되고 싶은 건가? 그래서 붕천격을 흉내 낸 거야?”

“후….”

서태촌의 물음에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강현이 갑자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철퍽.

T렉스가 흘린 피로 질퍽하게 젖은 땅 위로 강현의 무릎이 닿고. 갑작스러운 강현의 행동에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순간 강현의 낭랑한 외침이 세 사람의 귓가를 울렸다.

“스승님들께 인사 올립니다. 세 분께 가르침을 받는 그 순간부터 저는 단 한순간도 세분의 제자가 아니라 생각한 적 없으니 스승님들께서 가르침을 주신다면 당연히 배우고 익힐 것입니다.

굳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넙죽 절을 하는 강현의 뒤통수를 보자 구정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도 그럴 것이 강현이 붕천격을 흉내 낸 것을 핑계로 은근슬쩍 자신의 제자로 들일 계획이었는데 그게 어그러졌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서태촌과 도연우의 입꼬리는 꿈틀대며 미소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들로선 강현이 구정철의 제자가 되는 것보단 세 사람의 공동 제자가 되는 게 여러모로 좋았으니까.

그들에게 강현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상점창을 통해 구매하는 다른 세상의 물건들이 가지는 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시스템을 통해 강해지는 강현의 성장세를 보자면 강현은 머지않은 미래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각성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불과 4개월 만에 S급이 되었어. 1, 2년 후엔 나를 뛰어넘을지도 모르지.’

세 사람의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런 각성자와 사제의 연으로 묶인다는 건 개인적으로도, 각자의 길드를 생각해서도 이익이었으니까.

세 사람이 이런 판단을 내릴 정도로 강현의 성장세는 무서웠다.

“자네 사극을 너무 봤군.”

“네?”

서태촌의 말에 절을 했던 강현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지켜보던 도연우가 입을 열었다.

“요즘 누가 그렇게 고리타분하게 절을 해? 그냥 잘 부탁드립니다. 하면 되는 거지. 가끔 보면 너도 참 꼰대 기질이 있어. 나중에 네 제자 받을 때도 절 안 하면 안 받아 줄 거냐? 킥킥.”

도연우는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강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스승이니 사부니 그런 말 두드러기 나니까, 지금처럼 형이라고 불러. 나이 차이도 다섯 살밖에 안 나는데 스승은 무슨….”

그렇게 말을 마친 도연우가 자리를 떠났다.

마나석 채취는 샤이닝 에로우가 하지만 부산물 채취와 사체처리는 직접 해야 했으니까.

곧 T렉스에 다가선 도연우는 인벤토리에서 단검 한 자루를 꺼내 부산물을 채취하기 시작했다.

능숙하게 T렉스의 이빨과 발톱을 채취하는 그 손놀림은 강현을 닮아 있었다.

“에이-. 다 넘어온 거였는데. 쩝.”

구정철은 마치 다 잡은 고기를 놓친 강태공처럼 아쉬움을 토해 내며 한 손에 단검을 쥐곤 자리를 떴다.

“…에?”

“일어서게. 우리는 그저 확실히 하고 싶었던 게야. 구가 놈이 조금 욕심을 내긴 했지만, 우린 암묵적으로 자네를 공동전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네.”

서태촌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는 강현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자네 정도 재능을 가진 제자라면 구가 놈이 욕심을 내는 것도 이해가 가지.”

“재능…이라고요?”

태어나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에 강현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시스템 사용자로 선정된 것뿐인데….’

자신이 강해진 것이 온전히 자기 능력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강현은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자네 설마 자네에게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시스템이 없었다면 이렇게 성장하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강현의 말에 서태촌은 흡족해하면서도 어딘가 안타까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틀렸네.”

“네? 어떤 게 틀렸다는 말씀인지….”

“자네에게 재능이 없었다면 우리가 자네를 탐낼 리가 있나…. 이제 와서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처음 자네를 가르칠 때만 해도 시간을 보내기 위한 소일거리 정도로 생각했었네.”

“아…. 네.”

“하지만 처음 자네를 가르치고 난 다음 날 전날 배웠던 걸 실전에서 사용하는 자넬 보며 생각을 달리했지.”

“……?”

“이놈 물건이구나. 가르칠 맛이 나는 놈이구나.”

서태촌은 가볍게 손을 움직여 강현의 바짓단에 묻은 피와 진흙을 털어냈다.

“강현군. 아니…. 현아.”

마치 친손자를 부르듯이 다정한 서태촌의 목소리에 놀란 강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제부턴 이렇게 함부로 무릎을 꿇어선 안 된다. 네가 무릎을 꿇으면 우리 세 사람이 무릎을 꿇는 것과 다름없으니.”

단단하고 무거운 눈.

서태촌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눈으로 강현의 눈을 직시했다.

“네가 가진 그 시스템을 반칙이라고 생각하지 말거라. 그것 또한 각성 능력 중 하나나 마찬가지니까. 다른 누군가가 강력한 능력을 각성한다고 해서 반칙이라고는 하지 않는데, 네 시스템 사용 능력에만 그런 꼬리표를 다는 건 그릇된 일이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결과에 맞춰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는 게 각성자의 삶이야. 어떤 능력을 가졌든지 말이지.”

‘각성자의 삶….’

강현은 머릿속으로 서태촌의 말을 되뇌었다.

“그래. 난 너에게 주어진 그 시스템 또한 마찬가지라고 본다. 너에게 주어진…다른 이들과는 조금 다른 재능이라고.”

서태촌의 말을 들은 강현은 생각이 깊어졌다.

‘재능……. 정말 시스템을 내 재능의 일부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강현은 서태촌과 대화 중이었다는 것도 잊은 듯 깊은 생각에 잠겼다.

쿵쿵.

가슴에서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강현은 그 심장의 울림을 따라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을 관조했다.

‘그래 그렇게 성장하면 되는 거다.’

흡족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태촌은 생각에 잠긴 강현을 놓아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성장해 있을 제자의 모습을 기대하며.

피와 살점이 널브러진 전장 한가운데.

스승들의 배려 속에서 강현은 씨드의 호위를 받으며 자신을 감싸고 있던 껍질을 또 한 겹 깨부수기 시작했다.

***

전장 정리를 마치고 다시 모인 천막 안.

“…일단 일주일 동안은 놈의 습성을 파악하는 걸로 하고…놈을 추적하는 데는 스파이캠을….”

지난 3주간 세운 작전 브리핑을 마친 연우 형이 나를 보며 물었다.

“현아. 지금 구매 가능한 스파이캠과 다차원 송수신기 개수가 얼마나 돼?”

상점창을 열고 대기 중이던 나는 곧바로 연우 형의 물음에 답했다.

“스파이캠은 319개. 다차원 송수신기는 47개 구매 가능해요. 바로 구매할까요?”

“응.”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구매 버튼을 클릭했다.

구매가 완료되었다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고 인벤토리를 확인한 나는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스파이캠 319개, 다차원 송수신기 47개.

원래라면 한 번에 인벤토리에 들어올 수 없는 양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정확하게 말하면 상점 등급이 B급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내 인벤토리의 크기는 200칸을 조금 넘는 정도였고 한계 중량 또한 그와 비슷했으니까.

하지만 B급에 오르자마자 아공간 아이템들을 구매해 흡수한 지금, 내 인벤토리의 크기는 무려 열 배가 넘게 커져 있었다.

2512칸에 한계 중량 2512㎏.

350개가 넘는 아이템을 한 번에 구매했음에도 여전히 인벤토리는 여유가 있었다.

여느 소설 속 아공간들처럼 한계가 없는 크기를 상상해 보면 아직은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구매 완료했어요. 바로 날릴까요?”

“응. 그런데 그 많은 스파이캠을 통제할 수 있겠어?”

연우 형의 물음에 씨익 웃은 나는 모든 스파이캠을 인벤토리 밖으로 꺼냈다.

우우-웅.

밖으로 나오자 낮은 공명음과 함께 작동을 시작하는 스파이캠.

“씨드. 부탁해.”

“네. 사령관님. 스파이캠 319기 원격제어 시작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리저리 천막 안을 부유하던 스파이캠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오와 열을 맞췄다.

“오오-.”

“호오-. 그럴싸하군.”

연우 형과 구 영감님의 탄성을 뒤로하고 씨드의 목소리가 천막 안을 울렸다.

“코드명 쿠아르탐파 추적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우웅-.

씨드의 보고가 끝나고 319기의 스파이캠이 오와 열을 맞춰서 천막을 빠져나갔다.

“씨드, 다차원 송수신기 설치도 부탁할게.”

“네. 사령관님.”

지난 3주간 틈틈이 설치해 놓은 다차원 송수신기는 약 200여 개.

다차원 송수신기 한 대가 커버 가능한 영역은 지름 10㎞.

몬스터에 의해 파괴되거나 유실된 것들이 더러 발생하긴 했지만 이렇게 틈틈이 보충하며 거의 지름 300㎞에 가까운 영역에 다차원 송수신기를 설치했고.

덕분에 샤이닝 에로우의 활동 범위도 넓어졌다.

지금까지는 샤이닝 에로우를 이용한 원거리 감시였다면 이제부터는 스파이캠을 이용한 근거리 정보수집이다.

“쿠아르탐파 영상 송출합니다.”

그 말과 함께 내 헌터 와치가 쿠아르탐파의 모습을 출력했다.

태고룡 쿠아르탐파.

샤이닝 에로우와 시스템을 통해 추측한 바에 따르면, 몸길이 2.3㎞ 열두 쌍의 날개와 여섯 쌍의 발을 가진 최상위 포식자.

현재까지 얻은 놈의 정보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지만, 이제부터는 달랐다.

지금까지는 내가 성장할 시간을 벌기 위해 놈을 자극하지 않고자 노력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놈을 처치하기 위해서라도 놈의 모든 것을 알아내야 했으니까.

거대한 날개를 휘저으며 구름 위를 날아가는 녀석의 뒤로 붉은색 점들이 나타나 빠르게 따라붙었다.

원래라면 이 정도 거리에선 보이지 않았을 작은 점들.

씨드가 친절하게도 붉은색으로 표시해준 그것들은 스파이캠이었다.

스파이캠이 놈에게 접근함과 동시에 홀로그램 화면이 나뉘며 개수를 늘려갔다.

몇 개는 날갯짓에 맞아 부서지고 또 몇 개는 바람에 휘말려 추락했지만, 대부분은 쿠아르탐파의 몸에 자리 잡았다.

콧구멍 속. 눈꺼풀 안. 발톱 사이, 비늘의 틈새.

그렇게 스파이캠이 안착했음에도 놈은 별다른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인간들에겐 야구공 크기만 한 스파이캠이지만 저 거대괴수에겐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박테리아 크기이리라.

그렇게 스파이캠이 보내오는 영상을 보며 세 사람은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일단 콧속 점막은 외부 비늘보다는 약해 보이네요.”

“눈도 마찬가지야. 워낙에 커다란 놈이라 약점도 여기저기 수두룩하구먼.”

“내부에 더 침입할 순 없나? 내장기관을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일단 비늘은 T렉스보다 단단한 건 확실해요. 외부에서 공략할 거면 비늘과 비늘 사이의 틈을 노려야겠어요.”

“스파이캠이나 다른 운송수단을 이용해 내부에서 폭탄을 터트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재생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은데 당장은 방법이 없겠지?”

쿠아르탐파라는 괴수를 사냥하기 위해 수십 수백 가지 방법을 떠올리고 그것을 보완하는 세 사람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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