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102화 (102/202)

102. 성장 (2).

“오. 왔군. 그래 오늘 수련은 어땠나?”

베이스캠프 앞에 서 있던 구정철이 나를 발견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얼굴을 보자 도연우의 말이 떠올랐다.

근접박투의 최강자. 그리고 내게 가르침을 주고 싶어 한다는 말.

그 말을 의식했기 때문일까?

나를 보는 구정철의 눈빛에 왠지 섭섭한 기색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번 찔러봤다.

“네. 배려해 주신 덕분에 수련은 잘 마쳤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다음에 한 번 가르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험. 나 같은 노인한테 배울 게 뭐 있다고 가르침을 청하나? 일 없네.”

말은 거절의 뜻을 품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미묘하게 씰룩이는 것이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구 전 대통령님께 배울 게 없다니요. 근접박투에 관해서는 대한민국 최고이시지 않습니까. 부디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나는 전에 없던 공경의 마음을 담아서 다시 한번 정중하게 구정철에게 부탁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들의 강함을 하루하루 내 눈으로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가진 사회적 지위와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 날마다 체감하고 있으니까.

매일 밤 이뤄지는 지구와의 통화에서 들은 대한민국의 상황은 준 전시상황과 다름없다고 했다.

욱일회의 존재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정부는 구정철 전 대통령의 장례를 대통령 장으로 치르겠다고 공표했으며.

욱일회와 싸우다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서태촌과 도연우를 국가 유공자로 지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란다.

광화문 광장에 마련된 합동 빈소에는 전국에서 올라오는 조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도 전했다.

지구에서 똑 떨어진 이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가르침을 청할 수 있는 것이지. 지구였다면 이들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호사였다.

‘빨아먹을 수 있을 때 쪽쪽 빨아먹어야지.’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그러니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큼…. 무슨 그런 공치사를 하고 그러는가. 자네가 원한다니 내 바쁘지만, 시간을 내봄세. 흠흠.”

구정철의 말에 서태촌과 도연우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지금처럼 가끔 습격을 해 오는 몬스터들을 제외하면 바쁠 일이 없는 이계였으니까.

***

“싸울아비를 10대 길드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고요?”

서소연의 물음에 싸울아비의 부 길드장인 곽영철이 무뚝뚝한 얼굴로 답했다.

“길드 내부의 일이니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냉정하기 그지없는 그 말에 서소연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40년 지기 친구인 곽영철이 이런 말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길드 내부의 일이니 제가 여쭤보는 게 당연하잖아요. 아저씨.”

“외부인인 네가 무슨 권리로 길드의 일에 관여한다는 거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곽영철의 목소리는 서소연이 여태까지 들어본 적 없는 차가움을 품고 있었다.

“아, 아저씨….”

떨리는 동공과 흔들리는 목소리.

서소연은 곽영철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믿고 따랐던 곽영철의 차가운 모습은 마치 이때만을 기다려온 배신자의 모습과 같았으니까.

곽영철은 흔들리는 서소연의 눈동자를 직시하고 입을 열었다.

“전라도 지방 경찰청 각성자 범죄 전담팀 팀장 서소연 경감님. 싸울아비의 일은 싸울아비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러니 경감님은 욱일회를 추적하는 일에 집중해 주시면 좋겠군요.”

냉정하게 싸울아비 길드와 서소연 사이에 선을 그어버리는 곽영철의 말에 서소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곽영철 부 길드장님!!”

“맞습니다. 제가 싸울아비의 부 길드장이죠. 그리고 길드 내규에 따라 길드장이 부재 시 부 길드장인 제가 길드장 대행으로 길드의 모든 일을 총괄합니다. 외부인인 서소연 경감님에겐 싸울아비 길드 내부의 일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서소연 경감님이 전 길드장님의 손녀분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서소연은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제가 부 길드장님께 섭섭하게 한 거라도 있어요?”

“이건 서소연 경감님이 길드 후계자 자리를 포기하셨을 때부터 예정돼 있던 일입니다. 이제 와서 후계자를 자처하시는 건 아니실 테죠?”

“그건….”

아버지의 친구, 서소연이 어린 시절 삼촌이라 부르며 믿고 따랐던 곽영철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저 10대 길드의 한 축이자 전라도계의 수장인 싸울아비를 집어삼키려 하는 배신자만 있을 뿐.

“할아버지가 돌아오시면 이번 일 절대 좌시하시지 않을 겁니다.”

“과연…. 돌아오실까요? 이세계로 넘어간 지 벌써 1주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지 않습니까.”

곽영철은 마치 철부지 어린아이를 보듯 서소연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마치 지금껏 숨겨왔던 욕망을 드러내는 것처럼.

“그럼 이만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아시다시피 길드 내부에 문제가 있어서 제가 좀 바쁩니다.”

곽영철의 축객령에 서소연은 입술을 짓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은 그녀의 등 뒤로 곽영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부터는 미리 연락하고 오시면 좋겠군요. 오늘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오시면 만나지 못하실 겁니다. 아시다시피 길드장 자리가 한가한 자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덜컥. 쾅!!

서소연은 곽영철의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거칠게 문을 닫고 길드장실을 빠져나갔다.

“후-. 쉽지 않군.”

그렇게 서소연을 떠나보낸 곽영철은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그래, 곤란한 부탁을 해서 미안하군.”

한차례 전투를 끝낸 뒤.

서태촌은 누군가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통화 중이었다.

“아닙니다. 길드장님. 그나저나 이 일로 소연이가 상처를 받지 않았어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상대는 곽영철.

서태촌의 명령에 마지못해 배신자 연기를 한 그의 목소리엔 서소연에 대한 걱정이 묻어나왔다.

“강한 아이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이렇게 해서 그 아이가 마음을 돌린다면 다행인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자네 자리를 더욱 공고히 다질 수 있으니 나쁘지 않지.”

“제겐 너무 과분한 자립니다. 길드장님. 요 며칠 길드장 대행으로 길드 관리를 해 보니 더 절실하게 깨닫게 되더군요. 이 자리는 제 그릇엔 넘치는 자리입니다. 길드장님.”

곽영철의 앓는 소리에 서태촌의 입매가 고집스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네. 나라고 처음부터 길드장은 아니었지 않은가. 자네도 잘할 수 있을걸세.”

서태촌의 말에 곽영철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소연이가 마음을 고쳐먹길 바랄 수밖에 없겠군요.”

“그렇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내 나이가 이제 여든일세. 현직 길드장들 중 최고령이지. 은퇴할 때가 되었어. 이번 일이 어떻게 진행되던 나는 은퇴할 거니 그렇게 알게.”

담담한 목소리로 은퇴를 말하는 서태촌. 전화기 너머의 곽영철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곳에 와서 여유를 가지고 생활을 해 보니 왜 그렇게 아득바득 살았나 하는 후회가 들더군. 후학을 가르쳐 보니 그 재미도 쏠쏠하고.”

“후학이라면. 혹. 도연우 길드장을 가르치고 계신 겁니까?”

곽영철의 물음에 서태촌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주변에서 하도 천재라 추켜세워 제멋대로 자란 망종인 줄 알았더니 요즘 도연우를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놈은 이미 내가 가르칠 게 없어. 이곳에서 뭘 깨달았는지 모르겠지만 SSS급에 올라서더군.”

“네!? 그 말씀 정말입니까? 아무리 세기의 천재라지만 서른다섯에 SSS급이라니요….”

“사실이네.”

“허…. 한울이 날개를 달았군요. 그럼 길드장님은 그곳에서 누구를 가르치고 계신 겁니까?”

“강현 군이 있지 않나.”

“아…. 그 E급 각성자 말씀하시는 거군요.”

강현을 E급 각성자라 부르는 곽영철의 말에 서태촌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공식적으로 E급 각성자가 맞지만, 그 성장세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닌 능력 또한 범상치가 않다. 이 세계로 가는 포털을 만들 능력을 갖추고 있고 생전 보지 못한 기물들을 가지고 온다.

각성자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등급 따위로는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그래 그 친구 말하는 것일세. 가르치는 재미가 쏠쏠해.”

“제법 재능이 있는 친구인가 보군요. 길드장님이 이리 말씀하시는 걸 보면. 혹 길드에 영입하실 생각입니까?”

그런 곽영철의 물음에 서태촌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 짐짓 가벼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군. 하여튼 길드 문제와 소연이 일 잘 부탁하네. 부 길드장. 자네만 믿네.”

“…네. 길드장님.”

그렇게 통화가 끝나고 서태촌은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도연우에게 스마트폰을 넘겼다.

“12%…….”

“음?”

“대체 영감님은 왜 이렇게 통화가 긴 겁니까? 구 전 대통령님은 1분도 안 걸리던데!”

물기 젖은 도연우의 목소리에 서태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자네…. 우나?”

배터리 잔량을 확인한 도연우의 눈가는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울긴 누가 운다고 그러십니까?!”

서태촌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배터리 잔량은 폰게임 중독자인 도연우에겐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였다.

매일 밤 강현이 충전을 해 주고 있었지만 한번 충전하는 데 두 시간이나 걸리다 보니 강현의 수련을 도와주고 있으면서도 부탁하는 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물론 강현은 이것도 수련의 일종이라고 했지만 부탁하면서도 편하지 않은 것이 도연우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수련을 도와주겠다고 나선 것이고.

“거. 충전해 주면 될 게 아닌가. 뭔 사내놈이 그런 걸 가지고 눈물을…. 이리 내게.”

울먹거리는 도연우의 손에서 스마트폰을 빼앗아 든 서태촌이 베이스캠프로 걸음을 옮길 때 그의 옆에 따라붙은 도연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서 길드장님 저 안 울었다니까요!”

“그래. 그런 거로 함세.”

“아니 정말 안 울었다고요!”

“그런 거로 하자니까 이 사람아.”

“그런 거로 하는 게 아니라….”

“아 뭔 사내가 이리 말이 많나?”

“아니 누가 누구보고 말이 많다는 겁니까! 남의 핸드폰 가져다가 한 시간이 넘게 통화하신 분이 누군데!”

강현이 수련을 하는 공터에서 베이스캠프로 향하는 길은 그렇게 두 사람의 목소리로 시끄러워졌다.

이세계 생활 일주일째 되는 날은 그렇게 저물었다.

***

다음날.

서걱!

키에엑!!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몬스터들 덕분에 베이스캠프의 아침은 몬스터의 비명으로 시작되었다.

서걱!

이곳의 몬스터답게, 사람보다 큰 신장을 가진 원숭이의 외형에 도마뱀의 피부를 가진 몬스터가 목이 잘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터억. 펑!

뒤이어 등 뒤를 노리고 공격해 오는 놈의 손톱을 피한 뒤 손등으로 놈의 안면을 타격하자 풍선 터지는 소리와 함께 얼굴이 박살이 났다.

수십 마리의 도마뱀 원숭이에 둘러싸인 강현은 여유롭고 능숙하게 놈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렇지! 피하고! 옳지! 거기서 주먹!”

그런 강현의 싸움을 지켜보던 구정철의 목소리가 흥에 겨워 높아졌다.

어젯밤에 특훈을 시켰던 보람을 느끼는 듯 구정철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강현의 분투를 응원했다.

“큼…. 역시 칼을 써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약점이 어딘지 정확히 아는군.”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서태촌도 썩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만 도연우만이 뭔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강현의 싸움을 지켜봤다.

“쳇…. 신창을 빌려줄 수도 없고….”

아무래도 강현이 창술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목창을 쥐여주고 몬스터들을 상대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게 한동안 강현의 고군분투가 이어지고 약 1시간이 지났을 무렵.

헉헉.

휘두르던 검을 지팡이 삼아 땅을 짚고 서 있는 강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해냈다.’

아이템빨도 아니고 스킬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만약을 대비해 샤이닝 에로우를 띄워두긴 했지만 도움을 받지도 않았다.

오로지 육체적 능력만으로 이뤄낸 승리.

수십 마리에 달하는 도마뱀 원숭이의 사체 사이에 홀로선 강현은 그렇게 성취감을 느꼈다.

불과 석 달 전 고블린 한 마리도 상대하지 못해 요단강을 건널뻔한 자신이 이제는 C급 혹은 B급일지도 모를 몬스터 수십 마리를 상대로 승리한 것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양감이 차오르며 지친 육신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

띠링.

마치 강현의 성장을 축하하기라도 하듯 알림음이 울리며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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