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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95화 (95/202)

95. 퀘스트: 사혼 감옥 탈출 (2).

붉은색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사혼 감옥이라는 결계.

천장과 벽 그리고 바닥에 코팅된 듯 흐르고 있는 그것에는 빈틈이 없었다.

무슨 의도로 이 결계를 펼친 건지 이유는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고립.

이 결계는 철저하게 결계 안과 밖을 단절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내외부에서 전해지는 충격을 흡수하도록 만들지 않았을 테니까.

“흠….”

기적 형님이 갇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온 나는 조심스럽게 결계의 벽에 손을 뻗었다.

텁.

결계에 손을 댄 느낌만 말하자면 불쾌했다.

끈적하고 질척이는….

내 손을 끌어당겨 나라는 존재를 흡수해 버릴 것만 같은 불쾌한 느낌에 온몸의 솜털이 바짝 일어섰다.

당장이라도 결계에서 손을 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저 좁은 틈바구니에 나를 사람같이 살게 해 준 사람이 갇혀 있다.

내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내 옆에서 삶의 방향을 잡아준 은인이며 가족과 같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나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고초를 겪고 있다.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이런 불쾌함 따위와 형님의 목숨을 한 저울에 올려 놓을 수 있을까?

아니다.

내게 기적 형님은 너무도 무거운 사람이고 어떤 위험을 감당해서라도 구해내야 할 사람이다.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손 하나가 떠올랐다.

대낮인데도 햇빛 하나 들지 않는 뒷골목, 쓰레기처럼 쓰러져 있던 내게 내밀어진 손.

보육원을 나온 이후 처음 받아본 따뜻한 손길이었다.

그래서 뿌리칠 수 없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래서 더 단단한 그 손이 지금까지 나를 사람답게 살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내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나 때문에 납치가 되어 저렇게 사람이 설 수조차 없는 좁은 틈바구니에 시체처럼 처박혀 있다.

그런데 어찌 고작 불쾌감 때문에 물러설 수 있을까.

-특성: 공간시 F가 발현됩니다.

-특성: 아공간 조작 F가 발현됩니다.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하기라도 하듯 공간에 관련된 나의 특성들이 일제히 발현됐다.

공간시가 발현되자 붉은색 결계의 표면에 선명한 선이 떠올랐다.

결계와는 선연하게 구분되는 푸른색의 마나 회로.

천장에 박힌 마나석에서 뻗어 나온 마나 회로는 천장과 벽 그리고 바닥까지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틈은 보이지 않았다.

인벤토리나 아공간을 볼 때와는 다른 광경에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잠시, 나는 마나를 움직여 푸른색 마나 회로에 불어넣었다.

우우웅-!

그러자 뭔가 기분 나쁜 진동이 느껴지며 손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를 회로가 먹어치웠다.

잔흔 하나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그렇게 흡수된 내 마나가 마나석으로 흘러 들어갔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생각했다.

‘이 모습은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오직 나밖에 볼 수 없다.’

씨드도 저기서 탈출방법을 모색 중인 세 사람도 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조언도 구할 수 없다.

설명한다고 설명이 될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공간 조작으로 틈을 만들고자 한다면 못 만들 것도 없었다. 이 공간은 내가 그동안 청소해 왔던 인벤토리나 아공간들과는 다르게 불완전했다.

그렇기에 생명체의 피를 흡수할 필요가 있었던 거고. 지금도 조금씩 결계 안의 마나를 흡수하고 있었다. 그래서 구정철이 마나의 흐름이 이상하다고 말한 것이다.

인벤토리나 아공간처럼 확실하게 세계에서 분리돼 떨어진 공간이라면 이 안에 있는 이들은 주술이 발동하는 순간에 몇 명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을 거다.

그리고 그 남은 몇 명도 얼마 버티지 못했을 테고.

인벤토리나 아공간 안에서는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이 공간은 그처럼 완전히 독립된 공간이 아니었다.

누군가 던전을 비슷하게 흉내를 내 만들어낸 공간이라 그런지 분명 공기가 존재하고, 마나의 흐름이 실재했다.

문제는 그러므로 아공간 조작 특성으로 공간의 틈을 만들어 낸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인벤토리나 아공간은 튼튼한 벽돌을 쌓아 만든 성이고 이 결계는 바닷가 모래로 만든 모래성이다.

‘단단하게 만들어진 성은 벽돌 하나 뺀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지만, 모래로 만들어진 성은, 파도 한번 치면 무너지는 거지.’

그래서 조심스러웠다.

이 사혼 감옥이라는 결계가 무너지면 어떤 여파가 발생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세 사람을 바라봤다.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 의견을 나누던 세 사람 중 눈을 마주친 구정철이 내게 손짓했다.

왔던 걸음을 되돌려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거 참 보상까지 선급으로 받고 할 말은 아니네만 자네 형님을 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얼굴 가득 미안한 표정이 가득한 구정철의 말을 서태촌이 이었다.

“분명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자네 형님이 위험한 상황인 건 알지만 함부로 결계에 손을 댈 수가 없네. 자칫 잘못하면 결계만 더욱 강화될 뿐이니….”

“그래도 외부와 연락을 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안 그랬으면 정말 갑갑할 뻔했는데.”

서태촌의 말을 받은 도연우가 손안의 스마트폰을 흔들어 보였다.

“외부와 연락이 됩니까?”

“일반적인 전파 통신은 불가능하지만, DH 미디어 채널을 통해서 연락할 수 있더군요. 다차원 송수신기라고 했나? 던전에서 라이브 스트리밍이 가능하니 여기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시도해 봤는데 되더라고요.”

“그럼….”

“일단 외부에 연락해 이 결계를 드러내라고 했습니다.”

도연우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결계를…드러낸다고요?”

산을 파헤치는 것도 아니고 결계를 드러낸다니 설마 지상에서 이곳까지 산을 모두 날려버리겠다는 건가?

내 반응에 도연우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싱긋 웃어 보였다.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10대 길드 중 3개 길드의 수장입니다. 이 두 분은 세계에 다섯 명밖에 없는 SSS급 각성자들이시고요. 중요도를 생각하면 산 하나 날리는 건 일도 아니죠.”

“그럼 기적 형님은 어떻게 되는 거죠?”

“일단 그곳으로 먼저 터널을 뚫어서 이기적 씨를 구출할 생각입니다. 산을 날리는 건 그 이후죠.”

“아….”

도연우의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 사람들, 내 의뢰를 잊지 않아 줬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의문은 있었다.

“산을 날린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일 텐데요?”

“쉽지는 않지만 어려울 것도 없죠. 싸울아비와 화랑 그리고 한울의 전력을 그러모으면 이런 낮은 산 하나 평탄화하는 거는 하루도 안 걸릴 겁니다. 문제는 저 결계죠.”

해발 1000m, 2000m 하는 높은 산은 아니지만 그래도 산은 산이다. 그런 산을 날려 결계를 외부로 드러내겠다니 정말 생각의 스케일이 다르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계가 외부로 드러나더라도 파훼할 방법이 없다면 평탄화를 하는 것도 헛수고니까요. 일단 무력으로 때려 부수는 것도 한 방법이긴 한데….”

말을 하던 도연우의 시선이 잠시 서태촌에게 향했다.

“서 길드장님께서 이미 시도하셨지만, 충격을 흡수해 결계가 더욱 강해지는 구조라면 그마저도 쉽지 않을 듯합니다. 그럼 결국 술법과 진법에 경지가 높은 마법사가 이걸 파훼해야 한다는 소린데…. 아쉽게도 한국엔 그만한 실력을 갖춘 마법사가 없습니다.”

결론은 원점이었다.

지금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다는 것.

힘으로 해서는 안 되고, 술식을 해석해 역산할 만한 능력자도 없다.

세 사람의 생각은 일단 결계를 외부로 드러내고 외부와 협조해 파훼해 볼 심산인 모양인데 그것에 대한 확신이 없는 모양이다.

결론은 내가 해내야 하는 일이라는 소리였다.

그러라고 시스템이 내게 퀘스트를 던져준 것일 테지.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에게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네? 강현 씨가요?”

원래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능력이지만 자칫 퀘스트에 실패하고 시스템 사용권한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비밀이랍시고 계속 능력을 숨기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것저것 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뜻이었다.

[제한시간: 23시간 17분]

지금, 이 순간에도 퀘스트 제한시간은 줄어들고 있었으니까.

***

설명은 간결했다.

“저는 공간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그 한마디에 세 사람의 반응은 같았다.

뭐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한 눈빛.

그제야 나는 내 설명이 너무 간결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공간이니까.

그래서 나는 다시 부연설명을 해야 했다.

“저는 공간의 이면을 봅니다. 그리고 그곳을 청소하죠. 이미 알고 있으시겠지만 제 직업이 청소부인 이유가 그것이죠.”

시스템과 그에 관련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기에 뭉뚱그려 설명했지만 내 설명을 들은 그들은 무언가 이해했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참고 있던 것도 용하다.

‘라그라주’, ‘물벼룩’, ‘바람신의 걸음’ 등 뭐 하나 흔한 아이템이 없는데 지금까지 그 출처를 묻지 않은 걸 보면.

거기에 지금 저들이 가지고 있는 마나의 묘약과 유클리안 잎사귀 차도 지금껏 지구에는 등장한 적이 없었던 물건들이다.

던전이 등장하고 몬스터가 나타나면서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과 부산물들이 점차 늘어갔지만, 아이템목록 어디에도 마나의 묘약과 유클리안 잎사귀 차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것도 근 80년간.

물론 하루하루 새로운 발명이 이뤄지고 신규아이템이 등장해 헌팅의 패러다임을 바꾸기도 하지만 그것들의 밑바탕엔 80년간 축적돼 온 지구의 과학과 마법이 베이스로 깔려있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새로운 무언가가 등장한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 그들에게 내가 건넨 마나의 묘약과 유클리안 잎사귀 차는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아이템들이었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이템.

그렇기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어디서 어떻게’가 빠져 있던 아이템들의 출처에 ‘공간의 이면’을 집어넣으면 어느 정도 말이 되니까 저들도 고개를 끄덕인 거다.

던전이라는 이상 공간이 버젓이 존재하는 마당에 ‘공간의 이면’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 이는 없을 테니까.

“지금 제 눈에는 이 결계를 이루고 있는 마나 회로가 보입니다. 하지만 저 역시도 마법이나 주술에 대한 지식이 없어 이것을 안전하게 파훼할 능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시도해 볼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음….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평범한 방법은 아니겠군.”

평범한 방법이 아니긴 했다. 공간 자체를 조작해서 틈을 만들어 내는 방식이니까. 그리고 이 방법은 확실한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공간을 조작해 결계의 틈을 만들어 내는 방법입니다.”

“음? 그게 가능한가? 공간을 조작한다니.”

“가능합니다. 제 직업과 연관된 스킬이라 자세하게 설명해 드릴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공간의 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텔레포트 능력을 각성한 텔레포터들도 있는데 공간 조작이란 것도 가능하겠죠. 하지만 강현 씨가 이렇게 말을 하는 건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일 테죠?”

도연우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문제는 제가 이 결계를 모른다는 거죠. 그 때문에 공간 조작을 실행했을 때 결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군.”

“제가 보기에 이 공간은 누군가가 던전을 흉내 내서 만들어낸 공간입니다. 하지만 던전과 다른 점이라면 공간과 공간을 완전히 분리시키지 못해서 공간 자체가 불안정하다는 점입니다. 또 던전 코어라 불러야 할 마나석이 외부에 존재하기에 내부에 갇힌 저희들이 파괴하고 탈출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외부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저 코어를 부술 수 있을지 미지수이기도 하구요.”

내 설명에 세 사람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따라서 제가 공간 조작을 통해 틈을 만들어 냈을 시 공간 자체가 붕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공간 자체가 붕괴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죠?”

“알 수 없습니다. 운이 좋으면 이 공간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운이 나쁘다면 우주 어딘가로 튕겨 나갈 수도 있습니다. 지금 지구에 나타난 던전들처럼 말이죠. 그리고 최악의 경우엔….”

난 최악을 얘기하기 전에 잠시 말끝을 흐렸다.

청소를 끝내면 빛의 가루로 화해 사라져 버리던 인벤토리가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는 뭔가? 말해 보게.”

“…이 공간과 공간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게 먼지로 화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사혼 감옥 안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세 사람은 물론이고 그 대화를 엿듣고 있던 400명이 넘는 이들이 모두 숨 쉬는 것도 잊은 채로 생각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우웅-.

우우우웅-!

감옥이 나직한 공명음을 토해 내며 붉은빛으로 번쩍였다.

“어어. 이거 왜 이래?”

그리고 코팅을 한 것처럼 공동에 달라붙어 있던 결계가 떨어져 나왔다.

“이거…. 줄어드는 것 같은데?”

누군가의 중얼거림처럼 사혼 감옥은 그 크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아악! 밀지 마!”

“빨리. 공동 중앙으로 이동해! 이거 줄어들고 있다고!”

무릎을 꿇고 있던 욱일회 인물들이 줄어드는 결계의 벽에 밀려 공동 중앙으로 몰려왔다.

그리고 공간시가 발현된 내 눈에는 보였다. 그렇게 감옥의 크기가 줄어드는 순간 결계는 더욱 두터워지고 견고해졌으며 마나 회로를 통해 천장의 마나석으로 빨려 들어가는 마나의 흐름 역시 더욱 거세지는 것을.

“빌어먹을 일이군….”

구정철의 중얼거림처럼 빌어먹을 일이었다.

나는 이 탈출 퀘스트에 시간제한이 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사혼 감옥이라는 이 결계는 꾸준히 그 크기를 줄일 테고 퀘스트 제한시간이 지나면 이 공간은 압축되어 사라진다.

[제한시간: 22시간 57분]

나는 내게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임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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