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퀘스트: 사혼 감옥 탈출 (1).
붉게 물든 공동.
서태촌의 말에 사람들은 저마다 말을 잃었다.
도연우와 구정철은 심각한 얼굴로 아무 말이 없었고 서태촌도 함정이라는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그렇게 공동엔 적막이 내려앉았다.
퀘스트 내용을 보면 나를 제외하고 417명이 있는 공동.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의 숨소리조차 귓가에 들릴 만큼 고요했다.
저벅.
그런 고요를 깨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그중 몇몇은 의아함을 품고 있고 또 개중에 몇몇은 적의를 드러낸다.
그리고 내 발걸음은 내게 가장 강렬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이 앞에 멈춰 섰다.
“부대주라고 했던가?”
바스러진 어깨를 늘어뜨린 채 나를 노려보는 중년의 사내.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범죄자 따위에게 존대를 해주고픈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대답.”
내 말에 어깨가 박살이 난 놈이 ‘픽’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욱일회 놈들은 전부 나사 하나가 빠진 놈들 같다.
지금 상황에서 웃음을 터트리다니.
“강현 씨 맞죠? 지금 당신이 뭐라도 되는 거 같아요?”
겁이 없는 건가?
“등 뒤에 호랑이 같은 인물이 셋이나 버티고 있으니 당신이 뭐라도 된 것 같겠죠.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이 당당함의 근원이 뭔지 모르겠다. 고작 납치범 주제에.
그래서 물었다.
“그 호랑이가 무서워서 아까는 그렇게 쥐죽은 듯이 조용했었나?”
구정철에게 어깨를 잡혔을 땐 비루먹은 개새끼처럼 꼬랑지를 말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놈이 왜 나에겐 이리 당당할까.
이유를 생각해 보면 답은 하나다.
내가 약하니까.
내가 자신보다 한없이 약하고, 기적 형님이라는 내 약점을 자신이 잡고 있기에 이리 당당할 수 있으리라.
우스웠다.
“내가 너에게 왜 기적 형님의 행방을 안 물어보는지 알아?”
순간 부대주의 눈동자가 파도처럼 흔들렸다.
“네 딴엔 잘 숨겨놨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이미 찾았어.”
내 말에 놈의 눈에 불던 파도는 더욱 거세졌고 이제 태풍을 만난 돛단배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놈을 내려다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네가 쥐고 있던 카드가 사라졌는데 넌 이제 뭘 가지고 내게 당당할 거지?”
말을 마친 나는 조용히 놈을 지나쳐 걸음을 움직였다.
저벅저벅.
붉은색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공동의 벽, 인위적으로 손을 대기도 했지만, 자연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벽의 벌어진 틈 깊숙한 곳.
붉은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사혼 감옥의 벽 너머로 나는 기적 형님을 바라봤다.
좁디좁은 틈바구니에 몸이 끼어 쓰러지지도 못하고 선 채로 기절해 있는 기적 형님.
제 딴에는 잘 숨겨 놓는다고 뭔가 스킬을 사용해 가려둔 것 같지만 공간을 보는 내 눈앞에서 그런 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참 꼼꼼하게도 숨겨놨네.”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거로 봐선 숨도 잘 쉬는 것 같고 크게 다친 곳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기적 형님을 보는 순간, 이 사망 감옥이라는 술법을 빨리 해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틈바구니에 남은 공기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성인 남성이 24시간이나 버틸 수 있을 만큼 많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기적 형님의 상태를 확인한 내가 다시 걸음을 돌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오자 부대주라는 놈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긴 수백 개나 되는 절벽 틈바구니에서 기적 형님이 숨겨진 곳을 단번에 찾아냈으니 놀랄 만도 하지.
하지만 내게 놈의 궁금증을 풀어줄 의무는 없었다.
무심한 눈으로 놈을 일별한 내가 향한 곳은 구정철과 서태촌, 도연우가 모여 있는 곳이었다.
“…파괴는 불가능하다는 소린가?”
“분명히 이 결계가 내 검격을 흡수하는 걸 느꼈어. 정 못 믿겠으면 구가 네놈이 한번 해보던가.”
“그렇다고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마나의 흐름이 이상해. 서가 놈 말대로라면 이 결계는 우리가 여태 겪어 보지 못한 결계일 거야. 함부로 이것저것 시도해 볼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거지.”
“저 마나석을 부숴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천장에서 불길하게 빛나는 마나석을 가리키는 도연우.
한마디로 결계의 중심을 파괴하자는 말이었다.
“좀 전에 말했잖은가 도 길드장. 마나의 흐름이 이상하다고, 그리고 저 마나석도 결계 밖에 있네. 무슨 수로 결계를 뚫고 마나석을 부순단 말인가.”
구정철의 말에 도연우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나는 탈출에 대한 논의가 한창인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먼저 세 분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기적 형님을 구하고 퀘스트를 진행하는 게 급하더라도 먼저 사과를 해야 했다.
“응?”
“무슨 일로 그리 고개를 숙이나 자네가 우리에게 사과할 일이 뭐가 있다고.”
“설마 이제 와서 ‘마나의 묘약은 가짜였습니다.’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죠? 그럼 재미없어요. 의뢰주님.”
내 사과에 대한 세 사람의 반응이었다. 당연히 마지막에 입을 터는 건 도연우고.
참 주는 거 없이 얄미운 캐릭터다 이 사람은.
난 고개를 들어 세 사람을 바라보며 거듭 사과의 말을 건넸다.
“제 지인이 납치돼 감정조절이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세 분께 실례되는 말을 했다면, 혹 그로 인해 기분이 상하셨다면 푸시길 바랍니다.”
내가 그들에게 사과하는 이유.
그것은 간단하게도 내가 살기 위해서다.
시스템이 내게서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뼈저리게 느껴졌다. 해피니스 시스템이 없는 나는 그저 흔하디흔한 E급 각성자에 불과하다는 사실 말이다.
나이는 물론이고 사회적 지위를 봐도 저들은 나에게 그런 말을 들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헌터로서의 능력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음에도 워낙 기진맥진해 있던 탓에 나도 모르게 발끈해,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했다.
이는 앞으로 내 행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행동이었기에 나는 빠르게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감정의 골이 생기고 그것이 더 깊어지기 전에.
그리고 나는 그 사과를 그저 입으로만 끝내지 않았다.
“보상으로 약속했던 것들입니다. 사과의 의미로 받아 주십시오.”
마나의 묘약 두 개와 유클리안 잎사귀 차.
“…….”
서태촌은 아무 말 없이 차를 받아갔다. 말은 안 했지만,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 꽤 만족한 모양이었다.
하긴 자신의 옆에 그 차를 마시고 10년은 젊어진 구정철이 있으니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일 테지.
“흠…. 뭘 이걸 벌써 건네고 그러나. 아직 자네 의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말로는 점잔을 빼고 있지만, 구정철의 손은 재빨리 내 손에 들린 마나의 묘약을 낚아채 갔다.
“기적 형님이라면 찾았습니다.”
“응? 어디?”
“저쪽 절벽 틈에 숨겨 뒀더군요.”
내가 가리킨 절벽 틈을 본 구정철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결계를 빨리 파훼하지 않으면 위험하겠군.”
역시 늙은 생강다웠다.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기적 형님이 머무는 공간의 공기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거다.
그리고 그의 말은 보수를 받았다고 해서 이대로 의뢰를 끝내지 않겠다는 뜻도 담고 있었다.
나는 구정철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도연우에게 향했다.
한울 길드장 도연우.
30살의 나이로 SS급에 올라 미래의 SSS급이란 기대를 받았던 신진강자.
그는 내가 내민 마나의 묘약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그것을 받아들고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죠?”
“뭐가 이상하시다는 건지….”
“나는 이 마나의 묘약이라는 포션보다 강현 씨가 더 탐이 나네요. 아까부터 허공을 날아다니던 저것들도 그렇고, 강현 씨는 꽤 신비로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에요.”
역시 괜히 SS급이 아닌 모양이다. 그는 비가시 모드로 내 주변에 떠 있는 샤이닝 에로우를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흘끔거렸다.
“그렇습니까?”
“강 회장님께 듣자 하니 대현에 사외이사로 들어갔다던데, 어때요? 한울에 자리하나 만들어 줄게 같이 일해 볼래요?”
뜬금없는 스카우트 제의.
하지만 아까 보여줬던 껄렁한 모습과는 다르게 지금 도연우의 모습은 진중했고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이 곧았다.
“소문엔 저 두 분이 SSS급으로 각성하는데 강현 씨의 도움이 있었다던데…. 난 저 두 분이 왜 강현 씨를 스카우트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에요.”
스카우트?
왜 안 했겠는가. 구름 가오리 사냥이 끝나고 1주일 동안 나는 구정철에게 적지 않게 시달렸다.
서태촌이야 얼굴 본 게 그때 처음이었으니 직접 스카우트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지만, 구정철은 거의 매일 전화해 길드로 들어오면 내 팀을 만들어 주겠다고 나를 쉬지 않고 꼬드겼었다.
물론 나야 정중하게 거절했고.
나는 나만의 성을 짓고 싶은 거지 누군가의 성을 지키는 문지기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니까.
“제안은 감사하지만, 한울에 들어가기에 제 역량이 아직 모자란 듯싶습니다.”
따라서 나는 정중하게 도연우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도연우는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속삭였다.
“하하. 이거 정말 탐이 나는데…. 이 정중한 거절을 거절하면 나도 저 꼰대들처럼 눈치 없는 사람이 되는 거겠죠?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니까…. 한울의 문은 강현 씨에게 언제든 열려 있다는 것만 알아줘요. 이번 일처럼 도움이 필요한 일 있으면 저 꼰대들 말고 나한테 연락해도 되고.”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찡긋거리고는 구정철과 서태촌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자- 의뢰주한테 보상도 선지급으로 받았는데 의뢰는 확실하게 마무리해야죠?”
뭔가 개운하다는 듯한 그 목소리.
서태촌과 구정철의 불퉁한 시선을 받은 그는 씨익 웃었다.
철딱서니 없는 젊은 길드장.
도연우는 서태촌과 구정철에게 딱 그런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세 사람의 기분을 풀어준 나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의뢰가 끝난 것도 아닌데 보상을 먼저 주는 건 성급한 게 아니냐고?
어찌 보면 저들이 한 거라곤 이 공동에 들어와 미친 듯한 학살을 벌인 것밖에 없어 보이지만, 저들은 존재만으로도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었다.
나를 제외하고 이 사혼 감옥에 갇힌 사람이 417명, 그중 저 세 사람을 제외하면 욱일회 놈들이 414명이란 소리다.
그런데 그 많은 인원이 내가 무방비한 모습으로 돌아다니고 있음에도 손가락 하나 꿈쩍하지 못했다.
특히 부대주라는 놈은 내가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순간 기습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음에도 꼼짝하지 않았다.
그게 그저 한쪽 어깨가 아작났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건 저기 있는 세 괴물 때문이다.
부대주란 놈도 자신이 움직이는 순간 저 괴물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알기에 주둥이는 놀려도 몸뚱이는 움직이지 못한 거다.
결박이나 구속도 필요 없다.
단 3명이 400명이 넘는 놈들을 억제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그중에는 부대주라는 놈과 놈에게 뒤통수를 맞은 놈도 포함이다.
내가 S급 각성자일 거라 판단한 놈마저도 쥐고 있던 칼을 내팽개친 채 바닥에 주저앉아있었다.
저놈도 제 목숨은 소중한 것일 테지.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낸 게 저기 있는 세 사람, 아니 세 괴물이었다.
불과 1분 만에 500명을 이 공간 안에서 지워버린 세 괴물.
그들은 존재만으로 이 공간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나는 마음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씨드와 샤이닝 에로우를 전개해 놓은 채로.
남은 건….
나는 불길하기 그지없는 붉은색으로 일렁이는 결계의 벽을 바라봤다.
[현재 생존 인원: 417]
[제한시간: 23시간 34분]
[제한시간 내 탈출 실패 시 해피니스 시스템 사용자 권한이 박탈됩니다.]
남은 건…. 최대한 빨리 기적 형님을 저 틈에서 구출하고 이 빌어먹을 사혼 감옥을 최대한 빠르게 탈출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