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배덕자의 후예들 (3).
강현과 구정철 등이 결계의 안으로 들어갔을 무렵 욱일회주는 새하얗고 기괴한 가면을 쓴 인물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 한울 길드까지 엮였다고?”
회주의 물음에 구멍 하나 없는 반들반들한 가면을 쓴 인물이 대답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한울도 이번 일에 개입했더군요. 좀 전에 입구를 통해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입구가 발견되긴 했지만 한번 결계 안으로 들어간 이상 빠져나올 순 없을 겁니다.”
성별도 나이도 특정할 수 없는 목소리. 가면인의 목소리는 그가 착용하고 있는 가면만큼이나 기괴했다.
“미래에 SSS급 헌터가 될 재목이라더니. 결국, 제 죽을 자리인지도 모르고 달려드는 불나방이었나 보군.”
“그게 조센징들의 특성 아니겠습니까. 잡초 같은 놈들이니 이렇게 미리미리 싹을 잘라두는 게 좋습니다.”
가면인의 말에 회주가 기꺼운 듯 껄껄 웃었다.
“결계는 언제쯤 발동하는가?”
“적당히 피가 흐르면 알아서 발동할 겁니다. 재물이 천명이나 들어가 있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요.”
“끌끌. 10대 길드 중 3곳이 수장을 잃겠군. 결계의 효과는 확실한 거겠지?”
“그렇게 되면 우리의 계획이 조금 더 앞당겨 질 겁니다.”
“그래…. 내우가 있으면 외환을 방비하기 힘든 법이니 말이지.”
회주의 말에 가면인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열 개의 기둥 중 세 개가 무너질 테니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쥐새끼들의 발악이 시작되겠군요.”
“피가 많이 흐르겠군…. 좋은 일이야. 좋은 일.”
“그 피에 젖은 반도 위에 제국의 기둥이 우뚝 설 겁니다.”
“부디 내가 눈감기 전에 다시 한번 제국을 깃발이 이 반도 땅에 휘날리는 걸 봤으면 싶군.”
“곧 보게 되실 겁니다. 회주님.”
가면인의 말에 회주는 만면에 기꺼운 미소를 지었다.
자글자글한 주름들이 그가 지나온 세월을 대변하는 것처럼 깊은 골을 만들어 냈다.
“그래 총리께서 다른 언질은 안 주시던가?”
“곧 워프 게이트 개발이 완료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전에 반도 땅에 큰 혼란을 만들어 주십사 부탁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가면인의 말에 웃고 있던 회주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큰 혼란이라…. 10대 길드 중 3개가 무너지는 건 큰 혼란이 아닌가?”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회주의 눈빛에 살기가 어린다. 그런데도 가면인은 태연하게 그 말을 받았다.
“저는 그저 총리님의 말을 전하는 메신저일 뿐입니다. 판단은 회주께서 내리실 일이지요.”
슬그머니 발을 빼는 가면인의 말에 회주는 깊은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지만, 구멍 하나 없는 매끈한 가면을 뚫고 가면인의 표정을 살필 수는 없기에 낮게 혀를 찼다.
“쯧. 총리께 내 총리의 뜻을 알겠으니 너무 심려치 말라 전하게.”
“네. 회주님.”
그렇게 둘의 대화가 끝나자 실내에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욱일회는 너희의 도구가 아니다. 그리고 이 반도 땅은 나의 영지가 될 거야.’
100년이 넘도록 살아남의 노 괴물의 심중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욕심. 회주의 몸에선 불길한 기운이 일렁거렸다.
어색함이 가득한 삐걱거리는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가면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부대주라는 자가 이선호를 배신할 것을 예측하신 겁니까?”
그 물음에 회주는 주름진 노안과 어울리지 않는 비릿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자네는 모르겠지. 이 반도 땅에 살아본 적이 없을 테니. 하지만 나는 백 년이 넘는 세월을 이 반도 땅에서 살았다네.”
과거 제국이 완전할 땐 본토에 오가며 학문을 익히기도 했으나 자신이 태어난 곳은 이 땅이며, 자신은 조선인들을 부리는 귀족으로 살았더랬다.
무려 20년이 넘는 세월을.
하지만 천재지변처럼 들이닥친 던전과 몬스터라는 재앙 때문에 제국 본토와의 연결이 끊어진 이후.
그의 고향인 이 반도 땅은 그에게 지옥이 되었다.
고귀한 자신의 얼굴에 돌과 침이 날아들었고.
그가 부리던 자들이 그의 재물이 원래 자신들의 것이라 말하며 대문을 부수고 들어와 겁박했다.
회주 일가에겐 도주 말고 다른 대안은 없었다.
그 과정에서 자랑스러운 제국의 신하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애로운 어머니 또한 큰 상처를 입어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셨다.
그렇게 가족을 잃는 동안 제국은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아니, 주지 못했다.
제국의 역량은 본토의 일을 감내하기에도 벅찼으니까.
아마 각성을 하지 못했다면 자신 또한 부모님의 뒤를 따라가야 했을 터.
하지만 뒤늦게 각성을 한 덕에 그는 목숨을 부지하고,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음지로 숨어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음지에서 제국의 은혜를 배신한 배덕자들이 나라를 세우고 운영하며 발전시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배덕자들에게 핍박받는 자들을 구하기 위해 재일회를 만들었고, 잃어버린 자신의 것을 되찾기 위해 욱일회로 키웠다.
무려 105년의 세월.
그가 이 반도 땅에서 태어나 제국의 신민으로, 다시 대한민국의 적으로 살아온 세월이다.
그렇기에 회주는 잘 알았다.
“그렇기에 나는 이 조센징이라는 것들의 특성을 잘 알지.”
제국의 힘이 닿지 않자 가장 먼저 등을 돌린 이는 그를 키웠던 유모였다.
“언제나 등 뒤에 칼을 숨기고 배신의 기회를 찾는 비열한 족속들.”
어머니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폐물을 내놓으라 소리를 지르던 그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다.
“나는 그 부대주라는 놈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었을 뿐이지. 배신의 기회를.”
과거 자신이, 어머니가 유모에게 배신의 기회를 주었듯, 회주는 부대주에게 이선호를 배신할 기회를 만들어 준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구정철과 서태촌 그리고 비현의 수장인 일현을 가둘 계획이었다.
정확히는 봉인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강현이라는 놈이 도움을 청할 이들이라고 해 봐야 그들이 전부였으니까.
강현이 가진 유물을 찾는 능력이 아깝긴 했지만, 그 셋을 처리할 수 있다면 회의 대계에 큰 도움이 될 것이기에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만한 미끼가 흔한 것도 아니었고.
욱일회라는 떡밥에 강현이라는 미끼가 던져졌으니 구름 가오리 때처럼 미끼를 물 거라 생각했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한울 길드장이라는 부록이 딸려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지만.
“보게. 기회가 오니 놓치지 않고 10년을 넘게 모셨던 상관의 등에 칼을 꽂지 않나? 이게 조센징들이라는 것들일세. 제국의 문화로도 교화가 안 되는 저열한 족속이지.”
가면인은 스스로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회주를 보며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말을 삼켰다.
‘일본인이라고 크게 다를 게 없는데 말이지.’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노인네의 고집일 테니 그러려니 하고 웃어넘길 뿐.
덕분에 주술을 발동할 피는 충분히 얻을 수 있게 되었지 않은가.
***
‘누구랑 싸우는 거지?’
동굴 끝에 자리한 거대한 공동안.
대략 1천여 명의 인원은 둥그렇게 인의 장막을 이룬 채 한 사람을 포위하고 있었다.
감각 영역을 확장해 봤지만, 너무 많은 인원이 함께 있어서인지 정보의 과부하로 두통만 얻었을 뿐 중심에 있는 이가 누군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
‘씨드 뭐 좀 보여?’
‘스킬과 마법의 발현으로 만들어진 마나의 잔흔이 너무 많아 실질적인 인상착의는 특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외선 측정결과 체격이 이기적님을 납치한 범인과 동일인이라는 것은 확인되었습니다.’
‘그래? 그럼 설마 기적 형님도 저 안에?’
‘이기적님의 행방은 알 수 없습니다. 이 공간을 전체 스캔했으나 워낙 많은 인원이 몰려 있는 터라 분류에 시간이 걸립니다.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하여간 저 중심에 형님이 있는 건 아니라는 거잖아.’
‘네. 중심에 있는 건 납치범으로 추정되는 자이며 그 동행인과 이기적님은 없습니다.’
수십 수백의 스킬과 마법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싸움판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니 다행이다.
‘그나저나 이놈들 원래 한 패거리가 아니었던 건가? 왜 싸우는 거지?’
기적 형님을 인질로 나를 협박할 줄 알았는데 정작 놈들을 쫓아와 보니 이런 살풍경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니 어이가 없었다.
“하하하하하!!”
비명과 폭음이 난무하는 싸움판 한복판에서 미친듯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작 이따위 공격으로 나를 죽일 거라 장담했던 건가 부대주?!”
기적 형님을 납치한 원흉은 1천여 명의 사람들에게 공격받고 있고 최전선에서 그를 공격하던 이들은 날카로운 절삭음과 함께 베어져 후방으로 이송된다.
그리고 치료를 마친 인원은 다시 전장으로 투입된다. 그 과정의 무한 반복.
물론 개중에 치명상을 입고 절명한 이들도 적지 않으나 아직도 수적 우세는 압도적이다.
“부대주!! 쥐새끼처럼 숨어서 내 빈틈이나 노리는 네가 과연 나보다 빛에 더 어울릴까?”
하지만 신명 나게 칼춤을 추는 인물은 여전히 강인했고 그의 칼끝은 끊임없이 공간을 격하는 검격을 토해 냈다.
꿀꺽꿀꺽.
심지어 쏟아져 내리는 공격을 한 손에 든 검으로 베어 내며 마나포션을 마시는 여유를 보일 만큼.
그리고 나는.
그 순환하는 고리에 밀려 어느새 그와 마주하는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
“죽여!”
“뭐 하는 거야? 정신 차려! 저 새끼 못 잡으면 우리가 죽는다고!”
옆에 있는 정체 모를 사내의 고함.
“아. 응.”
그리고 앞으로 튀어 나가는 사내와 등 뒤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밀려 그 사내와 마주 서게 되었다.
“이놈들을 모조리 베고 나서도 네가 그리 숨어 있을 수 있을까. 부대주?”
5㎞ 상공에 떠 있던 나를 공간을 격하는 검격으로 격추했던 놈.
그의 칼이 다시금 나를 향해 휘둘러졌다.
서걱!
깡--!
걸치고 있던 경갑은 맥없이 잘려 나갔지만, 그 검격은 여전히 나를 베지 못했다.
아니, 어찌 보면 위력은 아까보다 덜했다.
바람 사냥꾼의 하품 스킬도 해제된 상태이고 무엇보다 놈이 상대해야 할 건 나뿐만이 아니었으니까.
덕분에 나는 놈이 이제껏 상대했던 사람들보다 더욱 가깝게 놈에게 다가설 수 있었다.
“음?”
그것이 의외였을까?
놈이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서걱. 퍼퍼펑!
그 와중에도 손은 쉬지 않고 움직이며 스킬과 마법들을 베어 내고 접근하려는 이들에게 검격을 날렸다.
서걱-캉!
다시 한번 공간을 격하고 나를 가격하는 검격.
하지만 이번에도 놈은 나를 베지 못했다.
“이것 봐라? 너 뭐 하는 새끼니?”
내가 검격을 두 번이나 맞고도 멀쩡한 것이 신기한 걸까?
서늘한 놈의 눈동자가 내게로 향하는 순간.
공동의 천장.
공간 일부가 일그러지며 한 사내가 놈의 머리 위로 벼락같이 떨어져 내렸다.
“흥! 어디서 이딴 허접한 수를!”
카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놈이 기습을 막아낸 순간. 암습자의 입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검 끝이 향하는 곳만 피해라! 어차피 검격의 발현은 검 끝에서 이루어지니까!!”
암습을 한 사내의 말처럼 검격을 피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놈이 휘두르는 칼끝만 피하면 되는 거니까.
문제라면 그 칼질이 너무 빨라, 사내의 말처럼 쉽게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일 뿐.
한데 암습을 한 사내의 얼굴이 어딘가 낯익었다.
‘씨드. 저 남자….’
‘네. 차를 운전했던 그 남자입니다.’
‘하. 결론은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있었던 건가?’
어이가 없었다.
사람을 납치해 놓고 여기서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다니.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적시고 수많은 이들의 죽음이 그 위를 덮었다.
도대체 기적 형님을 납치한 이유는 뭘까?
나를 이곳으로 유인을 하려 했던 것은 알겠는데 그 뒤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어이없어하고 있을 그때.
후우웅-.
공동의 입구에서 밀려 나오는 강대한 기파와 함께 인의 장벽이 허물어졌다.
“으악!”
“물러서!! 검왕이다!”
“X발 투왕!! 이 괴물들이 여긴 왜 온 거야?! 이런 말은 없었잖아!”
콰직! 퍼엉!
“X발 투왕이라니…. 젊은 놈이 아가리에 예의가 없구나.”
휙. 철퍽.
구정철이 주먹에 묻은 피와 뇌수를 털어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 시선에 1천 명에 달하는 인원이 움찔 걸음을 물렸다.
“벌레들이 우글거리는구나. 죽여도 죽여도 어디에서들 이렇게 기어 나오는지. 쯧.”
경멸 어린 시선이 겁에 질려 물러선 이들의 면면을 훑는다.
저벅.
그가 한 걸음 앞으로 걸음을 옮기니 그와 마주하고 있던 이들이 우르르 뒤로 걸음을 물린다.
SSS급 헌터의 위용.
구정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파가 눈에 보일 만큼 선명해지는 순간.
“어디 놀아보자꾸나. 버러지들아.”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꽈아아앙-!
그와 함께 울리는 거대한 폭음.
“크아악-!”
피떡이 되어 널브러진 수십 명의 사람.
어느새 구정철은 피에 굶주린 야수처럼 학살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거 구출 작전이라고요. 영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