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배덕자의 후예들 (1).
안가 내부.
“휘유-.”
이선호는 안가 안에 모여 있는 인원들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대충 봐도 수백은 넘어 보이는 인원들.
강현을 잡기 위해 모인 이들이라고 보기엔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이 새끼들이 전부 예비대라고? 대체 얼마나 모아온 거냐?”
“정확히 1천 명입니다.”
부대주의 보고에 이선호가 눈을 빛냈다.
“잘 아네?”
“제가 모은 이들이니까요.”
“그랬지….”
담담한 얼굴로 대답하는 부대주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이선호의 목소리는 어딘가 끈적하고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부대주…. 우리가 함께한 게 몇 년이지?”
“정확하게 12년 2개월 17일입니다.”
“쫀쫀한 새끼 그걸 날짜까지 세고 자빠졌네. 그래…12년. 참 길었나 보다. 그지?”
스릉.
이선호는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 들었다.
푸른색 도신이 빛을 받아 날카로운 예기를 발했다.
“이렇게 뒤통수를 맞으니까 얼얼하네. 네가 준비한 거냐? 회주가 명령한 거냐?”
이선호의 물음에 부대주의 가면 같은 얼굴에 금이 생겼다.
이제껏 본 적 없던 미소.
“그걸 알면 뭐가 달라집니까?”
“하…. 그래. 달라질 게 없지. 나도 참 미련한 질문을 했네.”
어깨에 메고 있던 이기적을 바닥에 내려놓은 부대주가 가볍게 손짓하자 주변에 있던 인원들이 각자 무기를 빼 들고 모여들었다.
“그래도 한때 우리의 수장이었던 분이다. 깔끔하게 보내드려.”
수많은 사람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는 부대주의 목소리에 이선호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누가 나라 팔아먹은 새끼 후손 아니랄까 봐 뒤통수를 아주 얼얼하게 갈기는구나. X새끼.”
“다 대주께서 잘 가르쳐주신 덕분 아니겠습니까.”
“어이. 부대주 내가 이런 어리바리한 애송이들 믿고 너무 나대지 말라곤 안 가르쳤던가?”
“죄송합니다. 대주가 워낙 사고를 치는 통에 그거 뒷수습하느라 미처 그건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거. 감당할 수 있겠냐?”
이선호의 물음에 부대주는 양손에 짧은 단도 두 개를 쥐며 말했다.
“이 정도쯤이야. 문제 되겠습니까? 회주 입장에서도 매번 사고만 치는 대주보다 내가 더 부리기 나을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지는 부대주.
“그리고 당신은….”
이선호는 자신의 감각 영역에서 부대주의 기척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곤 이를 악물었다.
“…빛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부대주는 타격대인 신멸대보다 암살, 정보수집, 공작에 특화된 신풍대에 어울리는 인재였다. 각성 직업 자체도 그렇고.
한마디로 검사보단 암살자에 가까운 타입이었다.
“직업이 암살자에 가까운 새끼가 빛 운운하는 게 더 난센스 아니냐?”
“….”
하지만 자신이 극구 우겨서 신멸대로 끌고 온 것인데 이리될 줄 몰랐다.
“…작별인사는 이 정도면 적당한 듯싶습니다. 대주. 안녕히 가십시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선호의 발밑에서 쇠사슬이 솟아올라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그리고 쏘아져 오는 스킬들.
서걱- 퍼퍼펑.
가볍게 손을 휘둘러 스킬들을 베어낸 이선호가 비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쉽게 죽어줄 생각은 없는데 부대주.”
자신을 포위한 이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새파란 빛을 뿜어냈다.
“빨리빨리 드루와. 대가리 천 개 따려면 시간 없어. 씹새들아.”
1천 명의 적에게 둘러싸이고도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띠는 남자.
그것이 바로 이선호의 자존(自尊)이었다.
***
놈들의 흔적이 끊긴 동굴 안.
“확실히 여기서 끊겼어.”
발자국은 정확히 한 지점에서 뚝 끊겨 있었다.
마치 공간을 잘라내기라도 한 것처럼.
분명한 것은 마나의 흔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스킬의 효과든 마법의 효과든 미세하게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그것은 분명 마나의 잔흔이었다.
나는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그것을 보며 씨드에게 물었다.
“이게 공간 왜곡 계열 마법을 사용한 흔적이 아닐까?”
당연히 씨드에게도 보일 거라 생각해 던진 물음.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어떤 흔적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령관님.”
씨드는 내 눈엔 뻔히 보이는 마나의 잔흔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거 안 보여? 마나의 잔흔이잖아.”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마나의 잔흔. 보통 고위급 각성자가 스킬을 사용할 때 발생하는 이것은 다른 말로 아우라(Aura)라고도 부른다.
검사, 궁수, 탱커 계열의 각성자들은 이것을 응축시킬 수 있게 되면 기(氣)를 깨달았다고 말하며 더 발전하면 강기(强氣)를 깨달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마나의 잔흔은 광범위 스킬이나 마법의 발현에서도 자주 발생한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것처럼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이게 안 보인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마나의 잔흔은 게임으로 치면 스킬 사용의 이팩트 같은 거다.
화려하지만 영양가 없는 힘의 누수.
그게 씨드에게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의아한 생각에 동굴 내부를 둘러봤다.
뭔가 이질적인 느낌.
자연스럽지 못한 마나의 유동.
그런데 씨드는 그것 또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너에게 뭔가 이상이 생긴 것 아냐?”
요즘 워낙에 겪은 일들이 스펙터클 하다 보니 씨드의 AI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됐다.
하지만 씨드의 대답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관제 시스템의 과부하나 오류는 없습니다. 사령관님.”
그렇다면 답은 둘 중 하나다.
나에게 문제가 있거나 이 공간에 문제가 있거나.
나는 마나의 잔흔이 일렁이는 동굴 내부를 다시 둘러봤다.
순간 공간이 주는 위화감이 다시 몰려들었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돌멩이, 바위틈에 돋아있는 이끼, 모든 게 이상하게 이질적이다.
감각 영역을 확대해 동굴 내부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살펴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이 동굴이 이질적이었던 이유를.
***
“서가야. 왜 여기서 미적거리고 있는 거냐?”
강현이 머물렀던 동굴 앞.
구정철은 동굴 안에서 무언가를 주의 깊게 살피는 서태촌을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서태촌은 친한 척 다가오는 구정철을 어깨로 밀어내고 까칠하게 말했다.
“보면 모르나? 흔적이 이곳에서 끊겼잖아. 이 곰탱이 같은 놈아.”
“허허. 방금 도착했는데 알 리가 있나 이 친구야.”
까칠한 서태촌의 반응을 무던하게 넘긴 구정철의 시선이 동굴 내부를 향했다.
그리고 가볍게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동굴 안에 펼쳐진 것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진법인가?”
“아마도.”
“그런데 왜 부숴버리지 않고?”
“해 봤지.”
서태촌의 대답에 구정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 봤다고? 그런데 이게 멀쩡하단 말이야? 어떻게?”
“아 뭘 그렇게 꼬치꼬치 물어! 정 궁금하면 네놈이 직접 부숴 보던가!”
서태촌은 버럭 화를 내며 동굴 밖으로 나가 버렸다.
“거참. 나이를 먹으면 그 성질 좀 괜찮아질 줄 알았더니 젊을 때보다 더하네. 쩝.”
그렇게 서태촌이 나가고 한사람이 들어와 구정철의 곁에 섰다.
“공간 왜곡진이군요. 욱일회 스타일인가요? 인술을 가미한 술법 형태의 진이네요.”
단지 보는 것만으로 진법을 파악해 버린 사내.
도연우의 예리한 분석에 구정철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 한울 길드장. 자네가 이 진법을 파훼해 볼 텐가? 서가 놈은 뭘 하다가 잘 안 됐는지 신경질을 내더구먼.”
구정철의 말에 도연우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되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가 이 진법을 파훼하면 한울이 마나의 묘약을 얻게 될 텐데요. 나중에 딴말하시면 곤란합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엔 자신감이 묻어 나왔다.
30대 중반에 10대 길드 중 하나인 한울의 길드장.
도연우의 인생에서 승승장구라는 말은 그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말이었다.
‘허허…. 아직 설익었구나.’
그의 인생에서 실패나 패배 따윈 없었을 것이기에 그 자신감이 이해가 가면서도 구정철은 입맛이 썼다.
“자네가 이 진법을 깨부순다면 당연히 화랑은 이번 구출 작전에서 빠질 걸세.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구정철의 확답에 씩 미소를 지어 보인 도연우는 인벤토리를 열어 한 자루의 창을 꺼내 들었다.
은백색의 창신에 새하얀 창날을 가진 창.
신창(神槍).
대대로 한울의 길드장에게 전해지는 신물이었다.
통짜 오리하루콘으로 제련된 창은 마나 전도율을 기하급수적으로 높이고 스킬 발현의 시간을 압도적으로 단축하며.
보석처럼 알알이 박힌 12개의 S급 마나석은 사용자의 스킬 발현을 보조함과 동시에 온갖 삿된 저주를 막는 패시브 스킬 ‘세인트 실드’를 유지한다.
서른 살에 SS급에 올라 길드장 직을 물려받은 도연우는 신창을 마치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다.
은백색의 창신을 애정이 어린 손길로 쓰다듬던 도연우가 곧 창대를 틀어쥐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우우 웅-.
“어스 브레이크(Earth Break).”
공명음을 토해내는 창의 울림과 함께 나직하게 동굴을 울리는 도연우의 목소리.
신창에 각인된 SS급 스킬 어스 브레이크의 발현이었다.
“호오-. 제법.”
옆에서 들려오는 구정철의 목소리. 하지만 도연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찌어찌 SSS급에 올랐다곤 하나 도연우에게 구정철은 다 늙은 늙다리,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일 뿐이다.
그저 전 대통령이기에, 몇십 년은 먼저 산 이들이기에 존중할 뿐 존경은 하지 않는다.
휘우우우웅-!
주변에 마나가 요동치며 창으로 흘러 들어갔다.
바다와 같이 푸른빛을 띠며 떠오른 마나 회로가 응집된 마나를 더욱 크게 부풀렸다.
우우우우우우웅---!
신창이 토해 내는 공명음이 인간의 가청영역을 벗어나고 도연우의 손아귀에 쥐어진 창이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듯 떨린다.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서태촌 길드장도 무언가를 시도했지만 통하지 않았다고 했어.’
‘그 서태촌’이 시도했으나 실패한 일이기에, 이번에 실패하면 두 번째 기회가 온다는 보장이 없기에 도연우는 조금 무리를 했다.
그리고 창이 받아들인 마나가 임계점을 넘는 순간.
스윽.
그는 들고 있던 창을 앞으로 뻗었다.
평범한 찌르기.
느릿하게 뻗어져 나간 창날이 공간의 한 부분에 닿는 순간.
우릉-.
창끝에서 시작된 파문이 번져 나가고.
꽈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와 함께 거대한 힘의 파도가 도연우를 휩쓸었고 그의 신형이 동굴 밖으로 화살처럼 튕겨 날아갔다.
“쩝. 제법이긴 한데 아직 덜 영글었어. 쯧쯧.”
뭔가 아쉬움이 담긴 구정철의 말을 다시 동굴로 돌아온 서태촌이 받았다.
“도진명이가 늦둥이 막내아들이라고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저 모양인 거지. 쯧.”
전대 한울 길드장 도진명.
한때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전우였고 또 한때는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눈 적이었던 사내.
서태촌은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그를 떠올리며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그놈은 후계라도 세웠지. 난….’
아들 내외는 10년 전 세상을 떴고 하나 남은 손녀는 길드의 후계를 이을 생각이 없다.
서태촌에겐 인생의 모든 것이라 봐도 무방할 길드가 자칫 잘못하다간 공중분해 되거나 엄한 놈 아가리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서태촌은 이번 일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유클리안 잎사귀 차.
마시면 10년은 젊어진다는 그 차를 꼭 얻어야 했으니까.
물론 지금도 말짱하지만 10년을 젊어질 수 있다면 다른 후계를 키울 수도 있고 아니면 손녀딸의 마음을 돌리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는 절박한 마음을 담아 칼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또 할 셈이냐?”
“해야지. 때려 부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지 않냐?”
“어휴- 그러게 우리도 마법사계열 각성자 좀 키웠어야 한다니까.”
구정철의 한탄 섞인 말에 서태촌이 불퉁하게 대답했다.
“시간이 없었지 않나.”
그렇다. 시간이 없었다.
검사, 창사, 궁사 등등으로 대변되는 무투계 각성자와 다르게 마법사, 힐러 등으로 대변되는 이능계 각성자의 육성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서태촌과 구정철에겐 그들을 육성할 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들의 삶은 싸움과 싸움으로 얼룩져 있었기에 한가하게 마법사나 육성할 시간이 없었던 거다.
최근 화랑은 마법사 육성에 적극적인 것 같지만 그래 봐야 최고 S급에 불과하다.
서태촌의 길드 싸울아비는 그 S급도 없다.
SS급 주술이자 인술인 ‘공간 거울 결계’를 파훼할 각성자가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SSS급 각성자인 서태촌이 온 힘을 다한다면야 못 부술 것도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구출대상이 결계가 붕괴하는 여파에 휘말리기라도 한다면 낭패다.
그건 ‘구출’이 아니라 ‘유기’가 될 테니까.
그렇기에 서태촌은 딱 결계만 부술 수 있는 힘의 임계점을 찾기 위해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거였다.
들입다 모든 힘을 투사하고 튕겨 날아가 버린 도연우와는 다르게 말이다.
그리고 그 시각.
강현은 공간 거울 결계의 안쪽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