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88화 (88/202)

88. 납치.

인적이 드문 외딴 골목.

기적 형님 집에서부터 이어지던 혈흔은 이곳에서 사라졌다.

이곳에 도착하고 다시 세상이 밝아졌다. 씨드가 필터 효과를 제거한 것이다.

‘바퀴 자국이 있습니다.’

‘여기서 차에 태웠다는 거네.’

범인은 차를 타고 사라졌다. 주변에 찍힌 발자국은 두 개. 한패가 있다는 의미.

‘주변 CCTV 기록을 훑어 차량이 움직인 경로를 추적했습니다. 뒤쫓을까요?’

보고와 함께 눈앞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검은색 고급 승용차.

짙은 선팅으로 내부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 안에 납치범들이 있을 것이다.

으득.

어금니가 갈리며 비명을 토해냈다.

‘놈들과의 거리는?’

‘직선거리로 20㎞입니다. 최고속도로 비행 시 10초 안에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잠깐 고민을 했다.

납치범들을 찾는다면 내가 형님을 구출할 수 있을까?

객관적으로 봐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비현의 요원이라면 최하 B등급 각성자들일 터, 그런 경호원들을 순식간에 참살할 수 있는 강자를 나 혼자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납치범들의 정체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지금 당장 나를 노릴 만한 적대적 인물들 중 B급 이상의 강자들이 포진된 단체라면, 욱일회밖에 없었다.

“강 회장님 실례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먼저 통화 중이던 강 회장에게 양해를 구한 뒤 씨드에게 명령을 내렸다.

‘멀티 비디오콜 준비해 줘.’

‘통화 대상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혼자서 안된다면 힘을 모으면 된다.

욱일회라면 이를 갈고 덤벼들 이들을 나는 적어도 세 명은 알고 있지 않은가.

‘지금 통화 중인 강산호 회장. 구정철 전 대통령. 서태촌 길드 마스터.’

‘연결하겠습니다.’

이윽고 눈앞에 검은색 홀로그램 화면이 떠올랐다.

네 개의 칸으로 분할되어 어둠을 토해 내던 홀로그램 화면에 하나씩 불이 들어오고 이윽고 나를 포함한 네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강현 군. 무슨 일인가?”

통화하던 중에 갑자기 다른 이들과 화상통화를 신청한 내가 이상했던 건지 강 회장은 의문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이고 강 회장님. 오랜만이십니다.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구 전 대통령님이시군요. SSS급이 되신 것 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하하. 이게 다 강 회장님이 좋은 인연을 소개해 주신 덕분 아니겠습니까.”

목소리에 힘이 가득한 구정철. 그리고 노기가 서린 얼굴로 나를 쏘아보는 서태촌의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냐 애송이. 설마 시답지 않게 친목 도모나 하자고 이런 빌어먹을 전화를 건 것은 아닐 테지?”

비디오콜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서태촌의 목소리엔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역시나 까칠한 노인네다.

마치 온몸에 가시가, 아니 칼이 돋아 있는 고슴도치 같다. 비디오콜임에도 홀로그램 화면을 뚫고 그 날카로운 가시가 내 살을 저미는 것 같다.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걸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정중하게 서두를 꺼내는 수밖에 없었다.

급한 마음에 한꺼번에 연결하긴 했지만, 이들 한 명 한 명이 대한민국의 역사에 이름을 새긴 인물들이다.

결코,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이들이란 뜻이었다.

“흠. 급한 일이라. 그래 무슨 일인가?”

강 회장과 환담을 나누던 구정철이 진중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그 또한 이렇게 연락을 한 게 탐탁지 않은 듯 나를 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다.

“제 지인이 납치되었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구하고자 하는 건가? 그렇다면 이런 방식이 아니라 정중하게….”

“지금도 저를 지켜보고 있는 분들이 있다는 걸 압니다. 그분들에게 보고를 받으셨겠지요.”

“큼…. 그건 자네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구정철은 헛기침을 토해내며 변명하려 했고 서태촌은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날 노려봤다.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단지 이번 일이 그동안 감춰 왔던 제 능력 중 일부를 드러냈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는 걸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강 회장을 제외하고 서태촌과 구정철이 이 비디오콜을 받은 이유가 그것일 터였다.

나를 감시하던 이들은 최소 B급에서 A급. 그런 이들이 고작 E급에 불과한 나의 행적을 놓쳤으니 보고가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감시하던 인원들도 황당했을 거다. 갑자기 하늘을 날아서 사라졌으니까.

한마디로 나는 이들이 보낸 감시원들 앞에서 그간 숨겨 왔던 내 능력(씨드의 능력) 중 일부를 공개한 셈이다.

“이런 식으로 연락을 드려 죄송하지만. 제가 연락을 드린 이유는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딱딱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 지인이 납치되었고, 범인은 욱일회인 것 같습니다.”

나는 이들에게 도움을 구걸하지 않는다.

‘씨드 차량 이동 경로와 범인의 인상착의 띄워.’

순간 내 얼굴이 비치던 화면에 지도가 떠오르고 다시 분할된 화면에 차 번화와 함께 기적 형님을 납치한 범인의 인상착의를 띄웠다.

먼 거리에 주차되어있던 차량의 블랙박스를 해킹해 확대한 거라 선명하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무언가를 트렁크에 싣는 장면이었다.

“강 회장님은 아시고 계시겠지만 범인은 보통 놈이 아닙니다. 제 지인을 지키고 있던 비현 요원들이 참살당했으니까요.”

순간 화면 속 구정철과 서태촌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래서 저 혼자의 힘으로는 지인을 구출하는 게 무리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전화를 건 것인가? 조금 전 자네가 했던 말 하곤 앞뒤가 맞지 않는데.”

구정철이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닙니다. 거래를 원하는 거죠.”

나는 딴지를 거는 구정철의 화면을 바라보며 인벤토리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제 지인을 구출하고 범인을 잡아 오시는 분들에게 이것을 드릴 생각입니다.”

“음? 그저 흔한 마나포션으로 보이네만 고작 그런 거로 거래라 말하기엔 어폐가 있을 것 같은데.”

푸른색 액체가 찰랑거리는 포션 병.

언뜻 보기엔 마나 표현과 별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이건 마나 포션이 아니다.

“마나의 묘약입니다.”

“마나의 묘약?”

내 손에 쥐고 있는 푸른색 포션. 나는 마나의 묘약이 잘 보도록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자면 이 마나의 묘약은 단 한 가지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시장통에서 만병통치약을 파는 약장수처럼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바로 각성이죠.”

“허….”

“…뭐?”

“말도 안 되는!!”

내 말이 끝나자 각기 다른 반응을 드러내는 세 사람.

그중 가장 격한 반응을 드러낸 이는 바로 서태촌이었다.

“그리고 이건 제 추측이지만 마나의 묘약은 마나 중독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추측이라 말했지만, 확신에 가까웠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세 사람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흠…. 인위적인 각성을 유도할 수 있다면 당연히 마나 중독을 치료할 수도 있겠지.”

구정철의 중얼거림처럼 각성을 한다면 마나 중독은 당연히 치료되는 거였으니까.

“설마 저 애송이의 말을 믿는 거냐? 진짜라는 증거는 어디 있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의문을 표하는 서태촌. 하지만 이어진 구정철의 말에 서태촌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서가야. 구름 가오리를 잡을 때 네가 애송이라 부르는 저 친구가 너에게 어떤 아이템을 건넸는지 잊지 마라.”

“…….”

내가 그에게 건넸던 바람신의 걸음을 떠올린 모양이다.

“물질적으로 보상은 했지만, 마음의 빚은 아직 남아 있다는 것도. 너나 나나 그 이름 모를 아이템 덕분에 수십 년을 가로막고 있던 벽을 허물 깨달음을 얻지 않았더냐. 허허.”

“끙…. 그럼 넌 저 애송이, 아니 저 친구가 저딴 물건을 가지고 우리를 경쟁시키려 하는 것을 용납할 생각이냐?”

서태촌의 말에 구정철은 콧방귀를 뀌었다.

“킁! 그럼 네놈은 포기하던가. 강 회장님은 저 물건의 가치를 이미 파악하신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조용하던 강 회장이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주변 배경이 나오는 것을 보면 통화를 끝낸 것은 아닌데 아무런 말 없이 자리를 비운 것이다.

“강현 군. 설마 그 묘약이라는 물건 그 한 병이 전부인 건 아니겠지?”

구정철의 물음에 인벤토리를 열어 준비해 두었던 마나의 묘약을 꺼내어 보였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팔 수 있습니다. 물론 우선권은 제 지인을 구해 주시는 분께 있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화면 속의 구정철이 커다란 웃음을 토해냈다.

“하하하! 좋아 좋아. 그럼 나는 이 거래에 응하겠네. 조금만 기다리게, 내가 자네 지인을 구하고 그 범인이라는 놈을 자네 앞에 데려다 놓지.”

말을 마친 구정철의 화면이 꺼졌다. 아무래도 직접 범인을 잡으러 나설 모양이었다.

그렇게 구정철이 사라지자 서태촌은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나를 마주했다.

“이보게. 자네 이름이 강현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서태촌 길드장 님.”

“대체 왜 저 구가 놈에게만 그 신비한 차를 준 것인가?”

“네?”

난데없는 서태촌의 물음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그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와?’

“저 구가 놈이 10년은 젊어졌다고 얼마나 자랑질을 하는지 자네는 모를 걸세.”

“아….”

아마 처음부터 나를 대하는 태도가 삐뚜름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나 보다.

“거기에 목포에서 일을 치를 요량이면 내게 연락을 하면 될 일이지 굳이 저 구가 놈의 사람을 쓴 건가? 젊은 사람이 이리 눈치가 없어서야…. 쯧.”

조금 어이가 없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연락을 한단 말인가 그 당시엔 서태촌의 연락처는 알지도 못했는데.

내가 조금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서태촌은 헛기침하고 말을 이었다.

“큼…. 아직 그 차 남아 있나? 수량이 한정적이라고 들었는데.”

아마도 그가 원하는 것은 ‘유클리안 잎사귀 차’였나 보다.

“네. 남아 있습니다.”

“혹. 내가 자네 지인을 구출하면 보답은 그 차로 받을 수 없겠는가?”

“알겠습니다.”

기적 형님만 구할 수 있다면 그깟 차가 대수일까.

내가 흔쾌히 그의 조건에 응하자 그는 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따 보도록 하지.”

마치 자신의 승리를 장담하는 것처럼 서태촌은 그렇게 말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남은 건 강산호 회장의 저택을 비추는 화면 하나뿐.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통화를 종료하려 할 때였다.

“강현 군. 실례지만 한 사람을 더 초대하겠네.”

그리고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화면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30대 중반의 서글서글한 인상의 잘생긴 미남.

나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강현 씨. 강 회장님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한울의 도연우라고 합니다.”

10대 길드 중 서울을 대표하는 한울 길드의 길드 마스터 도연우.

30대 초반의 나이에 SS급으로 승급해 미래의 SSS급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리었던 사내.

“강 회장님께 전해 들었는데. 재미있는 걸 준비하셨다고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게임에 한울도 참가해도 되겠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조금 기분이 나빴다.

기적 형님을 구출하는 것이 마치 재미있는 게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도연우의 말투가 거북했지만, 이미 마나의 묘약을 경품처럼 걸어 놓은 마당이니 게임이 아니라 말하기도 뭐 했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구출 작전’에 참여하셔도 됩니다.”

내 말을 들은 도연우는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한민국 신랑감 중 1위라더니 그 미소가 싱그럽기 그지없다.

“그럼 이제부터 한울도 이기적 씨 ‘구출 작전’에 참여하겠습니다.”

내가 일부러 구출 작전이라는 단어에 힘을 준 것을 느꼈는지 구출 작전이란 단어에 힘을 줘 말하곤 통화를 종료했다.

“그럼 이따가 보기로 하지. 비현은 한울과 합동으로 구출 작전을 진행하기로 했다네.”

그렇게 강 회장과의 통화까지 끝낸 나는 다시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놈들 위치 아직 파악되지?’

‘네 사령관님. 현재 의정부 방향으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구출하러 간다고 해서 손을 놓고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다.

‘가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허공에 떠올라 있던 내 몸이 빠른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방향은 북쪽.

납치범들이 도주하고 있는 방향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