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86화 (86/202)

86. 레코드 브레이커(record breaker) (2).

청계천 던전이 있는 광장 앞.

퇴근 시간대쯤부터 스마트폰을 든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와 씨! 이거 맵핵이야? 거기 고블린이 있는 걸 어떻게 알고 화살을 날리지?”

누군가는 예지에 가까운 강현의 사격에 놀랐고.

“허…. 방패를 저런 식으로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구나.”

누군가는 거대한 방패를 무기처럼 휘두르며 몬스터를 학살하는 백영웅의 모습에 탄성을 토해냈다.

“함정 따윈 아예 걸리지도 않네. 고블린이 판 함정은 함정도 아니라 이건가?”

빠른 속도로 고블린을 학살하며 앞으로 돌진하는 즈믄나래 파티는 마치 함정이 어디에 설치되어 있는지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발치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툭툭 차 함정을 파훼했다.

“와-. 속도 봐라. 이게 지금 던전에서 사냥하는 건지 100m 달리기를 하는 건지 분간이 안 되네.”

저마다 한 손에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든 채 화면을 주시하고 있는 이들.

“와-! 벌써 보스야?! 던전 입장 15분 35초 만에 보스 사냥을 시작한다고? 사냥속도 실화냐?”

그들은 즈믄나래 파티의 사냥속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와…. 검사 마법사 궁수 연계가 오지네. 고블린 주술사가 불쌍할 정돈데?”

등장과 동시에 순식간에 끝난 보스 사냥. 사냥이 끝나고 방송화면이 꺼졌다.

“16분 57초. 자기들이 세운 기록을 다시 깨네. 얘들 뭐냐?”

그렇게 즈믄나래 파티의 사냥이 끝나자 주변에 분주히 움직이는 이들이 생겼다.

누군가는 한 손에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있었고 다른 누군가는 명함집에서 명함을 꺼내 들고 있었다.

바로 기자와 길드의 스카우터들이었다.

이들이 즈믄나래를 주시한 것은 강현이 기존기록을 1시간 이상 앞당기며 던전을 클리어했을 때였다.

그저 장승처럼 걸음을 옮기는 네 사람과 염동력 같은 능력으로 화살을 날려대는 한 사내.

파티사냥이라 부르기도 아까울 만큼 원맨쇼에 가까운 사냥, 그렇기에 처음엔 그 사내만 눈에 들어왔다.

혼자서 청계던전의 클리어 기록을 한 시간 이상 단축한 사내.

길드의 스카우터들도 기자들도 그 사내만 집중하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사냥.

똑같은 던전에서 이어진 두 번째 사냥은 기자와 스카우터들의 판단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좋지 않은 팀워크를 보여 주며 끝났다.

처음 사냥했던 사내의 기록보다 무려 한 시간이나 늦게.

물론 기존기록보다 단축된 사냥인 것은 맞았다.

1시간 28분 17초.

하지만 첫 방송 때 압도적인 학살을 보여 준 사내의 능력에 비하자면 그다지 의미 없는 기록이었다.

그렇기에 기자들과 스카우터들의 눈은 여전히 한 사내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10개의 화살을 허공에 띄우고 몬스터를 학살하던 사내에게.

하지만.

3번째. 1시간 7분 45초.

4번째. 48분 02초.

5번째. 31분 53초.

사냥이 계속될수록 즈믄나래 파티원은 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움직였다.

마치 그간 보여 줬던 것은 단지 조율에 불과했다는 것처럼.

그리고 6번째 사냥.

이제는 숫제 100m 달리기를 하듯 사냥을 진행하는 즈믄나래 파티는 눈짓과 손짓, 짧은 몇 마디 말로 합을 맞춰 사냥을 진행했고 마침내 사내 혼자 세웠던 기록을 다시 경신했다.

24분 58초.

20여 초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파티의 리더가 혼자 세웠던 기록을 다시 단축한 것이다.

6번째 사냥이 끝났을 때, 온라인으로 지켜보고 있던 스카우트와 기자들이 청계던전으로 향해, 던전 입장 대기 중인 즈믄나래 파티를 멀리서 지켜봤다.

잔뜩 굳은 얼굴로 파티 리더의 말을 듣는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에 그들은 쉽사리 즈믄나래 파티에 다가가지 못했다.

그들의 사냥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사냥시간보다도 긴 청소시간이 끝나고.

다시 7번째 사냥이 시작되었다.

정작 스트리밍을 진행하는 이들은 이제야 몸이 풀렸다는 것처럼 여유로웠지만, 방송을 지켜보는 이들은 잔뜩 긴장했다.

‘어디서 이런 괴물들이.’

다른 누군가가 이들을 채가기 전에 그들이 잡아야 했으니까.

진흙 속에 뒹굴고 있는 다섯 개의 진주.

아니 어쩌면 다이아몬드 원석일지도 모를 그들을 노린 스카우터들의 눈치 싸움이 치열해질 무렵.

더는 단축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기록을 그들은 다시 한번 경신했다.

그것도 기존 자신들이 세웠던 기록을 8분 정도 더 단축한 16분 57초로.

모든 이들이 경악했다.

기자도 스트리밍을 지켜보던 이들도 그리고 길드에서 나온 스카우터들도.

방송이 꺼지고 즈믄나래 파티원들이 던전 입구를 향해 걸어 나오는 그 시간 동안 스카우터들은 자신의 상관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들은 누가 봐도 대어였으니까. 놓치면 안 되는 대어.

지금 신인 중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건 누가 뭐래도 빛의 성기사 신유빈의 파티였다.

하지만 즈믄나래 파티라면 신유빈 파티보다 더욱 주목을 받을 수도 있었다.

힘이 있는 길드가 뒤에서 밀어준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 중에는 도깨비 길드의 스카우터인 임수철도 있었다.

“아. 팀장님!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이 친구 슈퍼신인이에요! 네. 네. 지금 여기에 어디 어디서 나온 줄 아세요? 한울하고 싸울아비 그리고 화랑에서 나왔어요. 저 빼고도 10대 길드 중에 3곳에서 나왔다고요! 네. 네. 되도록 빠르게 지원 부탁드립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어렵사리 팀장을 설득해 지원을 얻어 낸 그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꼰대. 바쁘기는 개뿔. 부장 똥구멍이나 빨고 있을 거면서. 젠장.”

승진을 앞두고 사내 정치질에 열중하고 있을 팀장을 떠올리며 투덜거린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카메라를 들고 기다리는 기자들과 발을 동동 구르며 통화 중인 스카우터들.

그들 중 몇몇은 익히 아는 10대 길드 소속의 스카우터들이고 또 다른 몇몇은 중견 길드 중 수위에 드는 길드의 스카우터들이었다.

“대충 봐도 스무 곳 이상이네.”

이렇게 스카우트 경쟁이 심한데 팀장은 ‘상부의 결재’ 같은 한심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지금 스카우트한 신인들이 10년 20년 후의 길드를 책임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렇게 임수철이 경쟁 길드의 스카우터들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며 소란스럽던 광장에 묵직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저벅저벅.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포탈을 빠져나오는 5개의 인영.

“…나왔다.”

즈믄나래 파티였다.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터져 나왔지만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도 길드의 스카우터들도 던전을 빠져나온 그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헉. 헉….”

폐를 토해 낼 듯 몰아쉬는 거친 숨소리.

흘러내려 바닥을 적시는 땀방울.

그리고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공기.

그와 함께 그들이 흘린 땀방울이 기화되어 희뿌연 수증기를 만들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꿀꺽.

‘저게 어떻게 E급 헌터들이야….’

마른침을 목울대 너머로 넘기는 임수철의 생각처럼 즈믄나래 파티원들에게서 강렬한 투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분명 거친 숨을 내쉴 만큼 지쳐 보였지만 쉽사리 다가설 수 없을 강렬한 투기가.

그리고 그들의 앞에선 한 남자.

씨익.

강현은 광장에 몰려있는 인파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강현이 계획했던 것처럼 즈믄나래 파티의 파격적인 데뷔였다.

***

“이렇게 시선을 끌어보시겠다? 새끼 머리 좀 쓰네….”

이선호는 홀로그램 화면 가득 떠올라있는 강현의 얼굴을 보며 쓰게 입맛을 다셨다.

“쩝. 이렇게 되면 회주 말처럼 정말 주변인들부터 조져야 한다는 건데. 하…. 변화구는 내 스타일이 아닌데 말이야.”

“어떻게 할까요. 대주님?”

곁에 있던 부대주의 물음에 이선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잠입, 암살, 정보공작과는 거리가 먼 타격대의 역할을 했던 신멸대의 대주였던 이선호였기에 그의 머릿속에서도 이렇다 할 수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라고 별수가 있겠냐? 니기럴 회주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일단 저 새끼 주변인 중에 가장 손대기 쉬운 놈이 누구야?”

이선호의 물음에 부대주는 품에서 한 뭉치의 서류를 꺼내 대주에게 건네줬다.

“회에서 전달된 정보대로라면 이자가 강현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합니다.”

“이기적? 이름이 뭐 이따위야. 나이는 마흔다섯…. 아재네?”

“네. 강현의 전 직장상사였고 현재는 강현과 형·동생을 할 정도로 친분이 깊은 것으로 파악되었답니다.”

부대주의 말을 들으며 서류를 훑어 내린 이선호는 A4 용지 네 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위로 던졌다.

“그래? 생긴 거하고 다르게 사람 잘 챙기나 보네. 흠…. 그래서 이 아재를 끌고 오면 강현이 딸려 올 거란 말이지?”

“네. 하지만 조금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어제 그 인물이 강현과 함께 대현의 강산호 전 회장을 만났습니다. 어쩌면 비현에서 보호 중일지도 모릅니다.”

부대주의 말에 이선호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헝클었다.

“아-악! 씨바! 곧 죽어 관에 들어가야 할 노인네가 왜 여기저기 안 끼는 데가 없어?!”

파라락.

그 순간 좀 전에 이선호가 집어 던졌던 보고서가 바람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번쩍.

그것을 본 이선호의 허리춤에서 빛살과 같은 섬광이 뿜어져 나와 보고서를 가르고 지나갔다.

샥.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두 조각으로 나뉘어 떨어지던 보고서가 이내 불어온 바람에 수천 조각으로 갈라져 허공을 부유했다.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꽃가루처럼.

날카롭게 날이 선 일본도.

“하…. 이런 건 암혈이 잘하는데. 안 하던 짓 하려니 좀이 쑤시네. 씨바.”

암혈이 무라마사라 이름을 붙였던 칼과 놀랍도록 닮은 그 칼의 끝에는 보고서에 인쇄되어 있던 이기적의 사진이 꽂혀 있었다.

“일단. 이 아재 잡으러 가자.”

‘흘끗’ 칼끝에 꽂힌 사진을 쳐다본 이선호가 가볍게 손을 털자 칼끝에 꽂혀 있던 사진이 잘려나가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스릉.

칼을 회수한 이선호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는 몇 걸음 못가 등 뒤에서 들려온 물음에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작전은….”

이 선호는 피식 웃었다.

“이거 왜 이래? 내 스타일 알면서. 지키는 놈 있으면 그냥 다 쳐 죽이고 데려오면 되는 거지. 뭐 힘들 거 있어?”

“하지만. 회주의 명령은….”

“그래. 칼은 생각 따위 하지 말라 했지. 시키면 시키는 대로…. 개처럼 말이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는 이선호. 순간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살기에 부대주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렇다고. 내가 회주의 개는 아니잖아?”

“제 말은 그런 뜻이….”

“알아. 형이 장난 좀 친 거야. 우리 부대주 쫄았어? 하하.”

순식간에 살기를 흩트린 이선호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살기를 드러냈던 것이 진짜 장난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부대주는 알고 있었다. 지금이 가장 위험하다는 걸.

“아닙니다. 제가 괜한 걱정에 대주님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죄송합니다.”

“에이-. 우리 부대주 또 이렇게 진지하고 그런다. 정말 장난이라니까? 형이 그런 거 가지고 화내는 사람 아니잖아. 안 그래?”

그리고 이선호가 사소한 감정 하나까지 속에 담아 두고 복수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부대주는 잊지 않았다.

“네. 그렇습니다. 대주님.”

“그래. 우리 부대주는 이 형만 믿고 따라오면 돼. 형이 다 알아서 해 줄 테니까. 하하.”

겉으론 호탕하게 상남자같이 웃음을 터트리는 이선호. 하지만 그가 대한민국 최고의 좀생이라는 것을.

“네. 대주님.”

“자. 그럼 가자-.”

싱긋 웃으며 몸을 돌린 이선호는 옥상을 빠져나갔다.

저 멀리 청계던전이 내려다보이는 어느 빌딩의 옥상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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