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뇌신일체(雷身一體) (2).
대현궁.
경기도 이천의 외곽에 자리한 대현 그룹의 왕회장 강산호가 머무르는 저택의 별칭이다.
건축비만 3천억이 들었다는 이 저택은 그만큼 어마어마한 넓이를 자랑한다.
외곽의 담장이 성곽을 연상케 할 만큼 말이다.
저택의 정문 앞.
“허어어-.”
성문과도 같이 거대한 저택의 정문과 연결된 높디높은 담장.
그 자체로 하나의 성과 같은 강산호의 저택이니 이기적이 한숨과도 같은 탄성을 토해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노년의 신사가 정중하게 강현과 이기적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강현 님.”
“오랜만에 뵙네요. 황 집사님. 건강은 괜찮아지셨어요?”
강현의 물음에 황 집사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강현의 말은 황 집사가 비현의 수장으로 전투에 참여했음을 알면서도 비밀로 하겠다는 의미였으니까.
“걱정해 주신 덕분에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시죠.”
황 집사는 강현과 함께 온 이기적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일체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전에 강현을 조사할 때 그 주변인인 이기적에 대해서도 조사가 끝났기 때문이다.
극히 평범한 직장인.
그나마 특이점이라면 대머리에서 장발이 됐다는 것과 25년 동안 헌터 협회에서 근무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황 집사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이기적의 걸음걸이는 마치 관절에 기름칠이 안 된 깡통 로봇 같았다.
삐걱. 삐걱.
그가 걸을 때마다 내는 관절의 마찰음이 강현과 황 집사의 귓가에 울렸다.
***
달그락.
맑은 차향이 감도는 대청마루 위.
나는 기적 형님과 함께 강 회장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그래. 새로운 사업을 하겠다고?”
“네. 회장님.”
“그래도 사외이사직은 받아들였으면 싶군. 비록 경영에는 참여할 수 없다곤 하지만 대현 그룹의 사외이사라는 명함은 그만한 힘을 가지니까.”
지긋하게 내 눈동자를 바라보는 호랑이 같은 눈.
저 눈동자 깊은 곳에 어떤 생각을 담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대외적으로 그룹경영에서 물러났다고 천명했던 강 회장이 추진한 일이니 여기서 내가 말을 번복하면 그의 면이 서지 않겠지.’
레벨업을 하며 지혜 스탯을 찍은 덕분인지 요즘 들어 생각이 조금은 깊어진 것 같다.
하루하루를 살기에 급급했던 때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상대의 말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걸 보면.
“당연한 말씀입니다. 저 또한 아직 대현의 그늘이 필요합니다. 회장님.”
스파이캠과 다차원송수신기의 지분과 특허권을 넘겨주고 얻은 자리다.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이용할 생각이다.
“대현전자 본사에 자네 방을 하나 만들어 두었네. 명색이 사외이사이니 매일같이 출근하지는 않더라도 얼굴 한 번쯤은 비추게.”
“네 회장님.”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건지 강 회장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있었다.
아마도 이걸로 나와 대현의 관계가 더욱 끈끈해졌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래. 이분이 이번에 함께 사업을 할 분이신가 보군.”
“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회장님! 이기적이라고 합니다.”
훈련소를 마치고 막 자대배치를 받은 신병이 이럴까?
기적 형님의 목소리가 대청마루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허허. 기운이 좋은 분이시구먼, 그래. 강현 군 형님이시라고요.”
“네, 넵!”
여전히 긴장한 얼굴로 말을 더듬는 기적 형님을 대신해 내가 말문을 열었다.
“이 형님이 앞으로 진행될 경매사업을 총괄할 겁니다. 저는 경매에 올릴 아이템을 만들 거고요.”
강 회장도 내가 메이커가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선친인 강기영옹의 유품도 훈민정음 해례본도 메이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물건들이니까.
“흠…. 그렇군. 그럼 경매에 올릴 아이템의 테스트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건….”
순간 강 회장의 호랑이 같은 눈이 내 눈동자를 직시했다.
“당연히 대현 그룹에서 진행할 생각입니다. 저도 이젠 대현의 사외이사니까요.”
“허허. 그렇군.”
만족스러운 웃음.
“네. 그렇습니다.”
강 회장을 만나러 오기 전까지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강 회장과 대화를 나누며 나는 계획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대현 같은 대기업엔 신규 개발한 아이템을 테스트하는 부서가 따로 있다.
일전에 강 회장이 유클리안 잎사귀 차와 발모제를 테스트한 연구소가 바로 그곳이었다.
이왕 대현의 그늘에 머무르기로 한 이상 나는 그것을 철저히 이용할 생각이다.
그 아이템들을 테스트하며 대현도 연구 결과를 손에 쥐게 될 테지만, 그걸로 대현이 뭘 만들든 그건 대현의 몫이다.
물론 특허권은 당연히 내 것이고.
쌍방이 손해를 보지 않는 거래.
그걸 알기에 강 회장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것이다.
“사업을 하다 보면 이것저것 걸리는 것들이 있을걸세. 어지간한 건 자네 힘으로 치울 수 있겠지만 만일 자네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생긴다면 한 번쯤은 내 이름을 팔아도 좋네.”
대현 그룹 왕회장 강산호.
그 이름이 가진 무게는 감히 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겁다.
“그 말씀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건 내가 아이템 테스트를 대현에 맡기는 것에 대한 보답일 터. 나는 거절 하지 않고 강산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허허. 오늘따라 차향이 좋군. 어서 들게.”
한 마리 호랑이에서 다시 옆집 할아버지로 돌아온 강 회장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차를 권했고.
“앗! 뜨거!”
기적 형님은 그걸 코로 마셨다.
***
남한산 F급 던전.
강 회장과의 만남을 끝낸 나는 기적 형님과 헤어졌다.
원래는 사업 이야기를 더 할 생각이었지만 기적 형님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기적 형님에겐 강 회장과의 만남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나보다. 하여튼 그렇게 기적 형님과 헤어진 나는 남한산에 왔다.
구름 가오리와의 싸움 중간에 뽑은 110번째 황금색 아이템.
[아이템: 스팩업 내비게이터]
사용자의 현재 상태를 기반으로 스팩업에 필요한 장소를 안내해 준다는 스팩업 내비게이터.
이 황금색 아이템이 내가 스팩업을 하기 위해 가야 할 곳이 남한산 F급 던전이라고 콕 찍어 안내하고 있었다.
이미 E급을 넘어선 내게 왜 F급 던전을 안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던전을 들어가 보면 알게 될 터.
헌터들 사이에 사냥 열풍이 불고 있다는 기적 형님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예약이 조금 밀려 있었지만, 기다리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기소에서 던전 가이드라도 읽고 있으면 되니까.
E급을 넘어 D급이 확실시되는 내가 고작 F급 던전에서 죽을 일은 없겠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스팩업 내비게이터가 가리킨 곳이니, 내게 도움이 되는 이벤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고. 이미 D급이 된 내게 도움이 된다는 건 그만한 위험이 있다는 뜻이니까.
‘어디 보자…. 씨드. 남한산 던전 정보 업데이트된 거 있어?’
던전 가이드는 헌터 협회에서 발행하는 D~F급 던전의 공략 정보를 담은 헌팅 잡지다.
협회 소속의 던전 청소부로 일할 때는 매월 사서 억지로라도 외워야 했지만, 협회를 그만둔 뒤론 구매한 적이 없으니 새로운 정보가 있을지도 몰랐다.
이쪽이 내가 담당하던 구역이 아니기도 했고.
‘네. 사령관님. 설명해드릴까요?’
‘응 부탁해.’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씨드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헌터 와치를 조작해 하나의 화면을 출력했다.
‘남한산 F급 던전, 속칭 복불복 던전으로 유명합니다. 주요 몬스터는 미믹이라고 불리는 상자형 몬스터이며 드랍되는 아이템은 말씀드린 것처럼 복불복입니다.’
여기까지는 나도 알고 있는 정보였다.
던전에 나오는 몬스터 미믹을 잡으면 미믹의 사체가 사라지고 상자가 등장하는데. 이 상자를 열어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어떤 파티는 상자 안에 가득 찬 마나석과 아이템을 얻기도 하고 어떤 파티는 수십 마리의 미믹을 잡고서도 마나석 하나 얻지 못하고 나오기도 한다.
그게 끝이아니다.
가끔은 상자를 열었을 때 함정이 발동되기도 하는데 이 또한 랜덤이다.
그래서 이 던전은 헌터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미믹의 사체가 사라지며 상자가 생성되기에 부산물이라 부를 것도 없을뿐더러 열 개 파티가 사냥하면 아홉 개 파티는 꽝에 당첨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포션 값 회수도 안 될 확률이 90%인 던전인데 누가 헌팅을 하려 할까?
그래서 사냥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사냥한다고 하더라도 협회 소속의 파티가 한 달에 한 번 던전 브레이크를 막기 위해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근래에 불기 시작한 헌터들의 사냥 열풍만 아니라면 예약할 필요도 없는 던전이라는 뜻이다.
미믹이 아이템은 꽝이더라도 사냥하면 마나는 흡수할 수 있으니까.
‘최근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씨드가 하나의 영상을 출력했다.
낡은 궤짝같이 생긴 몬스터. 미믹.
뚜껑이 열리며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나고 가시가 달린 촉수와 같은 혓바닥이 채찍처럼 공격해 온다.
탱커가 막고, 검사가 튕겨 나온 혀를 자르자 뒤에서 불화살이 날아가 상자를 박살을 낸다.
그러자 시체가 사라지고 등장한 낡은 상자. 랜덤 박스다.
카메라를 든 파티원들이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못해도 100개는 될듯한 F급 마나석.
복불복 중에 복에 당첨된 것이다.
‘이 영상이 올라오고 나서 남한산 F급 던전의 예약이 급증했습니다.’
대현 전자가 만든 MC 캠으로 찍은 영상일 터다.
화질이 스파이캠 정도는 아니지만, 홀로그램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꽤 매끄러웠다.
그렇게 씨드와 함께 던전 정보를 정리하고 있을 무렵.
“강현 씨 파티! 입장하실 차례입니다!”
게이트 키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믹 시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던전을 청소할 필요가 없어서인지 확실히 순환이 빠르다.
***
쉬쉬 쉭!
콰과광! 펑! 콰직!
미믹이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허공을 유영하며 경계 중이던 샤이닝 에로우가 날아가 박살을 냈다.
이제는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혼자서 몬스터를 처리하는 씨드.
과연 능동형 인공지능다웠다.
“그나저나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거야?”
벌써 던전을 들어온 지 30분. 지하 감옥형 던전답게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비게이터가 출력하는 목적지는 오로지 직진.
“이리 가면 보스 룸 아닌가?”
“계속 직진할 시 10분 이내에 보스 룸 앞에 도달합니다.”
어느새 중력제어로 상자까지 오픈한 씨드가 내 말을 받았다.
“보스 방에 뭔가 다른 게 있는 건가?”
“현재 보스 룸에는 보스 몬스터인 청동 미믹을 제외한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던전 가이드에 기록돼 있는 정보와 다를 게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런데도 내비게이터는 여전히 직진하라고 표시하고 있다.
“뭐 가보면 알겠지.”
10분 후.
보스 방 입구에 도착한 나는 쇠창살로 이루어진 보스룸 문을 바라봤다.
누가 지하 감옥형 던전 아니랄까 봐 F급 던전 주제에 분위기가 음산하기 그지없다.
“아직도 별다른 변화 없지?”
“네. 청동 미믹도 던전 코어도 아무런 변화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보스 방을 가리키는 내비게이터의 화살표를 노려보며 보스룸의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철컹.
낡은 쇠창살 문이 내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던전을 울리고.
저벅.
보스룸 안으로 들어선 나는 주변을 살폈다.
3평 남짓한 작은 공간.
벽돌로 이루어진 벽, 그리고 바닥과 천장.
방 한가운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청동 미믹과 구석에서 빛을 내는 던전 코어.
씨드의 말대로 특이한 점은 없었다.
철커덩.
등 뒤에서 보스룸 문이 닫히는 소리가 음산하다.
끼에에엑.
그와 함께 상자 뚜껑과 같은 입을 벌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청동 미믹.
쉬-.
“멈춰 씨드.”
내게 공격 의사를 드러내는 청동 미믹을 향해 쏘아져 나가려는 샤이닝 에로우를 급하게 멈춰 세웠다.
촤라락!
요란한 소음과 함께 뻗어져 오는 놈의 혓바닥.
감각 영역을 확장할 필요도 없는 느릿한 그 공격을 여유롭게 피한 나는 곧 알 수 있었다.
내비게이터가 가리키는 곳이 어딘지를.
“입속?”
스팩업 내비게이터가 가리키는 방향. 그곳에는 연신 채찍과 같은 혓바닥을 휘둘러오는 청동 미믹의 아가리가 자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