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77화 (77/202)

77. 새로운 사업.

강남. 카페 ‘별 박스.’

뜨거운 여름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 앉은 나는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오래간만에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구름 가오리 사체 정리에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사체가 워낙 거대하기도 했고 최초로 잡은 SSS급 몬스터인 탓에 국가 기관이나 길드와 기업의 수많은 연구단체에서 사체를 해체하는 것부터 하나하나 기록하기를 원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원래는 사체의 소유권이 있는 화랑과 싸울아비 그리고 군부대와 정부 기관만 참석해 해체하는 게 맞는 것이었으나 수많은 길드와 기업에서 해체과정을 참관하기를 희망했고 소정의 참가비를 받고 입회를 허락했다.

나한테는 나쁠 게 없었다.

참가비도 지분비율대로 분배하기로 했으니까.

물론 그동안 나는 뜻하지 않은 여유시간을 가지게 되었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 내 계좌엔 상당량의 자금이 들어왔다.

‘덕분에 새 사업 아이템을 구상할 수 있게 되었지.’

구름 가오리 사체 덕에 인파가 몰려 전용 던전도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고(다행히 전용 던전의 입구는 라그라주에 먹히지 않았다.) 이해찬과는 파티원을 충원한 뒤 다시 던전을 돌기로 했으니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 때문에 인벤토리를 정리할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다.

그동안 아공간을 청소하며 얻은 아이템들과 구름 가오리를 처치하는 과정에서 뽑기로 뽑은 수많은 아이템.

그중 몇몇은 내게 필요했지만, 대다수는 필요가 없는 아이템들이다.

지구상에는 없는 다른 세계의 신비가 머금어진 아이템들, 탈모제나 발모제, 활성단처럼 시스템 상점창에서 구할 수 있는 아이템들이라면 모르겠지만 E급보다 등급이 높은 아이템들이라면 상점창에서 구할 수도 팔 수도 없기에 애물단지나 다름없다.

콜팡에 제품등록도 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래서 한가지 사업 아이템을 떠올렸다.

‘경매장을 여는 거지.’

콜팡의 경매장이 아닌 내가 경매장을 만드는 거다.

콜팡의 경매장은 검증된, 그리고 수요가 그만큼 보증된 제품만 입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경매장을 이용해 아이템을 처분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기엔 아이템의 출처를 밝혀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내 인벤토리에는 지금 내가 사냥을 하는 던전에서 얻을 수 없는 아이템들이 수두룩하니까.

그게 내가 강남까지 온 이유였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면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쪼로록. 잘그락.

얼음이 섞인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비워냈을 무렵.

딸랑-딸랑-.

입구에 달린 종이 울리고 열린 문 사이로 한 사내가 들어섰다.

찰랑 걸리는 긴 말총머리를 휘날리며 내게 걸어오는 남자.

기적 형님이었다.

“아 미안. 오래 기다렸지 현아.”

“아니요. 저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나는 미리 주문해 둬서 컵 표면에 송골송골 이슬이 맺힌 커피를 기적 형님 앞으로 밀며 말을 이었다.

“요즘 바쁘세요?”

“어 바쁘지. 말도 못 하게 바빠. 갑자기 싸울아비랑 화랑에서 구름 가오리를 잡아 버리는 통에 일거리가 말도 못 하게 늘었어. 거기다 두 분이 모두 사이좋게 SSS등급이 되어 버리니 꿈과 희망에 부푼 헌터 유망주들이 하루에 두 탕 세 탕을 뛰어 대는 통에 팀원들이 아주 곡소리가 난다.”

역시 기적 형님. 한 번 입을 열면 쉽게 멈추질 않는다.

“누가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F급하고 E급 헌터들 사이에서 버스라는 게 유행하나 보더라고 위 등급으로 승급하기 전 헌터들이 승급 전에 장비값을 모을 겸 뉴비들을 데리고 던전을 도는 모양이던데 덕분에 우리 애들만 죽어 나가지. 던전 클리어 타임도 점점 짧아지는 추세라 중간에 정비하고 쉬는 시간도 줄어드는 모양이야. 버스라는 건 게임 안에서나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참 요지경이다. 그치?”

기적 형님의 말에 나는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그 버스를 처음 시작한 사람이 아무래도 나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야? 커피 마시자고 연락을 다 하고. 요즘 사업하느라 바쁜 거 아니었어?”

참고로 말하자면 기적 형님은 아직 내가 던전에서 사냥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걱정하실까 봐 차마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 때문에 만나자고 말씀을 드린 거예요.”

“응? 나한테? 사업문제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는데. 혹시 신상 발모제 모델이 필요해? 아니지. 그거 이미 불티나게 팔리고 있잖아. 와- 나 경매 낙찰가 보고 깜짝 놀랐잖아. 한 병당 낙찰가가 거의 3억 중후반이던데? 맞다. 그거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스타일링도 된다며. 어떻게 그런 걸 만들 생각을…. 이렇게 인생이 피려고 그동안 그렇게 고생했나 보다. 정말….”

한마디를 던지면 스무 마디가 되어 돌아온다.

‘이게 기적 형님이지.’

나는 끊임없이 이어지려는 기적 형님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언뜻 보면 예의 없는 행동이지만 정말 이렇게 하지 않으면 형님이 온종일 자기가 묻고 답하기를 반복할 걸 알기에 어쩔 수 없었다.

“형님. 헌터 협회 언제까지 다니실 거예요?”

“…널 보면 대견. 응?”

“팀장 다신지도 벌써 10년이잖아요. 이제 힘든 일 그만하시고 저랑 같이 일 하나 해요. 형님.”

“…….”

내 제안이 갑작스러웠던 건지 형님은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제가 요즘 새로운 사업을 구상 중인데 형님 도움이 필요해요.”

나는 그런 기적 형님에게 내가 구상 중인 경매장 사업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유튜브를 이용하겠다고?”

“네. 유튜브로 실시간 경매를 진행하는 거죠.”

“그럼 제품에 대한 보증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 거지?”

나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형님에게 물었다.

“보증도 해야 하는 거였어요?”

“에? 그럼 보증도 검증도 안 된 아이템을 팔겠다는 거야? 그것도 경매 방식으로?”

“그게 문제가 될까요? 실제로 던전에서 몬스터들에게 얻은 아이템들도 검증 없이 시중에 유통되잖아요.”

“당연히 문제가 있지. 던전에서 얻은 아이템들은 각성자 스토어에서 테스트를 거치고 판매되는 거잖아. 그게 하나의 품질보증서 같은 역할을 하는 거고…….”

기적 형님의 말이 이어질수록 나는 기적 형님이 이번 사업의 적임자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일단 검증기관에 위탁해서…. 그리고 기존 경매 업체들과 업무 협약 같은 걸 맺어서…. 던전 출토 아이템이면 컬렉터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요소를 부각해서 홍보를….”

처음 내가 생각했던 기적 형님의 포지션은 경매 진행자였다.

기존의 경매와는 다른 진행방식을 구상했었으니까.

저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속에 제품에 대한 정보를 녹여 넣을 수만 있다면 경매 참가자들의 혼을 쏙 빼놓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

하지만 저렇게 사업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기적 형님을 보니. 사업 파트너로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씨드와 함께 조사하고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형님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강산호 회장의 도움을 받는다면 아무런 잡음 없이 처리할 수 있는 문제들, 하지만 난 이번에 그러지 않기로 했다.

저번에 배우지 않았던가.

거래는 쌍방 중 누구도 손해를 봤다고 느끼면 안 되는 거라고 어느 한쪽이 손해를 봤다고 느끼면 신뢰 관계가 허물어진다고.

마치 지금 내가 구정철 전 대통령에게 느끼는 감정처럼 말이다.

저번에 준다던 지분이나 특허권에 관한 이야기도 아직 감감무소식이니 강 회장에게 새로운 사업 이야기를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던 것도 있고.

“역시 형님밖에 없네요.”

“응??”

기적 형님밖에 없었다. 내가 믿고 사업을 맡길 수 있는 사람. 지금 현재 그 누구보다도 나와 단단한 신뢰 관계가 구축된 사람은 기적 형님이니까.

“저랑 같이하시죠. 이번 사업.”

“…정말? 농담이 아니었어?”

“제가 형님께 그런 농담을 할 놈은 아니죠.”

“하긴. 그건 그렇지…. 그럼 고민 좀 해봐도 될까?”

“얼마든지요. 형님 말씀 들어 보니까 가볍게 생각하고 시작할 사업은 아닌 듯싶네요. 충분히 고민하시고 연락해 주세요.”

“근데 내가 말한 거 전부 하려면 자금이 만만치 않게 들 텐데 여유가 있겠어? 물론 네가 요즘 돈을 많이 버는 건 알고 있는데….”

기적 형님은 걱정이 한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런 점이 형님의 매력이다. 저건 인간적으로 나라는 사람을 걱정해 주는 눈빛이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형님.”

내 확신 어린 목소리에 기적 형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원래 이런 장담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나저나 구름 가오리 경매가가 얼마나 나올지가 문제였다.

‘최초의 SSS급 몬스턴데 그래도 1조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오늘 저녁 대대적인 공개 경매가 있을 예정이다.

공중파 TV에서도 경매를 중계할 예정이라니 구름 가오리를 사냥한 일이 큰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소문으로는 저 아랍의 석유 왕국들도 구름 가오리의 부산물 중 일부를 탐을 내고 있다는데 높은 가격이 나왔으면 좋겠다.

***

구름 가오리의 사체가 사라졌음에도 집 근처는 여전히 몰려드는 인파로 바글바글했다.

집으로 가는 길목에는 다양한 종류의 노점상들이 늘어서서 각양각색의 음식들을 판매하고 있었고 수많은 사람이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게 다 구름 가오리와 라그라주 때문이었다.

가장 큰 나무의 높이는 2㎞ 가장 작은 나무의 높이도 1㎞가 넘는 100그루의 나무들이 동네 이곳저곳에서 하늘을 향에 우뚝 솟아 있으니 일종의 관광지가 돼 버린 것이었다.

거기에 세계 최초로 재해급 몬스터가 죽은 곳이니.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다.’

구름 가오리를 해체하는 와중에 대현건설에서 나와 집주변으로 펜스를 설치해 주었기에 함부로 침입하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그렇다 해도 주변에 너무 사람이 많으니 전용 던전에 들어가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일단 지금도 마당에 자라난 웅장한 라그라주를 구경하기 위해 수십 명의 사람이 펜스 근처에서 기웃거리는 상황이었으니까.

쯧.

짧게 혀를 찬 나는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지난 며칠간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청심원에서 신세를 져야 할 것 같다.

그때였다.

‘사령관님. 마나 응집이 느껴집니다.’

‘응?’

갑작스럽게 들려온 씨드의 뇌파 통신에 나는 옮기던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마나 응집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라그라주의 꼭대기에서 마나 응집이 느껴집니다.’

씨드의 말에 감각 영역을 확장해볼까 했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감각 영역을 확장한다고 해봐야 내 몸을 중심으로 반경 1m에 불과한지라 라그라주의 꼭대기에서 느껴진다는 마나의 응집을 감지해 낼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가서 그 이유가 뭔지 확인 좀 부탁해. 씨드.’

그래서 씨드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일단 마나가 응집되는 이유가 뭔지를 알아야 올라가든 말든 할 게 아닌가.

라그라주의 꼭대기를 올려다봤다.

무성한 나뭇잎에 가려져 그 끝이 보이지도 않는다.

***

‘과일.’

마나 응집의 정체를 확인한 씨드는 말했다. 그 정체가 과일이라고.

본격적인 여름이 한창인 7월 말.

덕분에 나는 또다시 나무를 타고 있었다. 그것도 저번과는 다르게 2㎞나 되는 높이의 나무를 내 자력으로 올라가야 했다.

헉헉.

덕분에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이마와 등허리엔 땀이 한가득 흘러내리는 상황.

그나마 다행인 점은 무성하게 자란 잎이 햇빛을 어느 정도 막아 줘서 그다지 덥지 않다는 것이고 혹여 떨어지더라도 크게 다칠 염려는 없다는 점이다.

올라가는 건 몰라도 내려가는 ‘바람 사냥꾼의 하품’이 있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몸을 옮기는 게 조심스러웠다.

혹여 발을 잘못 디뎌 떨어지기라도 하면 다시 올라와야 하는데 이 더위에 이만한 높이의 나무를 다시 올라오는 건 아무리 내가 각성자라도 힘들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얼마쯤 더 나무를 타고 올라갔을까.

“이쪽입니다. 사령관님.”

이제는 나뭇잎이 만들어 주던 그늘도 사라지는 지점.

씨드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나는 볼 수 있었다.

새하얀 뇌기를 뿜어내는 눈이 시리도록 푸른 과일.

파지지직.

주변으로 새하얀 스파크를 뿜어내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과일의 이름은 뇌실(雷實).

바로 전뢰수(電雷樹) 라그라주의 열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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