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장마 (6).
쉬쉬 쉭!
내리는 빗방울을 꿰뚫고 쏘아져 나가는 샤이닝 에로우.
그 표적인 암혈은 서태촌이 쏘아 보낸 스킬을 막아내고 있었기에 분명 쉽게 막을 수 없는 기습이었다.
하지만 놈의 눈동자가 내게 향하는 순간.
오싹.
벼락에 맞은 것처럼 온몸의 털들이 바짝 곤두섰다.
알 수 없는 위화감.
쿠르르릉-!
때마침 머리 위에서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사령관님 피하십시오!’
증폭된 감각의 영역으로 무언가가 나를 덮쳐오는 것이 느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발밑에서 솟아올랐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으리라.
“헉!”
발밑에서 솟아올라 순식간에 나를 집어삼킨 핏물의 해일.
꾸르륵.
그 핏물 속에 갇힌 나를 바라보는 암혈의 입이 움직였다.
‘잡았다.’
놈은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
서태촌과 싸움을 하면서도 암혈은 강현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왜 저곳에 있는 거지?’
강현을 지켜보던 그의 머릿속에 든 한 가지 의문.
지척이나 다를 바 없는 가까운 거리에서 서태촌과 자신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강현은 자리를 지킨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암혈을 막았다가 살아남은 각성자들은 이미 멀찌감치 자리를 피했음에도 말이다.
‘왜 피하지 않는 거지? 설마 그 단단한 몸뚱어리를 믿고 있는 건가?’
주변을 날아다니는 하루살이 같은 것들이 신경에 거슬리긴 했지만 그뿐.
처음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단단한 몸을 믿고 버티는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 단단한 몸도 자신의 마나 소드를 막지는 못했으니까.
‘왜지?’
마치 무언가를 지키고 있는 것 같은.
이해할 수 없는 강현의 행동에 의구심을 느끼는 것도 잠깐. 암혈은 곧 한 가지 특이점을 발견했다.
찰나에 불과하지만, 강현의 시선이 특정한 곳으로 향하는 것을 느낀 것이다.
‘저기에. 뭔가가 있다.’
암혈은 강현의 시선이 향한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그가 지키고자 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샤이닝 에로우가 자신을 겨누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했다.
그리고.
쉬쉬 쉭!
하늘이 구멍이 뚫린 것처럼 내리는 빗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리는 소성과 함께 날아오는 투명한 무언가.
자신에게 날아오는 샤이닝 에로우를 감지한 암혈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잡았다.”
강현을 지키고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강현의 발밑에서 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터져 나와 해일처럼 강현을 덮쳐갔다.
혈옥(血獄: 피의 감옥)
붉은 피와 투명한 빗물이 섞이지 않은 채 거대한 구슬이 되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곳에 갇힌 강현의 당황한 얼굴을 본 암혈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강현을 고문해 어떻게 해서든 무라마사를 되찾을 생각이었다. 부가적으로 놈의 능력을 이용해 선조들의 유물도 찾아내고.
그전에.
앞에 있는 서태촌이라는 노괴를 처리해야겠지만.
***
“물고기가 어항 속으로 들어왔다. 다시 한번 전달한다. 물고기가 어항 속으로 들어왔다. 신속하게 퇴각하라.”
화랑과 싸울아비가 함정에 들어왔다는 말과 함께 전달된 퇴각명령에 고개를 돌려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산월.
피와 물로 이루어진 수많은 칼이 허공에서 생성돼 서태촌이라는 늙은 괴물을 압박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신풍대 최강, 암혈의 힘이다.
“대주….”
산월의 나이 마흔둘.
암혈보다 먼저 욱일회에 가입하고 신풍대로 활동했지만, 어느새 저만치 추월해 앞서가는 암혈을 보며 절망을 느껴야만 했다.
어느 조직이든 이인자의 위치는 서러운 법이고 또한 산월에게도 가슴에 품은 야망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회주의 비밀 지령이 내려졌다.
그것은 회주의 명령보다 천황의 명을 우선시하며 최근 독단적인 행동이 늘어난 암혈을 척살하라는 것.
대상그룹 주석원 회장을 회주의 지시도 없이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순간 암혈은 회주의 눈 밖에 났다.
그렇게 암혈의 척살 명령과 함께 그에게 하달된 작전명령은 욱일회가 10년의 세월을 들여 계획한 장대한 계획 중 하나였다.
강현이라는 적당한 미끼가 있기에 더욱 수월하게 실행할 수 있게 된 바로 그 계획의 중심에는, 구름 가오리가 있었다.
‘일본 정부는 한반도 통치 계획을 폐기했다.’
여전히 한반도를 무력으로 병합해 식민통치를 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천황과, 대한민국을 속국이 아닌 적대국으로 결정한 일본 정부.
일본 정부와 천황 그리고 욱일회주가 엮인. 한반도를 가운데 둔 권력 싸움의 한가운데에 바로 암혈이 있었다.
‘이제 회주에게 대주는 골칫덩어리야. 자신보다 천황을 더 믿고 따르는데 눈 밖에 안 날 수가 있나.’
때문에 욱일회주는 천황이 아닌 일본 정부와 손을 잡았다.
그 결과로 나온 계획이 암혈의 폐기와 함께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대한 자연 재해급 테러.
그동안은 완전한 통치를 위해 되도록 자제해 왔던 작전의 실행이 결정되었다.
통치하지도 않을 땅덩어리에 구름 가오리가 매년 얼마의 비를 쏟아붓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게 암혈이 모르는 이번 작전에 얽힌 전말이었다.
그리고 이 작전의 시작에는 강현이라는 그럴싸한 미끼가 있었기에 싸울아비와 화랑이라는 거대길드까지 함정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욱일회가 함정을 만들어 적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닌 저들이 만든 함정으로 빠진 모양새기에 저들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함정에 걸린 건 자신들이란 걸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그들.
그것은 어쩌면 대한민국 10대 길드라는 자부심이 만들어 낸 오만과 자만일지도 모른다.
10년을 절치부심한 욱일회의 계획은 그렇게 암혈의 말처럼 천운을 맞았다.
암혈과 신풍대와 신멸대를 대한민국 수도 서울과, 한국 10대 길드 중 둘과 맞바꾼다면 욱일회로서도 절대 손해가 아니었으니까.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겠어.’
이 작전을 알고 있는 자는 신풍대와 신멸대 내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작전이 끝난 뒤 욱일회의 주도하에 새로 만들어질 길드의 요직을 약속받았다.
긴 세월 어둠 속에서 암약해야 했던 그들이 드디어 양지로 나가는 것이다.
곧 자신이 얻게 될 것들을 떠올리며 산월은 숲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졌다.
산등성이를 넘어 쏟아져 내리는 싸울아비와 화랑의 길드원들을 상대하고 있는 부하들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배신의 마침표는 같은 편이 방심하고 있을 때 찍어야 하는 법이니까.
***
그 시각.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근방의 폐창고.
퀴퀴한 먼지가 쌓인 창고의 중앙엔 거대한 구조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산월은?”
그 구조물 앞에 서서 산월의 행방을 묻는 자는 신멸대 대주 이선호였다.
“무전을 보냈으니 지금쯤 퇴각 중일 겁니다.”
부대주의 보고에 이선호는 못마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꼭 그 새끼가 필요한가?”
회주의 명만 아니라면 그냥 암혈과 함께 수장시켜 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표면적인 이유는 S급이 세 명은 되어야 비어버린 10대 길드의 한자리를 꿰찰 수 있을 거란 거였지만 다른 속내가 있는 듯싶습니다.”
부대주의 말에 이선호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노인네가 의심이 많아서 그래. 산월 그 쪽바리 새끼 마음에 안 드는데…쩝. 회주가 일부러 끼워 넣은 거 같지?”
“대주와 저를 중심으로 길드가 만들어졌을 때 통제하기가 힘들 것을 염려한 것이겠지요.”
“하여간 늙어 죽지도 않는 노인네가 의심은 X나게 많아. 퉤.”
불퉁한 목소리로 회주를 욕하는 이선호의 얼굴 어디에도 욱일회 회주를 향한 존경심 같은 건 없었다.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신풍대가 순수혈통의 일본인들로만 구성된 조직이라면 신멸대는 친일파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조직이었으니까.
예나 지금이나 배신자의 끝은 좋지 못했고. 일제에 부역한 친일파들의 끝은 더욱 그러했다.
일본과 한국,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친일파들의 후손이 욱일회에 대한 충성심이 있을 리 만무했다.
“슬슬 시작하자. 무전 들어오는 것 보니까 우리 애들이 제대로 밀리고 있는 모양인데.”
싸울아비와 화랑의 정예들.
지 죽을 자린지도 모르고 모여든 불나방들이 낌새를 느끼고 흩어지기 전에 처리해야 했다.
“산월 그 새끼는 뭐. 지가 알아서 살아 나오겠지.”
“네. 대주.”
이선호의 명령에 부대주가 거대한 말굽 모양을 한 기계의 전원을 작동시켰다.
우우웅.
낮고 묵직한 기계음과 함께 기계의 표면에 새겨진 복잡한 마나 회로가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천둥 쇠.
등급외로 분류되는 12마리 몬스터 중 하나인 구름 가오리를 무기로 사용하고자 일본에서 비밀리에 개발한 마도 기계의 이름이었다.
비록 원래 개발목표였던 구름 가오리를 조정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놈을 자극해 경로를 바꾸는 것은 가능했다.
암혈은 구름 가오리가 목포로 상륙해 서울로 오는 것이 천운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구름 가오리를 이곳으로 유인하기 위한 이선호와 신멸대의 노력을 모르기에 하는 말이었다.
지이이잉-.
작동을 시작한 천둥 쇠가 미약한 진동음을 만들어내더니 이내 그것이 내는 소리가 인간의 가청영역을 벗어났다.
이선호는 조작을 마치고 물러서는 부대주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와 함께 창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 끝났으면 술이나 한잔하러 가자. 그동안 뒷구멍으로 일하느라 힘들었는데 이제 양지로 나가게 되었으니 축배를 들어야지.”
조금 전 십여 년을 함께했던 300여 명의 부하를 사지로 몰아넣는 결정을 내린 사람 같지 않게 태연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저벅저벅.
무심하게 걸음을 옮기는 그들의 뒤로 붉게 달아오른 천둥 쇠가 그들을 배웅했다.
그리고 그런 천둥 쇠가 만들어낸 소음은 구름 가오리를 분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쿠르르릉- 꽈 광!!
***
쏴아아-!!
거대한 천둥소리와 함께 갑작스럽게 빗줄기가 굵어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불어나는 사람들.
강현을 경호하던 경호원들과 그들을 추격하던 신멸대와 신풍대 그리고 싸울아비와 화랑의 길드원들까지.
모여 있는 각성자만 3천여 명에 가까웠지만 쏟아져 내리는 폭우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인지한 암혈과 서태촌마저 서로 거리를 두고 물러난 상황.
강현은 허공에 떠 있는 피의 감옥에 갇혀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불과 3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급변한 상황에 모두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릴 때쯤.
화랑의 길드원들 사이로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뿜어내는 기파만으로 모든 빗물을 튕겨내며 앞으로 나선 구정철이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을 허공으로 높이 들어 올렸다.
“이봐. 우리 해야 할 말이 있을 것 같지 않나?”
만신창이가 된 채 구정철의 손아귀에 목덜미가 잡힌 사내.
“산월….”
부대주인 산월이 구정철의 손에 잡힌 것을 확인한 암혈이 나직하게 침음을 흘렸다.
“무슨 말을 하자는 거지? 설마 서로 인질을 맞교환하자는 건가?”
암혈의 말에 피의 감옥에 갇혀있는 강현을 일별한 구정철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설마. 너. 네가 버림받았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 건가?”
어이없어하는 구정철의 목소리에 암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개소리지?”
“정말 몰랐나 보군…. 저런 자가 신풍대의 수장이라니…. 쯧.”
짧게 혀를 찬 구정철은 손아귀에 쥐고 있던 산월의 뺨을 후려쳤다.
짜아악!
가벼운 손짓이었음에도 정신을 잃고 있던 산월의 고개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꺾였다.
“끄으으.”
구정철은 나직한 신음을 흘리는 산월을 암혈에게 집어 던지며 말했다.
“자세한 건 그놈한테 들으면 되겠군. 왜 네놈이 버림받았는지 말이야.”
짜다만 걸레처럼 넝마가 돼 진창 위를 뒹구는 산월.
“대, 대주….”
“말해. 저 말이 사실이냐?”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신멸대와 신풍대의 모든 대원이 이곳에 모였건만, 그 어디에도 신멸대의 대주와 부대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S급 각성자인 그들이 다른 이들에게 패했을 리는 없으니 답은 하나였다.
배신.
싸늘하게 굳은 암혈의 볼살이 푸들거리며 떨렸다.
“대답해라 산월. 대답이 없으면 목을 베겠다.”
살기 어린 암혈의 말에 산월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고서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마치 목을 자르라는 듯이.
“…왜?”
암혈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일본제국의 번영을 위해, 천황폐하와 욱일회에 충성을 다한 삶이었다.
그런 자신이 왜 버리는 패로 쓰인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기에 물음을 던졌지만, 그 물음에 답을 해야 할 자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대답해라. 산월. 네 가족의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싶다면.”
그 말에 고개를 든 산월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주. 당신은 내 가족들을 해칠 수 없어.”
암혈을 바라보던 산월의 시선이 더 높은 곳으로 향했다.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
제대로 눈을 뜰 수조차 없이 쏟아지는 장대비 사이로 살포시 모습을 드러내는 거체.
꽈르르릉!
번쩍-!
꽈 광!!
“오늘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을 거니까.”
산월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든 사람들은 볼 수 있었다. 둥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구름 가오리의 거대한 눈동자를.
그 압도적인 광경에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채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미친놈이. 제멋대로 산 사람을 죽은 사람 취급하고 지랄이야.”
피의 감옥을 탈출한 강현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장내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