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장마 (5).
암혈은 서태촌의 공격도 잊은 채 멍한 눈으로 자신의 빈손을 내려다봤다.
“어…떻게?”
분명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어야 할 애도(愛刀) 무라마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0년 전. 그가 35살의 나이로 S급에 오른 것을 축하하며 천황이 하사한 칼이 사라진 것이다.
공황(恐慌).
암혈은 순간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판단하지 못했다.
여전히 ‘대 일본제국’을 외치는 그에게 천황이 하사한 칼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그만큼 큰 충격과 공포였다.
서걱!
촤아악-.
그 때문에 암혈은 서태촌의 공격에 이렇다 할 반응도 하지 못한 채로 왼팔을 잃었다.
“이건 또 무슨 꿍꿍이냐?”
그리고 그것은 서태촌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SS급 각성자가 아무 이유 없이 팔 한 개를 내준 격이니 서태촌으로서는 당연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태촌의 물음에도 암혈의 시선이 머물러있는 곳은 강현의 얼굴이었다.
암혈은 하나 남은 손으로 강현의 멱살을 그러쥐고 물었다.
“네놈. 짓…이냐?”
마치 살아야 할 이유를 잃은 것처럼 암혈의 목소리에는 짙은 허무가 서려 있었다.
고개를 들어 그 얼굴을 확인한 강현은 빙긋 웃음을 지었다.
“왜? 꽤 좋은 칼인 것 같던데…. 아들을 잃은 것만큼 슬퍼?”
아들을 잃은 부모를, 마음을 후벼 파는 말로 도발을 하던 암혈의 표정은 마치 나라를 잃은 애국지사의 표정과 같았다.
짙은 허무와 절망.
“얌전히…곱게, 무라마사를 내어놓으면 사지만 자르고 목숨은 살려주도록 하마.”
하지만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는 목소리와 광기가 일렁이는 눈.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집착이었다.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 부모. 부산의 일본인 자치구에서 자란 암혈이지만 그곳에도 차별은 엄연히 존재했다.
당장 자치구만 벗어나도 일본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 부산이었으니까.
어린 시절 그는 참으로 많이 싸워야 했다.
일본을 그리워하는 부모와.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자신, 그리고 그를 차별하는 세상과 말이다.
그러던 중에 각성했고 회에서 접촉을 해 왔다.
대 일본제국의 땅인 한반도를 되찾기 위한 초석이 되어달라는 말과 함께.
그렇게 그는 욱일회에 들어갔고 신풍대가 되었다.
그렇게 10년.
S급으로 승급됨과 동시에 그에게 하사된 천황의 칙서와 한 자루의 칼.
그때부터 그가 무라마사라 이름 붙인 칼은 그의 정체성이 되었다.
대 일본제국 ‘천황폐하의 칼’이라는 정체성이.
그런 칼을 강현이 먹어버린 것이었다.
강현은 광기가 일렁이는 암혈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내 사지가 잘리기 전에, 네 사지가 먼저 잘릴 것 같은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현의 멱살을 쥐고 있던 암혈의 하나 남은 팔이 어깻죽지부터 잘려나갔다.
“나도 일단 네놈의 사지를 잘라내 주마.”
짙은 증오와 살기가 서린 목소리.
서태촌이었다.
“감히 나를 뒤에 두고 한눈을 팔다니 죽여달라는 말이겠지.”
말을 마친 서태촌은 자신이 뱉은 말을 지키겠다는 듯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서거걱.
털썩.
“허나. 걱정하지 말아라. 나도 네놈을 죽게 놔두지 않을 테니.”
사지가 잘려나간 채로 핏물 위를 뒹굴던 암혈은 서태촌의 말에 실성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흐. 흐흐흐흐.”
그 웃음 속에는 서태촌과 필적할 만큼 짙은 살기가 흘렀다.
“어이. 노괴……. 당신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암혈은 분노하는 서태촌을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분노를 시험하려 하지 마라.”
서태촌에게서 뿜어진 유형의 살기가 암혈을 찍어 눌렀지만, 암혈은 개의치 않고 입을 놀렸다.
“피가 빨려 죽었지. 미라처럼 말이야.”
움찔.
암혈의 말을 들은 서태촌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기억하기도 싫은 아들 부부의 최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피골이 상접한 몰골.
마치 흡혈귀에게 피를 빨린 것처럼 몸 안의 체액이 단 한 방울도 남지 않아 푸석푸석해진 피부는 손만 가져다 대도 바스러져 먼지처럼 흘러내렸었다.
그 끔찍한 모습을 손녀딸에게 보일 수가 없어 급하게 화장을 해야 했고, 덕분에 아직도 손녀딸은 자신을 원망한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놈이 저 더러운 입으로 아들의 죽음을 언급했다.
서태촌은 분노했다.
그동안 절제해 왔던 분노라는 감정이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 터져 나와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네놈. 혓바닥부터 잘라야겠다.”
“노괴. 내가 왜 암혈이라 불리는지 궁금하지 않아?”
하지만 암혈은 입을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간혹, 내 무기를 보고 내가 검사계열 직업을 가졌다고 착각하는 놈들이 있더군.”
그들에게서 거리를 벌리고 지켜보던 강현의 입에서 의문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현상을 본 이가 흘리는 경악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봐 노괴. 내 직업은 검사 따위가 아니야.”
암혈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다시 암혈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피를 매개로 마법을 쓰는 마법사지.”
사지가 잘려나간 암혈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시뻘건 피로 이루어진 팔과 다리.
“내 목을 자를 기회가 있었을 때 잘랐어야 했어. 노괴. 이제는…. 그럴 기회가 없을 테니까.”
캠핑카 밖. 경호원들이 흘린 피가 마치 생명을 가진 것처럼 꾸물꾸물 움직여 암혈을 향해 흘러왔다.
“이제, 내가 왜 암혈이라 불리는지 알려주도록 하지.”
시뻘건 혈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 암혈의 눈이 강현의 얼굴에서 멈췄다.
‘헐.’
그러곤 새하얀 송곳니를 드러내며 살벌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암혈.
강현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암혈의 눈빛은 피식자를 보는 포식자의 눈이었으니까.
‘아무래도 나 X 된 것 같지?’
강현은 소름이 올라온 양팔을 쓸어내리며 눈을 돌려 전용 던전의 입구를 확인했다.
그의 느낌엔 던전 입구로 도망쳐야 할 시간이 곧 다가올 것 같았다.
***
“젠장!”
이장현은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강현의 도움으로 암혈에게서 벗어난 이장현은 부하들을 추슬러 원래 계획대로 강현의 캠핑카로 욱일회 놈들을 유인하려 했었다.
하지만 여섯 배가 넘는 인원수의 차이에 그들의 전략은 유인이 아니 퇴각이 되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부하가 목숨을 잃었다.
애초에 비현과 은검 그리고 월화랑의 피해를 고려하고 수립한 작전이었지만, 피해가 커도 너무 컸다.
은검의 수장 검백은 신멸대 대주에게 사망했고, 비현의 수장으로 온 황 집사라는 노인은 신풍대와 신멸대 부대주들의 합공에 중상을 입고 퇴각 중이었다.
수장들이 그 지경이 됐으니, 그 밑의 부하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외곽을 경계하던 150명의 인원 중 지금 살아남아 퇴각하는 이들은 고작 50여 명 남짓.
무려 100여 명의 인원이 죽었고, 남은 인원도 흩어져 있기에 지금도 죽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니 이장현의 입에서 욕설이 나오지 않고 배기겠는가.
고작 1㎞라는 거리가 이렇게 멀게 느껴질 줄 그도 몰랐다.
사사 삭.
수풀을 해치며 뒤쫓는 발걸음 소리가 요란했다.
적은 두부류였다.
온통 검은색 일색의 옷차림에 검은 두건과 복면까지 착용한 신풍대와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채 일본도를 든 신멸대.
그리고 저렇게 발소리를 내며 접근하는 놈들은 신멸대일 확률이 높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작전지역으로 이동해. 꼬리는 내가 잘라낸다.”
그 말과 함께 걸음을 멈춘 이장현.
하지만 걸음을 멈춘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월주. 끝까지 혼자 똥폼 잡으려는 겁니까?”
팔 하나를 잃은 월화랑 하나가 그와 함께 걸음을 멈추고, 그를 따라 나머지 스무 명의 월화랑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월주. 그거 알아요? 월주는 다 별론데 이런 똥폼 잡는 게 제일 별로예요.”
이제 갓 스무 살이 되었을까 말까 한 청년부터.
“저 양반은 자기가 진짜 신라시대 화랑인 줄 안다니까? 임전무퇴 뭐 그런 거요?”
이장현과 비슷한 나이대의 중년 남성과.
“흥. 저러니까 여태 장가를 못 가고 혼자 살지.”
30대 후반의 여성까지.
“네가 구제 좀 해 주지 그랬냐. 너도 시집 못 갔잖아.”
“아. 오빠. 말해 뭐해요. 내가 왜 시집을 못 갔는데. 10년 동안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도 눈치를 검술하고 바꿔먹었는지 꿈쩍도 안 합디다.”
그녀의 말에 좌중은 뒤집혔다.
“와아-! 누님-!”
“오오! 드디어 고백하는 거냐?”
“그럼. 10년을 가슴앓이했으면 됐지. 곧 죽을지도 모르는 마당인데 그걸 품고 가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당찬 그녀의 말에 그곳에 있던 모두는 다시 한번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하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는 알고 있었다. 이곳이 그들의 무덤이 될 거라는 사실을.
사사 삭. 사 삭.
수풀을 울리며 다가오던 발걸음 소리가 멈추고.
웃음을 터트리던 이들이 전의를 다지며 각자의 무기를 틀어쥐었다.
긴장된 순간.
수풀을 노려보던 이장현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수풀 너머 산등성이 위.
거뭇한 그림자들이 내리는 빗방울처럼 우수수 쏘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거 참. 일찍도 오십니다.”
탄식 어린 그의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
사사 사 삭.
수풀이 흔들리며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서둘러 그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구정철과 구지석 외 화랑 길드의 정예 1천 명이 전장에 도착하는 순간이었다.
***
‘미친…. 이게 뭐야?’
암혈과 서태촌의 싸움을 지켜보던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무언가와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내리던 빗줄기가 하늘로 치솟고 땅바닥이 소리도 없이 갈라졌다.
SS급 각성자.
말로만 전해 들어 왔던 그들의 능력이 만들어 내는 광경은 그들을 같은 인간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적이었다.
피를 다루는 암혈의 마법은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했으며, 그런 암혈을 상대하는 서태촌의 모습 역시 인간이 아닌 한 자루 검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게…SS급 각성자….’
이들과 비교를 하자면 헌터가 주연인 영화에 나오는 마지막 보스는 오히려 인간적으로 보일 지경이다.
피를 매개로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물을 지배하는 마법을 쓰는 암혈은 마치 물의 신처럼 보였고, 자신의 영역 안에 들어오는 것은 빗방울 하나까지도 베어버리는 검술을 지닌 서태촌은 마치 검의 신처럼 느껴졌다.
‘나. 이런 괴물을 도발했던 거냐?’
싸우는 걸 보면 검사도 아닌 놈이 검은 왜 들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암혈이란 놈에겐 꽤 중용한 물건이었나 보다.
서태촌을 상대하는 와중에도 순간순간 눈동자를 움직여 내 위치를 확인하는 걸 보면 말이다.
‘씨드. 요격 준비해.’
둘의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지만, 나도 내 목숨이 걸린 마당에 넋 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네. 사령관님. 표적 암혈. 타겟팅 완료됐습니다.’
크롤러를 상대하다 반파된 3기와 씨드의 본체가 머무는 한기를 제외하면 46기의 샤이닝 에로우가 암혈을 요격할 준비를 했다.
‘이게 도움이 될까?’
하지만 선뜻 손을 쓰기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처음 이장현과 암혈이 대치하고 있을 때 분명 그들은 씨드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암혈이 샤이닝 에로우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작은 불안감.
하지만 언제까지 미적거리고 있을 순 없었다.
전용 던전으로 도망치는 건 말 그대로 최후의 수단.
그전에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야만 했다.
‘발사.’
내 명령이 떨어지자 천천히 암혈의 주변을 선회하던 46기의 샤이닝 에로우가 일제히 암혈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를 바라보는 암혈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