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장마 (3).
“네 몸속에는 뭐 피 대신 엘릭서라도 흐르냐?”
난데없이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 하지만 암혈도 이장현도 놀라지 않았다.
“엘릭서? 그게 뭐지?”
무언가가 허공에 떠 있다는 사실은 그들도 진작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드론인가? 투명화 마법이라니, 대현에서 새로 만들었다는 그 드론인가 보군.”
암혈은 허공에 떠 있는 샤이닝 에로우를 드론이라고 생각했고.
‘강현?’
이장현은 드론을 통해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이 강현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기계음이 섞이긴 했지만, 강현 군의 목소리야. 왜 갑자기 나서는 거지?’
원래 계획에서 강현은 그저 미끼의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 때문에 캠핑카를 중심으로 그 주변 주택에 은신을 한 채로 그를 경호하는 인력 또한 상당한 상황.
갑자기 나서서 암혈을 도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선을 끌어주는 것이 그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암혈이 샤이닝 에로우에 신경을 쓰는 사이 이장현은 바닥을 박차고 암혈과 거리를 벌렸다.
어느새 포션을 마시고 뿌렸는지 옆구리의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
긴장한 얼굴로 검을 쥔 이장현과 다르게 암혈은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재미있군, 넌 뭐지?”
번쩍.
말이 끝남과 동시에 휘둘러진 암혈의 검이 허공의 한곳을 베었다.
서걱.
이내 외장갑이 잘려나간 샤이닝 에로우의 비가시 모드가 풀렸다.
“호오. 버텨? 제법 잘 만들었군.”
암혈은 자신의 공격을 버텨낸 샤이닝 에로우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공격을 받은 샤이닝 에로우는 외장갑이 잘려나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고도를 유지한 채로 목소리를 토해냈다.
“네가 노리고 있는 사람 목소리도 못 알아봐?”
빈정거림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암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너. 제법 건방지구나…. 겁이 없는 건가?”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에 10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SS급 각성자.
암혈은 그중 하나로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강자가 되었다.
물론 먼저 SS급에 오른 이들과 어느 정도 실력 차는 있을 테지만, 분명한 건 SS급의 각성자들 모두가, 보통 각성자들은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자신을 도발하는 강현의 행태에 암혈은 어이가 없었다.
“내가 너를 겁내야 하나?”
다시금 들려오는 강현의 목소리에 암혈은 ‘픽’하고 실소를 지었다.
“그래….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쥐구멍에 숨어서 도발하는 꼴이 참 용기가 있어 보이는구나. 조센징.”
그것은 명백한 조롱이며 비웃음이었다.
하지만 강현은 그런 암혈의 말을 개의치 않았다.
“겨우 E급 하나 잡겠다고 이렇게 우르르 몰려온 주제에 참 당당하기도 하셔라. 네가 목을 내놓으라고 하면 내가 ‘내 가져가십시오.’하고 내놔야 하는 거였냐. 등신아?”
강현은 당당했다.
현재 강현은 고작 E급.
시스템 사용자이기에 남들과는 다르게 레벨업이라는 게 가능해졌지만, 그래도 암혈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약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자신을 잡겠다고 수백 명이 몰려온 상황에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네 부하 중에 서른 명이 내 손에 죽었다. 미끼를 물었으면 빨리빨리 와야지, 엄한 곳에서 힘 빼고 있으니까 애꿎은 부하들만 뒤지잖아. 이 쪽바리 새끼야.”
아주 저급한 도발.
하지만 그 도발은 암혈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겉으로는 냉혹하게 부하들을 대하는 것 같지만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끔찍하게 챙기는 사람이었으니까.
거기에 강현은 암혈이 가장 싫어하는 쪽바리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암혈을 자극했다.
물론. 강현은 모르고 한 말이었지만 그 도발은 너무도 잘 먹혔다.
“너.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지고도 그 입을 나불거릴 수 있는지 지켜봐 주마.”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암혈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대체 어쩌려고 그런 도발을 한 건가?”
“어차피 모두 다 밀리고 있습니다. 흩어져서 각개격파를 당하느니 한곳에 뭉쳐서 싸워야 합니다.”
강현의 말이 의미하는 것을 이장현이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인이어를 통해 전해지는 부하들의 비명을 선명하게 듣고 있었으니까.
“부하들을 수습해서 곧 합류하겠네.”
그러나 강현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강현이 있는 곳에 암혈이 도착한 듯싶었다.
1㎞.
일반인에게는 꽤 먼 거리지만 암혈과 같은 SS급 각성자에겐 그저 숨 한번 쉬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불과했다.
특히 암혈과 같은 근접계열 각성자들에겐 말이다.
“서둘러야겠군.”
강현의 캠핑카를 지키고 있는 인원들이 감당하기에 암혈은 너무나 강했다.
‘마스터, 빨리 와주셔야 합니다.’
부하들을 향해 몸을 날리는 이장현은 오지 않는 구정철이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하기만을 바랐다.
지금 이곳에 암혈을 상대할 수 있는 각성자는 없었으니까.
***
“뭐?”
그 시각.
이장현이 그토록 기다리는 구정철은 아들의 보고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통행 제한?”
“현재 강수량이 많아서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물이 많이 불어났답니다. 도로가 유실된 곳도 많고 낙석과 산사태가 일어난 곳이 많아서 차량 통행을 제한하고 있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드론은?”
“아시다시피 구름 가오리 때문에 드론은 이용할 수 없습니다.”
“싸울아비 쪽 상황은?”
“그쪽도 도로 사정 때문에 발목이 잡힌 모양입니다.”
“하아….”
구지석의 말에 구정철은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되면 일이 꼬인다.
버젓이 함정임을 드러내고 실행한 작전이었다.
함정임이 뻔히 보이는 곳에 욱일회 놈들이 평범한 전력으로 달려들 리 없었다.
그래서 구상한 전략이 이거였다.
보이는 함정과 보이지 않는 함정.
일차적으로 강현을 미끼로 욱일회를 끌어들인 후. 강현을 보호하는 비현과 싸울아비의 그림자인 은검과 화랑의 월화랑이 내부에서, 그리고 싸울아비와 화랑의 정규 길드원들이 외부에서 욱일회를 포위 섬멸하는 일종의 망치와 모루 작전이었다.
하지만 구름 가오리가 예상과 다르게 더 빠르게 북상하면서 계획이 어그러졌다.
원래라면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작전이 구름 가오리가 쏟아부은 비로 인해 도로가 유실되고 산사태가 일어나며 대규모 인원이 이동하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특히 구름 가오리의 진행 방향이었던 전라도와 충청도 쪽은 비 피해가 막심해 싸울아비 길드는 서울까지 올라오는 것도 힘이 들 지경이었다.
“드론이라도 띄울 수 있으면 좀 나으련만….”
하지만 드론을 띄울 수도 없었다.
1천여 명의 길드원이 모두 드론으로 이동할 수도 없을뿐더러 행여 구름 가오리를 자극하는 날에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 펼쳐질 테니까.
구정철이 탄식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릴 때 그의 아들 구지석이 다시 말을 건넸다.
“아버지. 싸울아비 길드 이동 시작했다고 합니다.”
“음?”
구지석의 말에 차 창밖을 내다본 구정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는데?’
더불어 팔당댐이 방류를 시작해 한강의 수위는 말도 못 하게 높아진 상태다.
‘이 상황에 이동을 시작했다고?’
“서태촌 길드장이 앞장섰다고 합니다?”
“앞장서? 설마 이 빗속을 뛰어간단 말이냐?”
“네.”
“늙은이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애들을 잡는구나. 쯧쯧.”
그렇게 말을 마친 구정철은 안전띠를 풀었다.
“아버지…?”
“넌 비 그치거든 천천히 애들 추려서 오거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서가 놈보다 늦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느냐? 나라도 먼저 가련다.”
달칵.
구정철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에게 다시 한마디를 던지곤 차 문을 열고 빗속으로 몸을 던졌다.
싸울아비 길드 마스터 서태촌.
화랑의 전 마스터 구정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열 명의 SS급 각성자 중 두 명이 폭우를 뚫고 남양주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어휴. 비가 그치면 오라니….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
구지석은 탄식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메고 있던 안전띠를 풀었다.
구름 가오리가 지나가고 나면 한반도에는 장마가 시작된다. 적어도 보름은 비가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구정철의 말은 오지 말라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결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건 구지석은 너무 잘 알았다.
달칵.
차 문을 열고 빗속으로 걸음을 내디딘 구지석이 무전으로 명령을 내렸다.
“화랑 전원 하차. 남양주까지 도보로 이동한다.”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아버지의 등 뒤를 따라 달리며 구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존경스러운 아버지지만 가끔 보면 너무 꼰대스러울 때가 있다.
직접적으로 말해도 될 것을 꼭 이렇게 돌려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
“흥. 이 벌레들을 믿고 건방을 떨었던 건가?”
암혈은 자신을 둘러싼 30여 명의 인원을 보고 콧방귀를 뀌었다.
A급에서 B급.
고만고만한 실력의 각성자가 30여 명.
그가 S급이었더라도 조금 버겁긴 하겠지만 죽이는 데 무리가 없을 수준의 인원이었다.
하물며 지금 그는 SS급.
깨달음을 얻어 벽을 넘어선 그에게 A급 각성자 30여 명은 칼질 몇 번에 썰어버릴 수 있는 버러지들에 불과했다.
“설마 그랬겠어? 자그마치 SS급 각성자이신데 말이야.”
캠핑카의 창문을 연 강현은 30여 명의 각성자들에게 둘러싸이고도 여유를 잃지 않은 암혈을 바라봤다.
190은 넘어 보이는 큰 키를 제외하면 그다지 특출난 것도 없어 보이는 40대 초반의 사내.
암혈이라는 살벌한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그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범했다.
보호 대상인 강현이 캠핑카의 창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자 경호원들의 시선이 강현을 향했고.
“지금 나오시면….”
그 순간.
칼집을 빠져나온 암혈의 도가 번갯불 같은 속도로 휘둘러지며 검기를 뿜어냈다.
쉭!
“위, 위험!”
섬찟한 파공음과 함께 넓게 퍼져 나가는 초승달과 같은 검기.
깜짝 놀란 이들이 분분히 몸을 날려 검기를 피하려 했지만, 방심의 대가는 혹독했다.
서거걱-!
잘려나간 육신과 뿜어져 나오는 핏물.
뜨거운 김을 내뿜던 그것이 곧 내리는 빗물에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순식간에 절반이 넘는 경호원을 처치한 암혈이 땅을 박차고 쏘아져 왔다.
콰앙!
퍼펑!
그의 뒤를 노리고 쏘아 보낸 경호원들의 공격은 허망하게 허공을 가르고 진창과도 같은 땅을 뒤집을 뿐.
그렇게 포위를 벗어난 암혈은 어느새 강현의 앞에 선 채 싸늘한 눈으로 강현을 내려다봤다.
“어디. 그 건방진 주둥이를 또 나불거려 봐.”
높이 들려있던 그의 손이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고.
쉬익.
서거걱- 카앙!
캠핑카의 차체를 가르고 강현의 어깨 위로 떨어져 내린 암혈의 도는 굉음과 함께 튕겨 나갔다.
“캉?”
“고작 갑옷 하나 믿고 그리….”
말을 하던 암혈은 더는 말을 잊지 못했다.
팔 하나를 잘라낼 생각으로 검을 내리쳤던 그곳. 잘려나간 옷 틈새로 드러난 것은 맨살이었다.
“이…뭐….”
당혹감에 말을 잇지 못하는 암혈을 보며 강현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확실히 돈을 들인 만큼 제값을 하는구나. 여기에 들인 돈이 얼만데, 쉽게 잘리면 내가 섭섭하지.’
S급 스킬 금식충.
금식충은 이름 그대로 금을 먹는 스킬이었다.
시스템 스킬 설명과 다른 점이라면 금속이 아닌 현금을 무지하게 잡아먹는 스킬이라는 점이었다.
희귀한 금속은 비싸기 마련이고, 금식충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 아다만티움을 사들인 강현의 계좌 잔액은 또다시 반 토막이 났다.
어디까지나 강현은 자신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여기기에 과감하게 지른 것이었다.
“제법…. 괜찮은 잔재주를 가지고 있구나.”
휙휙.
서걱. 쿵.
암혈은 가벼운 손짓 몇 번으로 캠핑카의 벽을 잘라냈다.
퍼엉!
콰지직.
바퀴가 잘리고 축이 부러져 나간 캠핑카가 그대로 땅 위에 주저앉았다.
사나운 기세를 내뿜으며 캠핑카 안으로 들어서는 암혈.
움찔.
그 기세에 밀린 강현이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나고.
“어디, 이것도 막아 봐.”
암혈은 시커먼 기운이 일렁이는 검으로 강현의 복부를 찔러 들어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
감각의 영역을 개화한 강현이지만 고작 몸을 뒤트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푸욱.
스킬 금식충에 의해 아다만티움의 경도와 강도를 지니게 된 강현의 몸이었지만, 암혈의 도는 너무나도 쉽게 강현의 복부를 뚫고 들어갔다.
“컥.”
짧은 신음을 내뱉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고개를 숙이는 강현.
“그 잔재주도 여기가 끝인가 보구나. 조센징.”
그런 강현을 내려다보는 암혈의 눈엔 짙은 경멸이 스며들어 있었다.
마치 극도로 혐오하는 무언가를 마주한 것과 같은 눈빛.
“끄으윽.”
강현은 그 눈빛을 받으며 자신의 복부에 박힌 검날을 부여잡았다.
하지만 암혈이 볼 수 없도록 고개를 숙인 그의 입꼬리엔 미소가 걸려있었고.
두 눈에선 시퍼런 독기를 뿜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