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장마 (2).
번쩍-!
쿠르릉- 쾅!
번쩍이며 내리꽂히는 낙뢰와 함께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
쏴 아아-.
크악!
빗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비명과 뇌광을 반사해 번쩍이는 날붙이.
채 챙!
캉! 카각!
몇 번의 공방 뒤에 번갯불처럼 떨어진 칼날이 한 사내의 목젖을 가르고 지나갔다.
서걱.
촤아악-.
칼에 베인 사내의 목에서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바닥을 적셨다.
쏴아아-.
하지만 그 핏물은 이내 내리는 빗물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끅…끄륵….”
“잘 가라 조센징.”
목울대 너머로 넘어가는 핏물에 제대로 된 신음조차 내뱉지 못하는 사내의 머리 위로 시퍼렇게 날이 선 소도가 떨어져 내리는 찰나.
챙!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소도를 튕겨냈다.
“칫!”
사 삭.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일색의 닌자 복장을 한 신풍대 대원이 재빠르게 수풀 사이로 몸을 숨겼다.
자신이 죽이려던 싸울아비 길드원의 동료가 온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예상치 못한 적의 등장에 놀란 것도 잠시. 그는 곳 주변을 살피며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쏴아아-
우르릉, 콰쾅.
하지만, 보이는 거라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져 내리는 비와 흔들리는 수풀뿐.
사람의 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고수…. 기척이 없다.’
분명 자신보다 윗줄의 고수가 분명했다.
“A13. 기습실패. 지원 바람.”
짧고 간결하게 무전을 친 그는 잔뜩 긴장한 눈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쓰러진 싸울아비 길드원을 향해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쓰러진 놈을 처리해야 해. 행여 놈이 상처를 회복한다면 협공을 당할 위험이 있다.’
지원요청을 하긴 했지만, 언제 지원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협공을 당하면 답이 없었다.
쓰러져 있는 싸울아비 길드원도 기습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쉽게 처리하지 못했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더욱 마음이 조급했다.
그렇게 수풀과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기며 움직이길 얼마쯤 했을까.
그가 날카로운 비도를 꺼내 들어 가시거리에 들어온 싸울아비 길드원을 향해 쏘아내려 할 때였다.
폭.
가볍기 그지없는 소음과 함께 나무둥치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그의 관자놀이에 화살이 돋아났다.
‘대체…어디…서…….’
쏟아져 내리는 비.
그 비에 젖은 초록의 나뭇잎. 먹구름이 낀 하늘과 번쩍이는 번갯불.
그것이 그가 살아서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털썩.
허물어진 그의 몸에서 스르르 화살이 빠져나와 허공으로 녹아들듯 사라졌다.
우르릉.
그렇게 화살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져 있던 싸울아비 길드원이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저게…뭐야?”
포션을 사용했는지 그의 목에 나 있던 상처는 어느새 깨끗이 치유된 상태였다.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화살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어디에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아이템이었다.
‘나라면 막을 수 있었을까?’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답은 분명했다.
불가능.
저런 건, 자신이 A급이 되더라도 막지 못할 것 같았다.
사내의 눈은 크게 흔들렸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당혹과 두려움이었다.
분명 구원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긴 했지만, 뜬금없이 나타나 적을 처치하고 사라지는 화살은 마치 미지의 마법과 같았다.
이해할 수 없는 미지는 인간의 공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그 때문에 사내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을 겪은 것은 그 사내 한 명만이 아니었다.
***
‘괜찮으십니까? 사령관님?’
요즘 들어 너무 자주 듣는 저 말이 뇌파 통신을 통해 들려왔다.
‘괜찮아.’
씨드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괜찮다고 말했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다.
살인.
내 손으로 직접 죽인 건 아니지만 내가 명령을 내렸고 씨드가 움직였다.
그렇게 죽은 적의 수가 무려 30명이 넘어갔다.
‘어쩔 수 없다.’
그들의 죽음을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지금, 전장(戰場)이다.
전장엔 같은 편과 적이 있을 뿐.
쓸모없는 동정과 연민, 죄책감으로 적을 살려두면 같은 편의 희생이 늘 뿐이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전장의 열기에 잡아먹혀 과도한 살인을 하는 것도 문제지만 쓸데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힐 필요도 없었다.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나는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각기의 목적을 가지고 나를 보호하고 있던 세 집단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그들의 보호를 받는 상황이었고, 지금도 저 밖에서 그들은 나를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었다.
직접 적들과 칼을 맞대고서 말이다.
이유가 어찌 됐건 욱일회라는 자들은 나를 노리고 있었고, 강 회장에게서 전해 들은 바로는 저들이 저지른 범죄행위는 죽음으로도 죗값을 치르기 힘들 정도로 잔혹했고 악독했다.
그렇기에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씨드. 지금부터 적이라 생각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죽여.’
‘…네. 사령관님.’
내 명령이 의외였던 걸까?
씨드의 대답이 조금 늦었다.
‘아…. 플리피 행성엔 동족 간의 살인은 없었다고 했지?’
처음 이곳에 와서 인간이 인간을 죽인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던 씨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런 씨드에게 그게 인간이라 말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내가 살인을 명령하고 있었다.
‘너에게 이런 명령을 내려서 미안하다 씨드.’
나의 사과에 씨드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사령관님. 저는 인공지능일 뿐입니다. 그러니 제게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명령을 내리시면 실행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씨드는 주변 상황에 대해 보고를 해 왔다.
‘조심하십시오. 사령관님. 전투 범위가 점점 좁혀지고 있습니다.’
씨드의 보고에 나는 앉아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욕실 문 앞에 섰다.
언제든 위험한 순간이 오면 전용 던전에 입장할 수 있게 말이다.
‘덫이라는 걸 알고도 나를 노리고 습격을 시도한 놈들이 캠핑카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건 말 그대로 최후의 수였으니까.
놈들은 제 발로 덫에 들어왔지만, 아직 내가 만들어 놓은 덫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특히 신풍대의 대주라는 암혈이 확실하게 걸려들 때까지 말이다.
짜악-!
나는 두 손을 들어 뺨을 후려쳤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싸움이다.
정신을 놓고 있다간 자칫 잘못하면 전용 던전으로 들어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상대는 S급 각성자니까.
첫 살인에 대한 망설임은 잠깐이었으며,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욱일회라는 단체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지금 저 폭우 속에 그들을 상대하다가 죽어가는 이들이 있다.
이럴 때일수록 내 역할을 충실히 해내야만 한다.
나는 창문 가까이 다가가 밖을 내다봤다.
우르르 쾅-!
순간 번쩍이는 번갯불이 그려낸 전장의 광경이 순식간에 망막에 각인되었다.
내리치는 빗방울 사이로 검광이 피어올랐다가 사라지고 스킬과 스킬이 부딪혀 폭죽처럼 터져나갔다.
기습이 아닌 전면전.
어느새 전투의 양상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
“어딜 그리 바쁘게 가나?”
강현의 캠핑카가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 위.
부하들을 도우려 바쁘게 몸을 날리는 이장현의 앞을 막는 그림자가 있었다.
급하게 발을 멈춘 이장현은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장신의 사내를 보고 살기를 내뿜었다.
“반갑지도 않은 면상을 잘도 들이미는구나.”
이장현은 자신의 앞을 막아선 암혈을 향해 독기 서린 미소를 지었다.
“큭. 세 놈이 덤벼 고작 상처 몇 개 새긴 거로 기고만장한 꼴을 보자니 가당치도 않구나. 이장현.”
암혈은 이장현의 도발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말 그대로 3대 1의 상황에서도 저들은 자신을 죽이지 못했다. 겨우 몸에 상처 몇 개 새긴 것이 전부.
그랬던 이가 혼자서 자신을 상대로 이빨을 드러내니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그래. 오늘은 혼자서 어떻게 나를 상대할 거지?”
후웅-!
말을 마친 암혈의 몸에서 기파가 뿜어져 나와 내리는 빗방울들을 허공으로 튕겨냈다.
‘빌어먹을.’
이장현은 암혈이 내뿜는 기세에 이를 악물었다.
같은 S급의 각성자지만 암혈과 이장현의 실력 차이는 명확했다.
한 수 혹은 두수 위.
지난 30년간 월화랑으로서 암혈과 몇 번 싸워본 적이 있는 그이기에 더욱 참담한 마음이었다.
‘그사이 더 강해졌군. 빌어먹을 놈.’
어쩌면 자신이 오늘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장현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황 집사 그 노인네와 검백을 기다리는 거라면 기대하지 말라고 전하고 싶군.”
검 자루에 손을 가져다 댄 채 잔뜩 긴장한 이장현과 달리 암혈은 여유가 넘쳤다.
“그들도 바쁠 테니 말이야. 오늘 이곳에 신풍대만 온 게 아니거든.”
암혈이 이토록 여유로운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오늘, 이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신풍대는 물론이고 욱일회의 또 다른 칼인 신멸대(燼滅隊)도 투입되었으니까.
그 신멸대의 대주와 부대주들이 황 집사와 검백을 막고 있을 것이기에 암혈은 여유로울 수 있었다.
스릉.
“질기디질긴 우리 인연도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군.”
암혈은 허리에 차고 있던 일본도를 빼 들고 이장현을 겨눴다.
그가 처음 신풍대의 대원이 되고 20년.
길드 화랑의 그림자인 월화랑 소속의 이장현과 맞부딪혀 싸운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기를 수십 번.
오늘은 그 끝을 봐야 할 것 같았다.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칼을 겨눈 암혈과 검파에 손을 얹고 암혈을 노려보는 이장현.
사나워진 빗줄기가 그들의 몸에서 뿜어지는 사나운 기파에 튕겨 나갈 무렵.
번쩍!
우르릉.
캉! 카각!
그들의 머리 위에서 천둥이 울부짖는 순간,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히며 불똥을 튀겼다.
챙! 채채챙! 카 칵.
그 후 번개같이 이루어진 암혈의 공격을 이장현은 겨우겨우 막아냈다.
확연한 실력 차.
같은 S급임에도 불구하고 이장현은 암혈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벼락처럼 내려치는 칼.
꽝!
“큭!”
철퍽철퍽.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한 이장현이 뒤로 밀려났다.
“이제 장난은 그만하고 제대로 놀아보지.”
어느새 밀려난 이장현 곁에 모습을 드러낸 암혈의 도가 이장현의 목을 노리고 수평으로 베어왔다.
검고 불길한 빛이 일렁이는 암혈의 도.
휙.
순간 이장현과 암혈의 도 사이에 있던 공간이 수평으로 베어졌다.
샤아악-.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잘려 허공으로 흩어지고.
암혈의 도 끝에서 만들어진 초승달처럼 날카로운 검은색 마나 소드가 순식간에 이장현의 목덜미 앞에 도달했다.
지금의 암혈을 있게 만들어준 그의 S급 스킬 ‘현월참(弦月斬)’이었다.
“큭! 빌어먹을!”
짧은 욕을 내뱉은 이장현은 등이 바닥에 닿을 것처럼 몸을 눕혔다.
검기를 피해내 이장현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그의 머리맡에서 암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있어도 되겠어? 달구경 하기엔 좋은 날씨가 아닌데 말이야.”
“이 새끼가!”
순간 발작적으로 땅을 박찬 이장현.
하지만 이미 그의 옆구리엔 검은색 불길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일본도가 파고들고 있었다.
푸욱.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뜨겁고도 서늘한 기운.
이장현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같이 죽는다.’
독기가 일렁이는 시뻘건 안광.
먹이를 찾는 야수의 눈동자처럼 암혈의 주변을 훑은 이장현이 크게 몸을 뒤틀며 검을 휘둘렀다.
쉬익!
그 움직임에 암혈의 도가 이장현의 옆구리를 가르며 빠져나왔고.
검붉은 내장조각과 함께 붉은 선혈이 터져 나왔다.
푸 확!
시야를 가리는 핏물.
하지만 이장현은 확신했다 자신의 검이 암혈의 목을 가를 것임을.
“역시 조센징들은 맞아야 뭔가를 제대로 하는군.”
하지만 이장현의 그 확신이 깨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너…너?!”
암혈의 목을 가르기 위해 나아가던 이장현의 검은 암혈을 목 바로 앞에서 멈춰선 상태였다.
“이번에 새로 익힌 스킬인데 마음에 드나? 十五夜の月(만월)이라고 이름을 붙였지.”
“너…. S급이 아니었구나….”
SS급.
암혈이 만월이라 이름 붙인, 마나 디펜더는 SS급 각성자들만 익힐 수 있는 스킬이었다.
독기가 흐르던 이장현의 눈에 힘이 풀리고 목소리는 마치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힘이 빠져 있었다.
“나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다. 너희 열등한 조센징들과는 흐르는 피가 달라.”
아직 S급에 머무는 이장현을 조롱하기 위함이었을까?
암혈의 목소리에선 SS급 각성자가 된 강자의 여유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암혈의 말에 이장현이 아무런 말 없이 얼굴을 일그러트릴 때였다.
“네 몸속에는 뭐 피 대신 엘릭서라도 흐르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