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알까기 (4).
퐁.
허공을 부유하던 핏방울이 크롤러가 쏘아낸 가시에 찔려 흩날렸다.
알알이 작은 붉은 진주가 되어 허공을 수놓으며 흩어지는 핏방울들.
나는 그 모든 것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감각으로 느꼈다.
허공을 굴러 흩어지는 핏방울들 그와 함께 풍겨오는 혈향이 코점막을 자극했다.
비릿하고 짭짤한.
그리고 왜인지 모르게 달콤한 그 향기가 코끝에 머물다 흩어질 무렵.
흩어지는 핏방울 사이사이로 나는 볼 수 있었다.
두께 0.1㎜도 안 되는 가느다란 가시들이 쏘아져 오는 것을.
순간 내 몸에 난 모든 솜털이 삐쭉 곤두섰다.
티티티티팅!
그리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밀대를 휘둘러 그것들을 튕겨냈다
푸푸 푹.
물론 막아내지 못한 가시가 내 몸에 박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처음 크롤러의 공격에 노출되어 무기력하게 샌드백처럼 처맞기만 하던 것에 빙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시바…. 존나 아프네.’
날카로워진 감각만큼 성격이 날예민해진 걸까? 입에서 욕이 절로 나왔다.
이 정도 맞았으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아직도 살덩어리가 부식되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난 이제 좀 해 볼 만한데. 넌 어때?”
내 물음을 이해한 것일까?
크롤러들은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어쩌면 놈들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이대로라면 내게 패한다는 사실을.
그 위기감 때문이었을까?
꾸르륵-. 꾸르륵-.
내가 등을 대고 있는 벽을 제외한 모든 방위에서 압박하고 있던 놈들이 한 개체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꾸물꾸물.
밀가루 반죽을 치대는 것처럼 꿀렁거리며 뭉치던 놈들이 순식간에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를 이뤘다.
쿠르륵-!
지름 1m 남짓한 울퉁불퉁한 바윗덩어리 같은 모습을 한 놈의 몸체에서 길쭉한 가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러면…. 더 편해지는데.’
길고 날카로운 송곳과도 같은 가시들.
온몸을 빼곡하게 덮은 수백 개의 가시가 위협적이었지만 나는 놈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게 네 실수다.’
분명 크기도 크고 길이도 길고 날카로운 게, 위협적인 모습으로 변했다.
하지만 저 정도의 크기라면 그 공격이 눈에 보이지 않을 리 없다.
난 지금 오감을 날카롭게 갈아 놓은 상태니까.
슈슈슝-!
변화를 마친 놈의 몸체에서 수백 발의 송곳이 일시에 쏘아져 나왔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손은 눈보다 빠르니까.
나는 확장된 감각에 몸을 맡긴 채 무질서하게 양손을 휘저었다.
이렇다 할 검술도 배운 적 없고 검사계열 스킬도 익히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는 몸놀림이다.
티티티티팅!
하지만 결과는 내가 보인 움직임과는 달랐다.
그저 본능적인 움직임에 불과한 내 손짓에 놈이 쏘아 보낸 수백 개의 송곳 중 단 한 개도 내 몸을 스치지 못했다.
다시 송곳을 만들어 내는 크롤러.
전보다 덩치가 커져서인지 재장전을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것을 멀뚱히 지켜보고 있으면 병신이다.
타악!
등을 대고 있던 벽을 박차고 놈을 향해 날아갔다.
분화되어 있을 때라면 몰라도 저렇게 하나의 개체로 합쳐져 있을 때라면 놈은 내게서 도망갈 수 없다.
주먹만 한 크기일 때와는 달리 덩치도 1m 정도로 커졌지 않은가.
한마디로 때릴 곳이 많다는 거다.
아직 완벽한 송곳을 만들어 내지 못한 놈에게 다가선 나는 양손을 빠르게 휘둘렀다.
퍼펑!
마나를 머금은 밀대에 적중된 놈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떨어져나와 허공으로 녹아들며 사라졌다.
이 싸움.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
***
“후…. 쉽지 않아.”
크롤러와의 싸움을 끝낸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놈과 싸움 도중 부서진 아이템들이 대다수라 성한 아이템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멀쩡한 아이템을 찾아 정보를 읽어 내렸지만, 특별히 이거다 싶은 아이템은 없었다.
‘그냥 빠르게 청소를 마치고 빠져나가야겠군.’
한껏 끌어 올렸던 감각을 줄이자 갑작스럽게 적막이 내려앉은 것처럼 아공간 안이 고요해졌다.
피부를 자극하던 공기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자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감각의 영역을 넓혔던 부작용인가?’
여튼, 최대한 빨리 청소를 마치고 빠져나가야겠다.
사방이 꽉 막힌 이곳에 더 있다간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
-아공간 청소를 마쳤습니다. 결과를 집계 중입니다.
-아공간 청소율 100%. 보상이 지급됩니다.
-무작위로 해당 아공간의 아이템 하나가 인벤토리로 지급됩니다. 인벤토리를 확인해 주세요.
-보상으로 인벤토리가 확장됩니다.
-201→202.
-인벤토리 무게 한도가 증가합니다.
-201㎏→202㎏
“괜찮으십니까. 사령관님?”
아공간을 빠져나오자마자 인벤토리에서 꺼낸 씨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물어왔다.
하긴 내 몰골이 좀 개판이긴 하지.
“응 괜찮아. 일단 잠깐 쉬자.”
보상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나는 그대로 던전 바닥에 주저앉았다.
감각 영역을 확대했을 때 워낙 많은 주변 정보가 한꺼번에 머릿속에 들어온 탓에 지금까지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단 정리 좀 해보자. 이번 크롤러는 저번 녀석하고 유형이 다른 놈이었어. 그렇지?”
“먼저 상대하셨던 크롤러가 근거리 타격계라면 오늘 상대하셨던 크롤러는 원거리계열이라 봐야 할 정도로 그 공격방식이 달랐습니다.”
“그렇다는 건. 다른 아공간에 또 다른 유형의 크롤러가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지.”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명색이 내 전용 던전이기도 하고, 이대로 내버려 두면 다른 던전들처럼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던전 브레이크.
이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근처에 있는 청심원은 물론이고 다른 주민들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일이니까.
솔직히 이 던전에서 뭐가 튀어나올지도 모르겠고.
“이번 아공간 클리어 타임이 어떻게 되지?”
“1시간 37분입니다.”
‘그래도 많이 단축했네. 뭣 모르고 처음 들어왔을 땐 6시간 가까이 걸렸으니까.’
고개를 숙여 장비들을 확인했다.
거지가 형님이라 외쳐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넝마가 되어있는 몰골이 가관이었다.
결국 갑옷과 기타 장구류는 이미 제 기능을 상실했다.
상점 창을 열어 해피니스 청소부 전용 아이템을 뒤적거렸다.
[아이템: 해피니스 청소부 전용 작업복]
‘그나마 이게 크롤러를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되려나?’
혹시나 하는 한 가닥 기대를 걸어 작업복을 구매했다.
온통 연두색 형광에 군데군데 반짝이가 붙어있는 작업복.
이나마도 머리를 가릴 만한 건 없었다.
‘좀 멋지게 만들어 주면 덧나냐?’
내심 투덜거렸지만, 아무 의미 없는 짓이란 건 나도 알고 있다.
내 취향 따윈 절대 고려해 주지 않을 테니까.
그나마 방법이라면 작업복위에 그럴싸한 갑옷 하나를 걸쳐 입는 건데. 나 말곤 아무도 없는 전용 던전에서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다.
작업복을 챙겨 입은 나는 다시 씨드를 거둬서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럼 또 시작해 볼까?”
내 눈길이 향한 곳엔 짙푸른 빛을 발하는 아공간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
아공간에 들어온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변을 살피는 것이었고 그다음으로 한 일은 아공간에 있는 아이템을 살피는 일이었다.
혹여 S급 아이템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쿠울란의 발톱을 얻은 것이 초심자의 운이었던 듯. 최고등급 아이템은 B급에 불과했다.
‘이거라도 어디냐.’
각성자 스토어에서 B급 장구류를 구매하려면 최소 30억은 줘야 한다. 그것도 세트가 아닌 파츠 하나의 가격이 그 정도다.
그렇게 아이템들을 확인한 나는 인벤토리에서 수수께끼 알을 꺼냈다.
쉬익!
쥐고 있던 손아귀의 힘을 풀자 아이템을 향해 포탄처럼 쏘아져 나가는 녀석.
아공간 안에 수수께끼 알을 풀어 놓은 뒤에야 나는 크롤러들의 모습을 살폈다.
그래도 두 번 놈들을 상대해 봤기에 가능한 여유였다.
이전에 상대했던 다른 녀석들과 별다를 게 없이 아공간의 파편을 주워 먹는 데 여념이 없는 크롤러.
하지만 이렇게 봐서는 놈들의 특성을 알 수 없다. 놈들의 참모습은 균열을 건드린 후에 드러나니까.
쉬익.
그사이 금속재 아이템을 다 먹었는지 수수께끼 알이 내게 날아왔다.
‘이건 뭐 강아지도 아니고.’
내가 착용한 아이템 중 금속이 들어간 게 없어서인지 먼젓번과는 달리 얌전했다.
꼬리라도 있었으면 프로펠러처럼 흔들 기세였다.
되돌아온 녀석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후 양손에 밀대를 쥔 나는 조심스럽게 균열을 건드렸다.
그 순간 나를 돌아보는 녀석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소름이 돋는다.
마치 검은 어둠이 나를 직시하는 느낌이다.
이내 균열에서 떨어져나온 녀석들이 형태를 변환했다.
길고 날카로운 검, 혹은 칼의 모양을 한 크롤러.
나는 재빨리 몸을 이동해 아공간 벽을 등지고 놈들을 노려봤다.
이전 녀석이 암기를 던지는 놈이 암살자 유형이었다면, 이번엔 검사유형인가보다.
쌔액!
변화를 끝낸 크롤러가 나를 향해 쇄도해 왔다.
크고 작은 40여 개의 칼날.
“죽겠네…. 진짜.”
앓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잘못 베이면 죽을 것 같았다.
나는 40명의 검사에게 협공을 당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고.
기껏 챙겨입은 작업복은 크롤러의 칼질에 허망하게 찢겨나갔다.
***
던전에 들어온 지 어언 12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식사도 도시락으로 때우며 아공간을 공략했다.
그동안 내가 상대한 크롤러의 형태는 정말 다양했다.
처음 상대했던 탱탱볼 같은 녀석과 고슴도치 녀석은 물론이고, 세 번째로 상대한 칼날 녀석과 몸을 길게 늘여 채찍처럼 휘두르는 녀석, 정말 다양한 형태의 크롤러를 상대해 볼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정말 많은 유형의 적들과 대적해 보는 경험을 얻었다.
아무리 헌터라도 누가 살면서 40여 명의 협공을 받는 경험을 해 보겠는가.
나는 매번 아공간을 들어갈 때마다 그와 유사한 경험을 하고 있다. 그것도 매번 공격 형태를 바꿔가며.
덕분에 나는 감각의 영역을 단련하고 그동안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던 스탯에 적응할 수 있었다.
그간 몬스터들을 상대하면서 느낄 수 없었던 나의 부족한 부분을 크롤러를 상대하면서는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힘과 속도의 적당한 배분.
마냥 빠르고 강한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그렇게 나는 크롤러와 싸우며 그 모든 깨달음을 몸에 새겨 넣을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원한 건 아니었다. 싸우다 보니 찾은 방법이 그런 것일 뿐.
“그나저나. 이 녀석 이젠 배가 부른 건가?”
나는 손에 쥔 수수께끼 알을 내려다봤다.
“이제 인벤토리 안에서 너를 쫓아다니지도 않는다고?”
“네 사령관님. 잠이라도 든 것처럼 조용합니다.”
마지막 아공간부터 아이템을 먹지 않더니 이젠 씨드를 쫓아다니지도 않는단다.
“그럼 이제 정말 한계점에 다다른 거라고 봐도 되겠지?”
[아이템: 수수께끼 알]
[등급: A급]
녀석의 등급은 아직도 A급에 머물러 있었지만, 더 이상 금속 아이템을 먹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만간 뭔가 변화가 일어날 것 같았다.
‘S급으로 올라가던지, 아니면 이대로 나가리 되던지.’
그간 먹인 아이템이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S급 스킬을 얻을 수만 있다면 아쉬울 건 없었다.
하지만 S급으로 승급하지 못하고 이대로 A급에 머문다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손해가 아닐 수 없었다.
돈은 돈대로 쓰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얻는 게 A급 스킬이라면 눈물이 날 것 같다.
거기에 아공간 안에 있는 아이템 중 탐이 났지만, 녀석에게 먹이로 줘야 했던 아이템도 한둘이 아니었으니 A급 스킬을 얻게 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물론 녀석이 흡수하지 않았다면 부숴버려야 할 아이템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그렇게 내가 도시락을 까먹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템: 수수께끼 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어?! 갑자기?”
도시락을 까먹기 전에 확인한 수수께끼 알의 등급은 A급.
하지만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는 건 뭔가 변화가 생겼다는 걸 의미했다.
나는 먹던 도시락을 밀어둔 채 수수께끼 알을 손에 쥐었다.
[아이템: 수수께끼 알]
[등급: S급]
[설명: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 알. 성장형 아이템 쿠울란의 발톱을 흡수해 성장을 완료했다. 사용 시, 스킬: 금식충(金食蟲) S (LV 1)을 습득할 수 있다.]
“S, S급 떴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로또에 당첨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로또를 사는 것이다.’ 나는 방금 로또를 구매한 셈이다.
1등에 당첨이 되진 않았지만 일단 구매하는 것만으로도 당첨자 발표일까지 ‘내가 이것만 당첨되면 이딴 회사 때려치운다.’라는 마음을 먹을 수 있게 해 주는 로또를.
그리고 나의 로또는 당첨확인을 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아이템: 수수께끼 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N
톡.
그저 버튼 하나만 누르면 확인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