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43화 (43/202)

43. 아빠 없는 하늘 아래 (3).

강현이 서류봉투를 열어보고 있던 그 시각.

구정철 또한 같은 내용을 보고 받고 있었다.

수하의 보고에 구정철은 표정을 구긴 채 입가를 손수건으로 훔치며 답했다.

“크으…. 일이 좀 복잡하게 꼬였군.”

“네.”

구정철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쓴 차 맛에 아직도 혀끝이 아릿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통각을 차단했는데도 이 정도 쓴맛이라니, 독극물인 줄 알았다는 강 회장의 말이 농담이 아니었군.’

하지만 효과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강 회장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검버섯이 사라진 것을 직접 눈으로 봤으니까.

“싸울아비 쪽에선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은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싸울아비.

대한민국 10대 길드 중 하나이며 전라도를 대표하는 길드.

전라도를 대표하는 싸울아비 아래로 전라도의 모든 길드가 집결해 있으며 이는 전라도계라고 불렸다.

그렇기에 구정철의 걱정은 당연했다.

10대 길드 중 하나이며 경상도계를 대표하는 화랑에서 김상욱 사건과 관련된 정보를 열람했고, 그 보고는 이번 일과 연관이 있는 싸울아비에도 들어갔을 테니까.

톡. 톡.

집사가 가져온 각종 단것을 입안에 집어넣던 구정철은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두드렸다.

깊은 생각에 잠길 때 드러나는 그의 습관이었다.

“강현 그 친구에게도 이 사실을 모두 전했나?”

“10대 계파와 관련된 일이라 그저 간략한 개인 정보만 전달했습니다.”

“흠…. 하필이면 왜 그 일과 관련된 정보를 요구한 건지 모르겠군. 강현과 김상욱은 접점이 없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네.”

“우리가 나서면 싸울아비 쪽에서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겠지?”

“잘못하면 길드전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계파내의 길드 후계자가 관련된 일이잖습니까.”

그림자의 말에 구정철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이 커지면 계파 간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말이지….”

“그렇습니다.”

계파 간 전쟁.

그건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전라도계와 경상도계, 싸울아비와 화랑을 따르는 모든 길드가 전쟁을 시작한다는 소리였으니까.

여기에서 일이 커지면 충청도와 강원도의 길드들이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을 테고, 그렇게 되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대한민국 땅덩어리 내에서 각성자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일단…. 한 발 빼도록 하지. 싸울아비 쪽에도 연락하도록 하고.”

“네. 마스터.”

“하지만, 만일 강현 그 친구가 우리 도움 없이 진실에 닿게 되면 뒤처리를 확실하게 해 주도록 해.”

구정철은 탁자 위에 놓인 텅 빈 찻잔을 보며 말했다.

“찻값은 해야지.”

“…네. 마스터.”

그림자가 사라지고 구정철은 거실 천장을 올려다봤다.

피로 얼룩진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어떻게 찾은 평화인데…. 전쟁이라니 안 될 말이지…….”

길드, 화랑의 전대 마스터로서도, 대한민국의 전 대통령으로서도 전쟁은 없어야 했다.

***

‘이 사람들이란 말이지.’

집으로 들어온 나는 서류 속 사람들의 프로필 하나하나를 읽어 내려갔다.

김상욱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 자들.

불암산 F급 던전에 들어간 건 김상욱을 포함한 여섯 명이었다. 그리고 던전을 탈출한 것은 네 명.

서포터인 여성과 김상욱은 던전 안에서 사망해 시체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 네 놈은 생채기 하나 없이 던전을 탈출했다.

‘생존자들의 증언대로라면 희든 보스 여왕개미가 떠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생긴 불가피한 희생이었다는 건데.’

분명 놈들이 작성한 진술서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렇지만 해피니스 시스템이 준 퀘스트는 김상욱의 죽음이 동료의 배신에 의한 억울한 죽음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서류들보다 시스템을 더 신뢰한다.

‘이 새끼들 중에 범인이 있다는 소리네. 아니면 전부 한통속일 수도 있고.’

그리고 퀘스트 내용 중에 ‘파티원들의 배신’이라는 부분이 있었으니 범인은 하나가 아니라는 소리고 이렇게 네놈의 증언이 일치하는 거로 봐서는 한통속인 게 분명해 보였다.

“씨드.”

“네, 사령관님.”

“이 네 사람. 정보 좀 찾아봐.”

프로필에 있는 건 간략한 개인 정보였다.

이름과 나이 그리고 각성한 직업과 사는 곳 정도가 담긴. 천억짜리 정보라기엔 비루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사진과 인적사항이 있으니 씨드라면 어렵지 않게 이들의 정보를 찾아낼 거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SNS 따위는 하지 않던 김미소의 정보도 어렵지 않게 찾아냈으니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씨드는 내 기대에 부응해 만족할 만한 정보를 찾아냈다.

***

“그러니까. 이 네 놈이 모두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거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전라도에 존재하는 길드의 후계자들입니다.”

“무안, 목포, 영암. 나주?”

“네. 각 지역을 대표하는 길드의 후계자들 모임인 ‘잠룡회’에서 만난 이들은 곧 함께 뭉쳐 다니며 꽤 많은 사고를 친 듯합니다. 하지만 이미 그 전부터 각 지역 내에선 망나니로 유명했습니다. 단지 그 부모들이 지닌 힘으로 사건을 막아 이슈화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잠룡회라니, 나도 작명 센스가 꽝이지만 저쪽도 영 별로인 듯싶었다.

“그 망나니들이 굳이 서울까지 와서 설치는 이유가 뭐지?”

“일종의 유학(遊學) 개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유학?”

“잠룡회에 속한 지방 길드의 후계자들이 서울에 모여 친목을 다지는 게 일종의 관례인 듯합니다.”

“인맥 형성과 교류 목적이란 말이지?”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차기 길드장들이니 미리미리 인맥을 만들고 교류를 가지라는 뜻에서 잠룡회라는 모임을 만든 것이리라.

그런데 이 잡놈들은 하라는 교류와 인맥 쌓기는 안 하고 왜 살인을 저지르고 다닌단 말인가.

“그들의 대화 내용입니다.”

씨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떠오른 홀로그램.

그곳에는 그 네놈이 메신저로 나눈 대화가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대화 내용을 읽은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쓰레기 새끼들이….”

그 대화 내용을 보면 그들의 범죄 행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최소 10차례.

그들의 주된 표적은 홀로 파티를 구하는 여성 각성자들이었다.

즉, 김상욱 사건 당시, 표적은 서포터 여성이었다는 의미다.

김상욱 같은 경우는 운 없이 그들의 범죄행각에 말려든 것이고.

하지만 그들은 10번의 던전 살인 범죄 중, 단 한 건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피해자가 없고 증거도 증인도 없으며 그들의 부모가 각 지역을 대표하는 중견 길드의 길드장이었으니까.

“어떻게 10번이나 되는 범죄가 일어났는데 제대로 된 조사를 받은 게 단 한 건도 없는 거지….”

머리로는 어찌 된 일인지 이해가 됐지만, 감정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법이 제대로 심판했다면 사형을 받아도 모자랐을 것들이 지금도 버젓이 얼굴을 들고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이놈들 지금 뭐 하고 있지?”

“다음 범죄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씨드의 말과 함께 떠오르는 최근 대화 내용.

탄력이 붙은 놈들의 범죄행각은 점점 주기가 짧아지면서 동시에 대범해지고 있었다.

처음 이들의 목적이 여성 각성자를 강간하고 살해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살인’ 그 자체에 목적을 둔 듯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있었다.

살인이라는 행위에 중독되기라도 한 것처럼.

대화 내용을 볼 때 이들의 다음 범행 날짜는 내일.

시각은 열 시. 서울역 E급 던전에서였다.

‘이 새끼들 엿 먹일 좋은 방법이 없을까?’

대화 내용을 보니 이미 서포터와 부족한 파티원을 채운 모양이었다.

아마 이들이 내일 희생양일 것이다.

‘이놈들이 범죄를 벌이는 현장을 덮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한데.’

그러려면 이들과 함께 던전을 들어가야 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놈들과 함께 던전에 들어가거나, 함께 던전에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놈들에게 엿 먹일 방법을.

***

하암-.

날밤을 꼬박 새웠더니 주체할 수 없이 하품이 나왔다.

“사령관님. 타깃들이 이동 중입니다.”

어떤 방식을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씨드는 놈들의 헌터 와치를 해킹하는 데 성공했고 실시간으로 놈들의 위치정보를 전해 받고 있었다.

“위치는?”

“대화 내용으로 보아 서울역에서 모일 것으로 보입니다.”

씨드의 보고를 받은 나는 준비를 시작했다.

놈들의 집안이 가진 힘으로도 빠져나가지 못할 완벽한 빅 엿을 먹일 준비를.

“그럼 우리도 가자.”

인벤토리에 모든 걸 챙겨 넣은 후, 드론을 타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서울역 광장 앞.

놈들은 이미 모여앉아 희희낙락하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나는 놈들과 약간 거리를 벌린 채 조용히 주시했다.

거리가 있었지만, 놈들의 머리 위에 띄운 샤이닝 에로우 덕에 대화를 엿듣는 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비가시 모드를 개방한 건 정말 신의 한 수였다. 이렇게 쓰일 줄 몰랐지만.

“야. 오늘 물 어떨 것 같냐?”

가죽 갑옷 입은 궁수로 보이는 놈이 묻자, 푸른색 로브를 걸치고 지팡이를 든 마법사로 보이는 놈이 그 말을 받았다.

“아무래도 지난번보단 싱싱하지 않겠어요? 나이도 어리니 더 팔딱팔딱할 테고.”

“난. 어린 고기보단 좀 숙성된 게 좋더라. 회 치기 편하잖아.”

놈들이 나누는 대화는 언뜻 들으면 횟감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만 그 대상이 누군지는 명확했다.

“아-. 그런데 이것들은 왜 이렇게 늦어. 하여튼 근본 없는 것들은 약속의 중요성을 몰라요. 시간 약속을 딱딱 지켜야지 말이야.”

투덜거리는 탱커의 말에 검사로 보이는 녀석이 대꾸했다.

“새끼야 너는 인내심 좀 길러라. 기다리면 어련히 알아서 올까.”

“누가 누구보고 인내심을 기르래. 저번에 약도 안 쳤는데 바지부터 벗어젖힌 게 누군데.”

“아 그땐 정말 어쩔 수 없었다니까? 너도 내 스타일 알잖아.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참냐.”

“미친 새끼. 낄낄낄.”

처음 사람을 생선과 횟감에 비유하던 놈들의 대화는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 갔지만, 주변의 누구도 그들의 대화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경호원들이군.’

그들의 주변으론 경호원으로 보이는 이들로 인해 인의 장막이 처져 있었으니까.

언뜻 보면 일행이 아닌 듯 분산되어 흩어져 있었지만, 그 경호원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놈들에게 접근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나름 지역에서 힘 좀 쓰는 길드들이라 이건가?’

지역 길드의 후계자들이라더니 경호 인력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때였다.

택시에서 내려 헐레벌떡 뛰어오는 여자가 보였다.

나이는 이십 대 중반쯤. 걸치고 있는 로브와 지팡이로 보아 힐러로 보였다.

경호원들과는 이미 얘기가 되어 있었던 건지 그녀는 행인으로 위장한 경호원들 사이를 아무런 제지 없이 지나쳐 놈들에게 도달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빨리 온다고 택시 타고 온 건데. 사고가 났는지 차가 좀 막혀서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힐러를 향해 놈들은 신사라도 되는 양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희도 방금 도착했어요.”

“늦은 것도 아니죠. 아직 헌팅 시간도 안 됐는데요. 뭘.”

‘힐러는 도착했고. 남은 건 서폿인가?’

보통은 서폿이 먼저 도착해 파티를 기다리기 마련인데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서폿은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그나저나 서포터 분이 늦으시는 것 같은데. 연락해 봤어?”

“아까 메시지 보냈을 땐 곧 도착한다고 했어요. 아직 시간 여유 있으니까 조금 더 기다려 보죠.”

조금 전까지 살인과 음담패설을 입에 담던 놈들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신사적인 모습.

나는 헛구역질이 올라오려는 것을 안간힘을 써 가며 참아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공략을 마친 이전 파티가 나오고 던전 청소부들이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서포터는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아…. 이 사람 못 올 것 같다는데요?”

“응? 왜?”

“오다가 교통사고가 났는데 그 뒤처리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고 있대요. 다른 서폿을 구해야 할 것 같아요.”

“그걸 아까 말해야지 왜 지금 말한대? 참 예의 없는 사람이네.”

“뭐 서폿 없이도 충분히 클리어할 수 있는 던전이니까 상관은 없는데. 어떻게? 다른 서폿 구해?”

“지금 서폿 구한다고 바로 구해지겠어? 이대로 들어가야지.”

“그래도 일단 공고는 올려 보죠?”

놈들은 매우 아쉬운 얼굴로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을 본 나는 알 수 있었다.

놈들이 아쉬움을 표하는 건 살인을 할 대상이 줄어든 것에 대한 아쉬움이라는 걸.

“그럼…. 오늘 헌팅은 접는 건가요?”

놈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힐러가 그렇게 묻자 마법사 로브를 입은 녀석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를 달랬다.

“에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급구로 서폿 구하면 금방 구해져요. 여기가 뭐 시골 촌구석도 아니고. 던전에 들어갈 서폿 하나 없겠어요?”

놈이 그렇게 말하면서 주변에 행인으로 위장하고 있는 경호원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아무래도 경호원 중 한 명을 서폿으로 위장시키려는 모양이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계획을 바꿨다.

원래 계획은 시스템 상점에서 구매한 스파이캠을 이용해 놈들의 살인 행각을 인터넷 방송으로 생중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직접 던전에 들어갈 기회가 생겼는데 굳이 다른 이의 무고한 죽음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헌터 와치를 조작해 프리몬에 접속하자 놈들이 띄워놓은 급구 게시물이 상단에 보였다.

나는 그곳에 적혀있는 놈의 연락처로 메시지를 보내며 비릿하게 웃었다.

내 직업은 청소부.

이제 인간쓰레기들을 치워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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