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34화 (34/202)

34. 다시 던전으로.

주석원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눈으로 자신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상자를 바라봤다.

벌써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

그가 예쁜 꽃 모양의 리본으로 장식된 상자를 발견한 것은 외부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오후 6시쯤이었다.

그리고 자정이 되도록 그는 그 누구도 집무실에 들이지 않은 채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배달된 상자 안의 내용물을 보며.

‘늙은 호랑이가 아직 이빨이 빠지지 않았단 말이지….’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잘린 손이었다. 집게손가락에 굵은 황금 반지를 끼고 있는.

그리고 그 손의 주인은 주석원도 잘 아는 자였다.

자신이 음지의 일을 처리할 때 부리던 그림자.

그리고 그에게 선물한 아이템 중 하나가 바로 저 황금 반지였다.

그렇기에 손의 주인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역시 비현(秘現)…. 늙은 호랑이의 사냥개들. 놈들의 작품인가? 그림자는 죽었다고 봐야겠군…….’

주석원은 자신이 부리던 수하의 죽음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일을 시키면서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였으니까.

자신의 그림자가 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해도 40년이 넘게 대현을 지켜왔다는 조직, 비현에 비할 바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건 경고인 건가…. 함부로 설치지 말라는.’

주석원은 수하의 손이 들어있는 상자의 뚜껑을 덮었다.

아까운 수하를 희생하고도 얻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 안심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회(會)에 변명할 변명거리는 만들었군.’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상황이 바로 그가 원하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는 애초에 그림자에게 명령을 내리면서도 그림자가 자신이 원하던 정보를 가져올 거라고 믿지 않았다.

단지 회에 보여주기 위한 변명거리가 필요했을 뿐.

‘이만큼 노력했지만 내가 가진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라는 재스쳐 말이다.

회에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대현과 같은 대기업과 맞서기엔 주석원이 가진 힘이 미약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그것이 대외적으로 보이는 위상의 차이든 숨겨진 힘의 차이든.

‘어쩌면 이번 일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이 더 커질지도 모르지.’

상대가 그 ‘대현’이라면 회에서도 주석원이 가용할 수 있는 회의 인원을 늘려 주리라.

그것이 주석원이 원하는 바이기도 했고.

그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회주님의 실망이 큽니다. 주 회장님….”

아무도 없어야 할 회장실, 주석원의 등 뒤에서 그림자가 일렁이며 형체를 갖춰 갔다.

“이번 일에 얼마나 많은 회의 자금이 투입되었는지는 본인이 더 잘 아실 테고….”

사람의 형체를 갖춘 그림자는 팔을 뻗어 주석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다른 무엇보다 이번 일에 기대가 크셨던 회주님께서 소식을 듣고 참 크게 실망하셨습니다. 주 회장의 충성심을 의심하시더군요. 주 회장이 일부러 정보를 흘린 것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턱.

천천히 주석원의 어깨를 쓰다듬던 그림자 사내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크윽.

천천히 주석원의 어깨를 그러쥐는 그림자 사내.

주석원은 바스러질 듯한 어깨의 고통에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목구멍 너머로 집어삼켰다.

‘하필이면 이자가 올 줄이야.’

계획했던 일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회에서 사람이 오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설마 신풍대(神風隊)의 대주가 직접 올 줄 몰랐다.

회주가 자신의 충성심을 의심할 줄은 더더욱 몰랐고.

“그, 그런 일은….”

주석원이 입을 열어 무언가 변명의 말을 꺼내려던 그때.

그림자 사내가 어둠으로 일렁이는 머리를 주석원의 귓가로 가져갔다.

“쉬이-. 나는 아직 당신에게 입을 열라 명령한 적이 없어. 주 회장….”

서늘하고도 눅눅한. 미묘하게 말끝을 흐리는 사내의 목소리가 끈적한 입김과 함께 주석원의 귀를 파고들었다.

오싹.

그 목소리를 들은 주석원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어이. 주석원…. 회장직에 십몇 년 앉아 있더니 머리라는 게 생겼나 봐? 변명이라는 걸 할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사내의 물음에 주석원은 아무런 대답 없이 침을 꿀꺽 삼켰고.

회장실엔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래…그래야지…. 개새끼면 개새끼답게, 짖으라 하기 전까지는 짖지 않는 거야….”

그림자 사내. 신풍대의 수장 ‘암혈’은 마치 말 잘 듣는 개를 칭찬하듯 주석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야말로 굴욕적인 일이었지만 주석원은 미동도 없이 그 모든 것을 감내했다.

만일 지금 입을 연다면 자신은 반드시 죽을 테니까.

그의 태도에 만족한 듯 암혈은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마….”

그의 어투가 하대로 바뀌고.

“쓸데없이 늙은 호랑이의 이목을 끌만한 짓거리…. 같잖은 변명 거릴 만들 생각 따위….”

권위적으로 변했다.

“하지 마.”

일체의 반문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맺은 그는 이내 허리를 폈다.

“이번 일은 모두 우리 신풍대가 처리할 거야. 그러니 쓸데없는 짓거리로 우리 임무를 방해한다면….”

그렇게 말을 흐리던 암혈의 몸이 일렁거리며 흐릿해져 갔다.

“그 뒤는 너의 상상에 맡기지….”

그 말을 끝으로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 암혈.

주석원은 그가 떠나갔다는 걸 알면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차갑게 가라앉았던 회장실 내의 공기가 다시 생기를 되찾았지만, 그는 한참을 미동도 없이 있다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회주의 개새끼 따위가….”

지금껏 살아오며 느껴본 적이 없던 굴욕.

대상이라는 거대기업을 이루고 나서는 느껴 볼 일이 없었던 감정이 파도가 되어 그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으득.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이를 악무는 것뿐.

대상그룹의 시작은 회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으니까.

그가 암혈에게 반발한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그는 소리 소문도 없이 죽어 없어지고, 새로운 허수아비가 이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러한 굴욕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주석원이 굴욕을 되새김질하고 있을 때였다.

“킥킥….”

허공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며 날카로운 살기가 주석원을 향해 쏘아져 왔다.

“그래. 나도 회주님의 개지…. 하지만 잊지 마라. 주석원. 너는 집 지키는 번견(番犬)에 불과 하지만 나는 투견(鬪犬)이라는 걸….”

“…….”

“너의 그 야들야들한 목덜미를 물어뜯는 건 내게 그리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도…. 크큭.”

다시 존재감을 드러냈던 암혈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주석원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닌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한 가지 생각 때문이었다.

토사구팽.

‘나도 이대로 솥에 들어가 삶아질 생각은 없다. 이 개새끼야.’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었다.

***

다시 찾은 불암산 던전 앞은 저번과 달리 한산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나.

내가 오늘 열 시간 예약을 걸고 사용료를 미리 입금했기 때문이었다.

인기가 많은 던전이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불암산 F급 던전은 난이도는 높고 그 보상은 그다지 좋지 못한 던전 중 하나였다.

F급 헌터들이 한두 번 사냥하며 곤충계열 몬스터들의 사냥 법을 익히는 던전이랄까?

덕분에 내가 10시간을 예약했음에도 각성자 센터에서는 흔쾌히 예약을 잡아주었다.

추가금을 주고 열 시간이나 쓰겠다는데 누가 거부할까.

전 타임 헌팅이 완료됐는지 던전 청소부들이 보이지 않는 것도 던전 앞이 한산한 이유 중 하나였다.

저벅저벅.

무거운 걸음을 이끌고 도착한 컨테이너 앞.

대기하는 헌터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간이 테이블과 함께 있는 의자에 앉아 잠시 멍을 때리니 던전 입구에서 사람들이 마법 운반기를 끌고 쏟아져 나왔다.

던전 청소를 마친 모양.

‘흠. 그런데 코어는 누가 부수는 거지?’

원래라면 코어를 부술 파티원이 대기 중이어야 할 이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때였다.

던전 입구가 사라지면서 한 사람이 입구가 있던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도 청소부들과 함께 던전에 들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인벤토리의 아이템을 다시 체크하며 던전 입장을 준비하던 내 앞에 조금 전 던전을 빠져나온 사람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현이 형. 여기서 또 뵙네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바짝 들이미는 사람.

이해찬이었다.

밝고 싱그러운,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나이대의 그 얼굴엔 여전히 그늘이 없었다.

전형적인 금수저 같달까?

본능적인 거부감에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건 이해찬의 행동이 불쾌해서가 아니다.

아무래도 이해찬의 캐릭터가 나와 정반대이다 보니 생기는 거리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뒤로 물러서는 내 모습을 본 이해찬의 얼굴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제가 좀 버릇이 없었죠?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형.”

시무룩한 이해찬의 모습은 마치 강아지 같았다.

그 왜, 해외 유튜브에서 많이 보이는 골든래트리버라는 강아지 말이다.

“아. 괜찮아. 내가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내 말은 들은 이해찬은 그제야 방긋 웃음을 지었다.

‘참 알기 쉬운 꼬마네.’

표정에 모든 게 다 드러나는 이런 유형의 사람은 또 오랜만이었다.

아마도 안전한 울타리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인 것도 있을 거다. 돈에 쫓겨 살아본 적이 없어 보인달까?

“에헤헤-. 그럼 다행이고요. 그런데 이번엔 혼자 들어가시는 거예요?”

그 물음에 나는 가볍게 발을 굴렀다.

쿵.

“아무래도 이것 때문에 다른 분들에게 민폐니까.”

이해찬은 ‘아’ 하고 탄성을 내지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기도 하겠네요. 형 정말 잘 싸우시던데…. 어지간한 탱커보다도 안정적이셨어요.”

이해찬의 말에 난 쓴웃음을 지었다. 청소부란 직업이 두 개나 되는 놈에게 탱커라니.

인정할 건 인정하자.

각성자 센터가 인정한 청소부라는 직업과 시스템이 인정한 해피니스 청소부라는 직업.

어찌 됐건 난 청소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인벤토리를 청소할 때도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지 않던가.

잠시 뭔가를 고민하는 듯하던 이해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 그럼. 형 파티에 저 좀 끼워 주시면 안 돼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같이 다니던 파티는 어쩌고?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이해찬은 그 이유를 설명했다.

“형이랑 전에 같이 했던 파티가 해체됐거든요. 형석이 형이 태산 길드로 스카우트 돼서 가는 바람에….”

“아….”

파티 리더이자 탱커인 최형석이 길드에 스카우트가 되었다면 파티가 해체되는 것도 이해가 됐다.

보스 방을 공략하면서 보여 줬던 그의 헌팅 리드는 충분히 길드에서 탐낼 만한 실력이었거든.

파티의 메인 탱커와 리더가 빠진 격이니 파티는 당연히 해체 수순을 밟을 수밖에.

“그래서 오늘 새 파티를 구해 손발도 맞춰볼 겸 헌팅을 하긴 했는데. 저랑은 좀 안 맞는 것 같아서요. 아! 꼭 그런 이유로 형과 파티를 하고 싶다는 건 아니고요. 형 헌팅 방식이 워낙 인상 깊기도 하고 안정적이어서 여쭤본 거예요. 어떻게 안 될까요?”

‘하긴, 10분마다 3억을 태우는 헌팅 방식이 인상 깊지 않기도 힘들지.’

내가 이해찬의 제안에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강현 씨 파티! 입장하시면 됩니다!”

던전 입장을 종용하는 게이트 키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 일단 연락처 좀 알려줄래?”

나는 그렇게 말하며 헌터 와치를 착용한 왼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바라본 이해찬은 반색하며 자신의 헌터 와치를 내 왼손에 가져다 댔다.

띡.

“감사합니다. 형. 오늘 헌팅 잘하세요. 파이팅!”

“그래. 나중에 연락할게.”

‘파티라…. 나쁘지 않아.’

사실 이해찬 정도의 데미지를 줄 수 있는 F급 마법사도 흔한 편은 아니었다.

여왕개미를 사냥할 때도 파티 데미지의 절반 정도는 이해찬에게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풀 도핑을 해 가며 여왕개미의 어그로를 끈 내 덕에 그런 무지막지한 화력을 투사할 수 있었겠지만.

거기다 내게 목숨 빚이 있는 녀석이니 다루기도 수월할 것 같았다.

내 무운을 빌어주는 이해찬을 뒤로하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검은빛이 일렁이는 던전의 입구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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