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32화 (32/202)

32. 뽑기는 도박이 아니다 (2).

“하아….”

극도의 허탈감이 몰려왔다.

“…씨바.”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분노가 욕설과 함께 내뱉어졌다.

“정말 나한테 이러기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온몸의 근육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일까?

뽑기 박스를 노려본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거실 바닥에 아이템들을 쏟아냈다.

하나, 둘, 셋…사십구.

50개 중 49개가 같은 아이템이었다. 정확히는 같은 종류의 다른 아이템.

나는 손 위에 들린 아이템을 부숴버릴 것처럼 움켜쥐었다.

길이 80㎝ 폭 1㎝.

끝이 날카로운 쇠꼬챙이 뒤꽁무니에 네 방향으로 깃이 달린 이것은 누가 보기에도 화살과 흡사했다.

그리고 이 화살이 내가 화를 내는 이유였다.

[아이템: 퇴역한 우주 전함. 샤이닝 에로우 No49.]

[등급: F급]

[설명: 퇴역한 우주 전함이다. 아주 기초적인 마나석 엔진이 장착되어있다.]

[추가설명: 가동이 되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낡은 전함이다. 기본적인 AI가 설치되어 있으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한 번에 10포인트씩 50번.

그중 처음 한 번을 제외한 49번이 이 빌어먹을 우주 전함이 나왔다.

이 화살이 왜 우주 전함으로 불리는지는 내 알 바도 아니고 궁금하지도 않다.

‘중요한 건 이게 마흔아홉 개나 나왔다는 거지. 50개 중에 마흔아홉 개나.’

나는 화살에서 시선을 돌려 보유 포인트를 확인했다.

[보유 포인트: 13.3]

13포인트.

뽑기 한번을 돌릴 수 있는 포인트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뽑기 박스를 노려봤다.

투명한 박스의 표면에 비친 붉게 충혈된 두 눈이 흉물스럽다.

도박에 미친 폐인이 저럴까 싶었다.

그래도 처음 열 번은 제물이라고 생각했다.

대박이 터지기 위해서 나오는 똥망템.

하지만 그게 20번 30번이 넘어가자 내 얼굴이 똥색이 돼갔고, 본전 생각에 오기가 생겼다.

‘니가 어디까지 나오나 보자.’라는

오기가 생겨 기계적으로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50번의 뽑기로 얻은 건 49개의 샤이닝 에로우와 처음에 나왔던 아이템, 힘의 묘약이었다.

애초에 처음 뽑기를 했을 때 힘의 묘약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지르지도 않았을 텐데, 하는 원망도 해 봤지만 쓰잘때기없는 짓거리다.

결국, 버튼을 누르는 선택을 한 건 나니까.

‘마지막이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번에도 안 터지면 두 번 다시는 이 뽑기 박스 쳐다도 안 볼 거야.’

여느 도박중독자와 같은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고 나서 다시 떨리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10포인트를 소모하여 뽑기를 하시겠습니까?

[Y/N]

톡.

예스 버튼을 누르자 박스 속 구슬들이 모두 허공으로 떠올랐다.

무료 이용권까지 포함하면 벌써 52번째 보는 광경이라 이젠 흥미로울 것도 신비로울 것도 없었다.

‘제발.’

나는 허공에 떠오르는 구슬들을 보며 그저 두 눈 꼭 감고 기도를 했다.

제발 대박 좀 떠달라고.

‘이 정도 똥 쌌으면 이젠 좋은 거 줄 때도 됐잖아? 제발….’

하지만 신은 내 기도를 듣지 않았고, 시스템은 믿음을 배신했다.

[아이템: 퇴역한 우주 전함. 샤이닝 에로우 No 50.]

슬며시 눈을 뜬 내 앞에 떠 있는 아이템 설명은 이미 내가 외울 정도가 되어버린 샤이닝 에로우 No 50이었다.

“하… 너무하네! 진짜! 이게 확률적으로 말이 되는 거야?! 저 많은 것 중에 50번이 같은 게 나온다고?!”

나는 아무리 외쳐도 시스템이 듣지 않을 걸 알았지만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주작 아니야? 주작 아니냐고오-!!”

안 그러면 정말 뚜껑이 열릴 것 같았거든.

그렇게 허무한 나의 외침이 허공에서 흩어지고 있을 때였다.

“…##$%$%$#…….”

“%@#%^…$!$!%…….”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세한 소음이 내 귓가를 간질였다.

마치 이명과 같은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작고 작은 목소리.

나 말곤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막 변성기를 지난 듯한 소년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오자 몸에 소름이 돋았다.

“%@^!….#[email protected]…#@!%#*.”

그것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설마…. 나 진짜로 미쳐버린 거냐?”

그렇게 나 자신의 정신상태를 스스로 의심하고 있을 때 즈음이었다.

문득 머릿속에 해례본을 처음 얻었을 때 습득한 스킬이 떠올랐다.

‘언어의 마술사.’

상태 창을 열어 스킬을 확인하고 나서 나직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스킬 사용. 언어의 마술사.”

나에겐 아직 저 문장을 크게 외칠 수 있을 만한 항마력이 없었다.

-스킬 [언어의 마술사 (F)]가 사용됩니다.

-해당 언어를 한국어로 변환합니다.

-1. 2…100%. 변환이 완료되었습니다.

-스킬 사용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스템 메시지가 사라지고.

“반갑습니다. 사령관님. 저는 기함(旗艦) 샤이닝 에로우 No 1의 관제 AI ‘씨드’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내 손에 들린 화살(?)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

“대기권 내의 비행 최고속도는 마하 10이고 우주에서의 최고 비행 속도는 광속의 0.98배이며…이상으로 본 함대에 관한 설명을 마칩니다. 다음으로 ….”

내가 관제 AI 씨드라는 녀석에게 느낀 점은 단 하나였다.

‘말이 많다.’

기적 형님과 필적할 정도로 말이 많다는 것.

아니 오히려 이 녀석이 말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기적 형님은 말하다가 숨이라도 고르는 시간을 가지는데 이 녀석은 애초에 그런 게 필요 없었으니까.

나는 근 30분 동안 말을 하고도 아직도 할 말이 남았는지 ‘다음으로’라는 말을 하는 녀석의 말을 끊어냈다.

“그러니까, 샤이닝 에로우라는 우주 전함은 ‘플리피’라는 행성의 지배 종족인 플리피인이 마법과 과학을 총동원해 만들어 낸 최초의 우주 전함이고, 총 50대가 만들어졌는데 그 50대의 전함이 한 함대를 구성한다는 거 아냐.”

“…네. 맞습니다.”

내가 너무 축약해서일까? 씨드는 뭔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넌 플리피인이 만들어낸 최초의 AI이고 50대의 함선 모두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고. 맞지?”

“네….”

이 짧은 내용을 씨드는 장장 30분에 걸쳐 내게 설명을 했다.

솔직히 재원이라든가 무기체계라든가 내게 말해봐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외계종족의 언어체계라 도통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그런데 내가 왜? 사령관이지?”

“현재 함대의 운행기록은 초기화된 상태이며 첫 지성체를 만나면 사령관으로 지정되도록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이 함대를 팔아먹은 그 플리피인이라는 녀석도 양심은 있었나 보다. 이런 폐급을 떠넘기며 설정 초기화 정도는 해 놓은 모양이니.

“그래서 현재 가동 가능한 함선이 몇 대라고?”

“기함인 본 함을 포함해서 8대입니다.”

양심이 있다는 말은 취소다.

빌어먹을 새끼가 써먹지도 못할 걸 42대나 팔아치웠다.

물론 난. 뽑기로 뽑은 거지만.

뽑기로 뽑았지만 한 대에 10포인트나 지불한 격이니 산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뽑기로 뽑은 아이템에 대한 포인트 지급은 어떻게 되는 거지?’

분명 상점에서 판매 중이던 아이템이 뽑기로 나왔기에 궁금증이 생겼지만 이내 머릿속 한구석으로 밀어뒀다.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이봐. 씨드라고 했어?”

“네. 사령관님.”

“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 솔직하게 대답해 줄래?”

“물론입니다. 사령관님. 저에게 거짓말 기능은 탑재되어 있지 않기에 믿으셔도 됩니다.”

그 말들 듣는 순간 나는 내 미간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뭐랄까.

내 본능에 심어진 촉이 싸한 느낌을 받았다고나 할까?

마치 거짓말쟁이 녀석이 ‘나 뭐 걸고 거짓말 안 함’이라고 말하는 걸 라이브로 본 느낌이었다.

“그래, 고맙다.”

잠시 숨을 돌리고 이내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박스에서 말이야, 우주 전함이 50개나 연달아서 주르륵 나왔거든? 혹시 이 상황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

“…….”

순간 고요한 적막이 거실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난 이 사태의 원흉이 누구인지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지직. 사령관님 통신상태가 원활하지 않아서 듣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

이 새끼가 모르쇠를 시전하고 있었거든.

되지도 않는 연극을 하며 말이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화살, 그러니까 샤이닝 에로우를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이제 통신상태가 원활해졌지?”

으득.

“그러니까 다시 한번 물을게, 뽑기에서 우주 전함 50대가 연달아서 나왔어. 여기에 대해 아는 바 있어?”

나는 놈에게 질문하는 순간부터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 이 새끼라는 걸 말이다.

“…치직. 사령관님 통신상태가…….”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놈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나 보다. 이런 되지도 않는 연극을 재탕하는 걸 보면.

불끈.

샤이닝 에로우 No50.

화살처럼 생긴 우주 전함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천장을 향해 손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바닥을 향해 힘껏 내려쳤다.

따아악!

거실 바닥과 충돌한 샤이닝 에로우가 휘며 ‘티딕’ 거리는 스파크와 함께 희뿌연 담배 연기 같은 연기를 뿜어냈다.

“사령관님. 샤이닝 에로우 No. 50이 가동 불능상태가 되었습니다. 함선에 위해가 되는 행위를 멈춰주시기를 요청합니다.”

나는 씨드의 요청에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젠 통신상태가 원활한가 보지?”

“…….”

다시 침묵 모드로 들어가는 씨드.

하지만 괜찮았다.

나에겐 아직 49발의 샤이닝 에로우가 남아있었으니까.

텅그렁.

쥐고 있던 No 50을 내던지자 꼴에 쇳덩이라고 꽤 묵직한 소리를 내며 거실 바닥에 튕겼다.

탁.

이윽고 내 손엔 또 다른 샤이닝 에로우가 잡혔다.

샤이닝 에로우 No 37.

“니가 어디까지 입을 다물고 있나 보자.”

훙-. 훙-.

샤이닝 에로우를 손에 쥔 채로 허공에 휘젓자 마치 회초리를 휘두르는 것과 같은 바람 소리가 들렸다.

이내 거칠게 휘둘러진 내 손짓에 거실 바닥과 부딪힌 샤이닝 에로우의 허리가 꺾이며 튕겼다.

스파크가 튀지 않는 걸 보면 가동 불능상태에 있던 함선이었나보다.

하지만 괜찮았다.

아직 48개나 남아있으니까.

후웅- 퍽!

후웅- 터엉!

그렇게 내 집 거실에선 때아닌 회초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꽤 오랜 시간 동안.

***

“…훌쩍…. 그래서 저장된 메뉴얼에 따라 함대를 유도한 것입니다.”

애꿎은 화살 12개가 부러지고 나서야 씨드는 입을 열었다.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걸 보면 사실인 것 같다가도 왠지 거짓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13번째 화살을 집어 들었다.

“정말입니다. 사령관님! 정말 입력된 메뉴얼에 따라 함대를 소집했을 뿐입니다!”

급박한 상황임을 인지한 듯 다급한 씨드의 목소리.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내가 처음 힘의 묘약을 뽑고 두 번째로 뽑은 것이 바로 샤이닝 에로우 No 1. 바로 함대의 기함이자 씨드가 잠들어 있던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내 인벤토리 내에서 가동을 시작한 씨드는 메뉴얼대로 함대 소집 명령을 내린 것.

내 인벤토리 안을 우주의 어딘가쯤으로 생각했단다.

그리고 그 함대 소집 명령을 받은 전함들이 움직여 포탈(?)을 통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내가 박스에 바짝 붙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허….”

할 말이 없었다.

지지리도 운이 없어 1번 기함을 뽑아버린 덕에 50대의 함대 컬렉션을 모아버린 격이었으니까.

하아-.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나는 아직도 울먹이고 있는 씨드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뭔데?”

뽑기는 도박이 아니다. 이 빌어먹을 새끼의 주작질이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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