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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31화 (31/202)

31. 뽑기는 도박이 아니다 (1).

아침에 일어나 상점 창을 확인한 나는 뿌듯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상점 등급: F]

[검색: ]

[구매] [판매]

[보유 포인트: 1425.7]

보유 포인트가 무려 1400포인트가 넘었다.

“포인트 아름답구만!”

그리고 지금도 포인트는 계속해서 불어나는 중이었다.

오천억이 아깝지는 않냐고?

전혀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나는 이걸 기부가 아니라 투자의 개념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천천히 포인트로 돌려받는 투자.

계좌에 아직 천억이라는 돈이 남아있기에 마음이 조금 여유로운 면도 없지 않았다.

‘유클리안 잎사귀 차도 아직 일곱 개나 남아있고.’

강 회장이 책정한 가격대로라면 티백 한 개에 천억 원.

7개의 티백만 제값 받고 팔아도 7천억이다.

“흐음…. 언제쯤 연락이 오려나?”

나는 강 회장을 통해 그들의 연락처를 받았지만, 아직 연락하지 않았다.

내가 바쁘기도 했고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다.

유클리안 잎사귀 차의 가치를 안다면 그들이 먼저 연락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조금 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전 세계 7개 밖에 없는 한정판을 독점하고 있는 내가 팔지 못해 안달복달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소리다.

그렇게 시스템 창을 닫으려 할 때였다.

“응? 이건 또 뭐지?”

시스템 창의 메인 화면엔 내가 보지 못했던 아이콘 하나가 새롭게 생성되어 있었다.

네모난 상자 안에 많은 구슬이 담겨 있는 모양의 아이콘.

“새롭게 생긴 기능인가?”

톡.

손가락을 뻗어 아이콘을 터치하자 환한 빛과 함께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가로세로 높이가 3m 정도 되어 보이는 투명한 박스였다.

“구슬?”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색색의 구슬들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어린 시절 문방구 앞에서 보았던 뽑기 기계가 떠올랐다.

동전을 넣고 ‘다라락’ 돌리면 동그란 캡슐을 토해내던 그것 말이다.

그리고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무료 뽑기 이용권 1매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무료 뽑기 이용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N]

시스템 메시지를 보고 나서야 나는 내 인벤토리에 있는 종이 쪼가리의 용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거대개미 50마리와 병정개미를 혼자 처치하고 받은 보상.

그 종이 쪼가리의 용도가 이것이었나보다.

“한번 뽑아 볼까?”

나는 가볍게 손을 놀려 YES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이 세상의 모든 색깔을 모아놓은 것처럼 색색의 빛으로 반짝이는 구슬들이 담겨 있는 박스가 가볍게 진동했다.

위이잉.

그와 함께 허공으로 떠오르는 구슬들.

차라라라락-!

때아닌 태풍이 박스 안에 휘몰아치고, 허공에 떠오른 구슬들이 사방팔방으로 튕기며 격렬하게 움직였다.

정신없이 날아다니며 서로 부딪혀 대는 구슬들을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로또 번호 추첨하냐?”

정말 저 중에 뭐가 나올지 신도 모를 것 같았다.

타다다닥.

그렇게 수천 개의 구슬이 정신없이 움직이며 부딪혀 소리를 내고 있을 때였다.

위잉.

박스의 천장에 원형의 통로가 생성되고 박스 안을 날아다니던 구슬 중 하나가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원통의 통로를 따라 흘러내려 온 붉은색 구슬은 내 눈앞까지 나아오더니 글자로 변했다.

[아이템: 겔로드 족의 탈모제]

[등급: E 급]

[설명: 행성 이리아의 지배 종족인 겔로드 족은 고대로부터 자신의 피부를 단련하는 법을 연구했다. 겔로드 족이 수천 년간 연구한 피부 단련법을 집대성해 만들어 낸 탈모제.]

[추가설명: 여러 번 바를수록 피부의 경도와 강도가 올라갑니다.]

[주의사항: 해당 탈모제는 피부에 닿는 즉시 반응합니다. ‘한올 한올’ 모(毛)의 소중함을 아시는 분이라면 사용을 자제하세요.]

-아이템이 인벤토리로 지급되었습니다. 인벤토리를 확인하세요.

눈앞에 떠오르는 아이템 정보에 조용히 왼손을 내려다봤다.

새하얀 붕대 밖으로 삐져나온 거뭇거뭇한 털들.

‘아무래도 내 왼손에 봉인된 흑염룡(黑髥龍)을 떠나보낼 시기가 온 것 같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메시지창을 치웠다.

“이거 왜 안 사라져?”

시스템 창이 사라진 자리엔 사용이 끝났음에도 박스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의아한 마음에 박스 주변을 둘러봤지만 보이는 건 투명한 유리와 그 안에 들어있는 수많은 구슬뿐.

“뭐지? 버근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박스에 손을 가져다 댔을 때였다.

띠링.

-10포인트를 소모하여 뽑기를 하시겠습니까?

[Y/N]

“어? 이용권으로만 사용 가능한 게 아니었어?”

예상하지 못한 시스템 메시지에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10포인트.

쿤타우리족 발모제 한 병을 살 수 있는 포인트다.

하지만 1425포인트를 지닌 지금, 크게 부담스러운 포인트가 아니기도 했다.

‘한번…해봐??’

나는 뽑기를 그대로 둔 채 상점 창을 열어 겔로드 족의 탈모제를 검색해 봤다.

등급은 E, 구매가 89포인트.

왜 이렇게 애매한 가격을 설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내가 구매할 수 없는 아이템이었다.

내 상점 등급은 아직도 F등급이니까.

‘10포인트씩 10번 돌려서 E급이나 D급 하나만 떨어져도 손해가 아니라는 소린데….’

100포인트를 소모해도 E급 하나만 떨어지면 손해는 아닐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높은 등급의 아이템이 떨어질 확률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D급이나 C급 아이템이라도 떨어지면 대박이다. 그 위 등급은 말할 것도 없고.’

물론 F급이 나오더라도 어떻게 팔아먹느냐에 따라 충분히 돈을 벌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상점 창 옆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어 뽑기 박스를 확인했다.

색색의 빛으로 반짝이는 수많은 구슬.

그중에 해례본과 같은 황금색 구슬들도 들어있었다.

‘저거 하나 먹으면 포인트를 몽땅 때려 박아도 손해는 아닐 텐데.’

나는 아직 해피니스 시스템이 어떤 기준으로 아이템의 색을 나누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황금색이 똥은 아닐 거라는 것이었다.

적어도 황금색 아이템이었던 해례본은 그만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었으니까. 특수 옵션으로 스킬도 얻었고.

‘일단 쿤타우리족의 발모제 먼저 구매하자.’

나는 상점 창을 연 김에 발모제를 사기 위해 쿤타우리족의 발모제를 검색했다.

‘일단 100개 구매.’

지금 쿤타우리족의 발모제는 없어서 못 파는 아이템이다.

자라나라머리머리 발모제 1000병을 경매에 푼다고 해도 가격이 내려갈 염려는 없었다.

지구는 넓고 돈 많은 탈모 환자는 정말 많았으니까.

그렇게 내가 구매 버튼을 눌렀을 때였다.

-포인트가 부족합니다.

-해당 등급의 제품은 구매할 수 없습니다.

-해당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선 사용자의 등급을 올리셔야 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아니. 이게 뭔 개소리야? 며칠 전까지 구매했는데 왜 구매가 안 돼?”

혹시 내가 아이템을 잘못 검색한 것은 아닐까 싶어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나는 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아이템: 개량된 쿤타우리족의 발모제]

[등급: E급]

[설명: 고대로부터 쿤타우리족은 온몸에 털이 무성한 것을 미의 척도로 여겼다. 그런 쿤타우리족이 수만 년간 축적한 지식으로 만들어낸 발모제. 원하는 곳에 도포 시 털이 자라난다.]

[추가설명: 판매자에 의해 개량된 버전의 발모제다.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털의 길이를 조절할 수 있다.]

“아……??”

등급이 오르고 아이템명 앞에 개량된 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거기에 주의사항이 있어야 할 자리엔 추가설명이 있었다.

가격은 한 병에 100포인트.

해피니스 시스템을 사용하는 탈모 환자들의 포인트를 모두 빨아갈 생각인가보다.

겔로드족의 탈모제보다 11포인트가 더 비싼 걸 보면 잘 팔리고 있는 모양이기도 했고.

“… 망했네?”

말 그대로 뭣 됐다.

팔릴만한 아이템인 겔로드족의 탈모제나 쿤타우리족의 발모제 모두 E등급 아이템.

반면 내 상점 등급은 여전히 F였다.

포인트가 아무리 많아도, 구매 의지가 충만해도 살 수가 없다.

돈을 벌고 싶으면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쿤타우리족의 발모제의 경우 보는 순간 ‘아!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탈모로 고생하고 있는 기적 형님이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새로운 판매 아이템을 떠올려 보자니 선뜻 떠오르는 아이템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검색을 시작했다.

“검색설정 F급.”

설정을 바꾸자 F급 아이템들이 종류를 불문하고 떠올랐다.

무기, 갑옷, 포션부터 알지도 못하는 식물과 동물 그리고 몬스터의 부산물까지.

인간의 상상 속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들과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것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주 전함은 또 뭐냐?”

심지어 우주 전함도.

[아이템: 퇴역한 우주 전함. 샤이닝 에로우.]

[등급: F급]

[설명: 퇴역한 우주 전함이다. 아주 기초적인 마나석 엔진이 장착되어있다.]

[추가설명: 가동이 되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낡은 전함이다. 기본적인 AI가 설치되어 있으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과연 이걸 팔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판적인 설명과 추가설명.

해피니스 상점 창에 판매를 해본 입장으로 얘기하자면 저 아이템의 모든 정보는 시스템이 입력하는 듯했다.

판매자가 설정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판매 가격뿐.

설명을 보자면 시스템은 저 우주 전함을 팔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한번 질러봐?’

우주 전함이라는 말에 순간 혹하기는 했지만 나는 곧 생각을 접었다.

저걸 사서 어디에 둘 것이며 어떻게 사용을 할 것인가?

우주 전함이라고 하는 걸 보니 그 크기나 무게도 엄청날 텐데. 내 인벤토리의 한계치는 고작 200㎏이다.

애물단지 중갑도 못 담는데 우주 전함이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그렇게 우주 전함을 패스한 나는 이내 한 가지 아이템을 찾을 수 있었다.

‘이건 좀….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는데?’

내 눈에 들어온 아이템 그건….

[아이템: 활성단(活聖團)]

[등급: F급]

[설명: 색선(色仙)이 다년간의 노력 끝에 만들어 낸 남성용 영구 자양 강력제(滋養強力劑)다. 남성한테 매우 좋은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추가설명: 남성이 사용하지만, 여성이 더 좋아하는 아이템이다. 남자라면 이건 꼭 사용해 봐야 한다. 강력추천!]

뭐냐? 이 사심 잔뜩 들어간 아이템 설명은.

아이템 설명을 읽는 순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새끼. 이거 써봤구나.’

써본 놈이 아니면 저런 반응을 보일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아이템 설명을 작성한 놈이 강추할 정도면 분명 효과가 좋은 아이템에는 틀림이 없었다.

가격은 10포인트.

하지만 왠지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저딴 거 있어 봐야 쓸데도 없는데….’

모태솔로 30년. 마법사로 전직을 앞둔 내게, 저런 아이템은 개똥만큼도 가치가 없었다.

순간, 내 볼을 따라 두 줄기의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이건 눈물이 아니라 땀이다.

그냥 그런 거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나에겐 필요 없지만 다른 남자들에게 좋은 힘이 되어줄 그것을 100개나 구매했다.

이걸로 100명의 고개 숙인 남자들이 당당해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어느새 내 가슴팍은 내가 흘린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제 남은 포인트는 500포인트. 그사이 누가 또 행복한 감정을 느낀 것인지 보유 포인트가 늘어있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한 아이템도 100개나 구매해 뒀으니 이젠 나도 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뽑기 박스에 손을 가져가며 시스템에게 간절히 빌었다.

제발 나한테 쓸모있는 아이템 좀 나와 달라고.

띠링.

-10포인트를 소모하여 뽑기를 하시겠습니까?

[Y/N]

당연히 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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