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29화 (29/202)

29. 훈민정음 해례본 (2).

잠시 정적이 흐르고.

나는 강 회장의 앞에 놓여있는 다구를 가리켰다.

“혹시 다구를 잠시 빌릴 수 있겠습니까?”

“이런. 그러고 보니 내 자네에게 차 한 잔도 내주지 않고 있었구먼. 미안하네. 늙으니 정신머리가 없어서 말이야.”

강 회장의 말에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 제가 마시려는 게 아니라 회장님께 드리려는 겁니다. 마침 제가 구한 좋은 차가 있어서요.”

내 말에 강 회장은 잠시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좋은 차라는 말에 흥미가 생긴 듯 반짝이는 눈빛으로.

“황 집사. 다구 하나만 새로 가져다주겠는가?”

그리고 역시나 나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황 집사의 목소리.

“네. 회장님.”

나는 고개를 돌려 황 집사를 불러 세웠다.

“황 집사님. 그저 뜨거운 물과 찻잔 하나면 됩니다. 이게 티백이라서요.”

황 집사는 의문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곤 이내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한잔에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차를 마시는 왕회장이었으니 고작 티백을 좋은 차라고 준비해 왔다는 내게 의문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리라.

그렇게 몸을 돌려 멀어지는 황 집사의 등에 대고 나는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그. 설탕이나 꿀 있으면 함께 준비해 주십시오. 되도록 많이요.”

설탕이나 꿀이 없으면 정말 왕회장은 쓰러질지도 모른다.

유클리안 잎사귀 차. 이게 정말 쓴 맛의 끝판왕이거든.

그건 기적 형님이 보장했다.

잠시 후.

뜨거운 김을 뿜어내는 물을 찻잔에 따른 나는 이곳에 오기 전 낱개로 포장해 두었던 티백을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바스락.

조심스럽게 포장을 벗기자 티백이 모습을 드러냈고 강 회장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튀어나왔다.

“호오-.”

녹색의 이파리로 만들어진 티백은 그도 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의 놀람은 내가 찻잔에 티백을 담그자 극대화됐다.

“오오오!”

순간, 싱그럽고 시원한 봄의 향기가 대청마루 위에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대단하구만. 이런 향이라니…. 봄이 내 안으로 들어온 것 같군. 폐부가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야.”

감동 섞인 그의 목소리에 나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정말 맛은 개똥 같다고 했거든.

기적 형님이 말하길 개똥은 먹어본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 차보다는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었다.

“차를 드시기 전에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주의…사항?”

“이 차는 매우 씁니다. 때문에, 적당히 식었을 때 한 번에 들이키셔야 합니다.”

강 회장은 다도의 상식을 부수는 내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수긍했다.

“흠…. 그렇게 함세.”

“그리고 다 드시고 나면 지체 없이 이 꿀을 드셔야 합니다. 이 차가 정말 쓰거든요. 하지만 몸에 좋은 차라 회장님께 권해드리는 겁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꿀이 담긴 작은 단지와 찻잔을 강 회장의 앞으로 밀었다.

강 회장은 찻잔이 자신의 앞으로 오자 더욱 진해지는 차 향기에 심취한 듯 두 눈을 감고 향을 음미했다.

“흐음…. 정말 좋군. 이런 향기를 가진 차가 정말 그렇게 쓴가?”

강 회장의 물음에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세상에서 제일 쓴 음식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회장님.”

“그래도 마시라고 만들어놓은 차에 불과하지 않은가. 내게 권하는 것을 보니 자네도 마셔본 듯싶은데….”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회장님. 그러니 입에 머금고 차향을 음미하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마시고 꼭 한 번에 털어 넣고 목구멍으로 넘기셔야 합니다. 꿀은 꼭 드셔야 하고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뜨거운 김을 뿜어내던 차가 어느 정도 식었다.

달그락.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는 강 회장을 마른침을 삼키며 바라봤다.

왜 이렇게 해서까지 강 회장에게 차를 먹이려 하느냐고?

그 이유야 당연한 것 아닌가?

바로 나를 위해서다.

물론 보육원 문제를 해결해준 것에 대한 보답 차원으로 강 회장에게 유클리안 잎사귀 차를 권한 것도 없지 않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강 회장이 오래 살수록 내게 이득이기 때문이다.

그의 선친 강기영옹은 강 회장에겐 꿈에도 못 잊은 아버지지만 강 회장의 아들들에겐 그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할아버지일 뿐이니까.

그렇다고 그들이 불효자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그저 아래로 내려갈수록 강기영과의 유대는 옅어질 테고 그럼 대현이라는 거대 그룹과 나와의 연결고리도 옅어질 테니까.

모쪼록 강 회장이 오래 살아주는 게 나에겐 좋다는 뜻이다.

재벌이 되기를 바라는 나로서는 자수성가한 그에게 배울 것도 많아 보이고 말이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코 밑까지 찻잔을 들어 올린 강 회장은 다시 눈을 감고 차향을 음미했다.

“정말…. 좋군…….”

당장이라도 우화등선할 것 같은 나른한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고.

후룩.

꿀꺽.

경고를 잊지 않은 강 회장은 마치 소주를 마시는 것처럼 찻물을 털어 넣고 목 뒤로 넘겼다.

그리고 잠시 적막이 흐르고.

“쿠에 엑!”

강 회장은 양손으로 자신의 목을 부여잡은 채 괴이한 소리를 내질렀다.

마치 목구멍에 가래가 끓는 소리를 백배 정도 확대한 것 같은 소리를.

“절대 토하시면 안 됩니다!”

그런 강 회장을 보며 다급하게 외치는 순간.

챙!

채채챙!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를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내 목에 칼을 겨누었다.

그야말로 수십 개의 칼이 목젖을 겨누고 있는 상황.

꿀꺽.

그들이 내뿜는 후덜덜한 살기에 내가 마른침을 삼킬 때였다.

“그만! 쿨럭! 물러가라.”

놀랍게도 강 회장은 정상적으로 말을 하며 그들을 물렸다.

나는 그런 강 회장을 보며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와…. 저걸 참는다고?’

그 쓴 차를 마시고도 강 회장의 발음은 평상시와 전혀 다르지 않았으니까.

정말 어마어마한 정신력이 아닐 수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회장님.”

어느새 강 회장의 옆에 나타난 황 집사가 꿀단지를 들어 강 회장에게 권했다.

“되었네.”

하지만 강 회장은 그런 황 집사를 물리고 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설마 이 정도도 참지 못할 거로 생각한 건가?”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생각했다.

대현의 왕회장 강산호. 그는 정말 여러모로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고.

***

강 회장의 저택을 떠난 나는 보육원을 방문해 어머니에게도 똑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왠지 불효하는 느낌이었지만, 어머니의 건강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차를 드신 어머니의 반응은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머니의 반응이 강 회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시며 이런 귀한 차를 선물해 줘 고맙다는 말씀까지 하셨다.

원장실을 빠져나와 보육원을 둘러보던 나는 오늘 아침 있었던 시스템 메시지 테러가 이뤄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맑고 아름다운 황금색 빛이 넘실거리는 보육원 안.

‘TV, 전자제품, 가구, 장난감과 놀이기구. 빛이 안 나는 곳을 찾는 게 더 힘드네.’

정혜누나와 함께 쇼핑했던 모든 물건에서 황금빛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크기와 밝고 어두운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황금색 빛은 따뜻하게 일렁거리며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가만히 스며들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메시지.

-이경아 님이 미끄럼틀을 타며 즐거워합니다. 0.1포인트가 지급됩니다.

그것을 본 나는 해피니스 시스템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처음 왔을 땐 적막하기 그지없던 보육원 안이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로 활기가 넘쳤다.

‘이거였나?’

그리고 그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즐거움과 행복.

지금껏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그것.

시스템은 내가 시스템을 사용해 다른 이에게 행복을 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해보자. 잘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 하나 챙기기도 벅찼던 인생이다.

그런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일단 한번 해보기로 했다.

이미 이곳에 행복을 준 것 같으니까.

그렇게 황금색 빛이 일렁이는 따뜻한 보육원 안에서 나는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을 정할 수 있었다.

***

보육원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강 회장과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그래. 이 차를 내게 준 이유가 무엇인가?’

‘그야 회장님의 만수무강을 빌기 때문입니다. 회장님이 건강하셔야 제가 대현의 그늘에 좀 더 오래 머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거짓 없이 내보인 내 본심에도 강 회장은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일 뿐 기분 나쁜 기색은 없었다.

‘허허.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사람을 소개받고 싶습니다.’

‘사람?’

‘친하지만 골탕을 먹이고 싶은 사람들. 있으시지 않습니까.’

‘하하하! 골탕이라. 그래 이 정도 맛이면 골탕이라 부를 만하지.’

한참을 너털웃음을 터트리던 강 회장은 잠시 후 내게 물었다.

‘그래도 내가 자네에게 사람을 소개해 주려면 어느 정도 차의 효과가 입증돼야 하지 않겠는가?’

‘그건 회장님이 내일 일어나셔서 판단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도 하룻밤이 지나고 나서야 효과를 확인했으니까요.’

‘직접 효과를 확인하라…. 좋군. 그런데 괜찮겠는가?’

‘네?’

‘차의 효과가 별 볼이 없다면 내가 자네에게 골탕을 먹은 샘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여도 내가 하나를 받으면 열로 갚아주는 성미를 가진 사람이라서 말이지.’

‘그런 걱정은 없습니다. 차의 효과는 확실하니까요. 그러니 내일 차가 효과가 보인다면 입금 좀 해주시겠습니까?’

‘음?’

‘이게 이래 봬도 한정판이라 팔 수 있는 수량이 일곱 개밖에 남지 않았거든요.’

내 말에 강 회장은 또다시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그렇게 하지. 하지만 차의 효과가 없다면 기대해야 할 걸세 열 배로 골탕을 먹일 생각이니까.’

‘물론입니다.’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나는 강 회장의 집을 떠나왔다.

걱정이 되지 않냐고?

천만에.

차의 효과는 확실하다. 내가 직접 겪었으니까.

내일 강 회장은 10년은 젊어진 자신의 몸을 경험할 것이다.

그렇게 한가로운 오후가 지나가고 난 저녁.

내일 다시 던전을 들어가기 위해 포션과 스크롤을 구매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나는 전광판에 나오는 뉴스에 발걸음을 멈췄다.

‘속보: 대현 그룹 전 회장 강산호. 새로운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 ‘국가에 기증하겠다.’ 의사 밝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진품 확인했다. 오히려 간송본보다 상태가 더 좋다 발언.’

‘강산호 회장. 나도 한주영 씨에게 기증을 부탁받은 것일 뿐이라 발언. 대리인 자격으로 기증절차를 진행 중이라 밝혀.’

‘독립투사의 아들이 민족의 보물을 되찾아 나라에 기증했다.’

‘상주본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각성자 김 모 씨. 당신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 여론의 뭇매 맞아.’

‘한주영은 과연 누구인가?’

‘강산호 회장. 새로운 훈민정음 해례본의 이름은 훈민정음 주영본.’

“바로 기증하셨구나.”

나는 그 기사들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나와 약속한 걸 모두 지켜 주셨네.’

이걸로 한주영의 이름은 역사에 새겨졌다.

‘원래 무슨 일을 하던 분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나라의 보물을 지키려 했던 분이니 위인이라 불리기에 충분하지.’

미리 말하지만 나는 호구가 아니다.

내가 강 회장에게 훈민정음 해례본을 넘긴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내가 강 회장에게 말했던 것처럼 훈민정음의 안전한 기증이 목적이었고.

두 번째는.

“흐흐흐. 이거 얼마나 오를까?”

바로 대현의 주식이었다.

저기 속보에도 나오지 않는가. 독립투사의 아들이 민족의 보물을 국가에 기증했다고.

이 기사 하나로 대현의 이미지는 떡상을 할 테고, 대현의 주가 또한 떡상을 할 것이 확실했으니까.

그래서 난 보육원에서 돌아온 후 주식계좌를 만들고 꾸준히 조금씩 대현의 주식을 매입했다.

그렇게 계좌에 있는 돈의 일부를 대현과 그 계열사 등의 상장사들에 분산투자를 진행했다.

만약 내일 주가가 오르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대현의 늙은 호랑이 강 회장이 10년이 젊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대현의 주가는 오를 테니까.

대현 그룹에 있어 강 회장은 왕이고 황제다.

은퇴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그의 손은 대현 그룹 구석구석에 닿고 있었다.

후계자인 아들들의 그룹장악력이 강 회장만 못한 것도 강 회장이 대현 그룹에서 완전히 손을 떼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기도 했다.

주가가 오르는 것도 던전에 가는 것도, 이래저래 내일이 기대된다.

이번엔 파티가 아닌 혼자 들어갈 생각이었다.

인벤토리를 청소하기 위해서도 그게 편하고 말이다.

저번에 한 번 상대해 보니 불암산 던전 같은 경우엔 혼자서도 얼마든지 클리어가 가능할 것 같았다.

물론 던전에 들어가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아니기에 가능한 계획이었다.

돈을 벌 목적이었다면 10분마다 3억을 처바르는 풀 도핑은 꿈도 못 꿨겠지.

아공간 청소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포인트로 빗자루도 10개나 구매했으니 최대한 오래 버텨볼 생각이다.

스토어에서 상점 창에 올릴 F급 아이템도 가성비 좋은 아이템으로 모두 구매를 마쳤고.

“흐흥-.”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혹시 아는가?

인벤토리를 청소하다가 훈민정음 해례본 같은 거 하나 더 얻게 될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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