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28화 (28/202)

28. 훈민정음 해례본 (1).

경매 다음 날.

우우웅-.

나는 이른 아침부터 울리는 헌터 와치의 알람에 잠에서 깼다.

『기적 형님.』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기적 형님이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시지? 어제 마신 차의 효과를 보신 건가?’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전화를 받았다.

“네. 형님.”

그러자 들려오는 물기에 젖은 기적 형님의 목소리.

“현아…….”

나는 뒷맛을 잊지 못하는 기적 형님의 목소리를 듣고 형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예감했다.

“예. 형님 무슨 일이세요? 설마 차 때문에 부작용이 생겼어요?”

“현아…. 혹시 네가 어제 준 차. 무슨 효과가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

응?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그거. 그냥 몸에 활력을 불어넣는 차예요.”

그리고 내려앉은 적막.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기적 형님의 거친 숨소리를 듣고 있기를 몇 초가 지났을까?

“거짓말하지 마. 고작 활력을 불어넣는 거로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무슨 말씀이신지…?”

“젊어졌어.”

“네?”

“내가 젊어졌다고! 한 10년쯤 젊어진 것 같단 말이야!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눈가에 자글거리던 주름도 사라지고. 아침에 일어날 때 몸에 느껴지는 힘이 달라! 이런 게 고작 활력을 주는 차일 리가 없잖아….”

기적 형님은 감정이 복받친 듯 물기에 젖은 목소리로 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차가 효과가 있었구나.’

어제 차를 마시고 난 뒤엔 별다른 변화가 없어 장시간에 걸쳐 효과를 드러내는 줄 알았는데.

단지 하룻밤 잠을 자면 되는 거였나 보다.

잠시 생각에 잠긴 내가 말이 없자 기적 형님은 다시 물기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다. 현아.”

“에이…. 형님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지난 십 년 동안 형님이 저를 챙겨주신 게 얼만데요.”

내 말에 기적 형님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른 게 고마운 게 아니고 네 마음이 고마운 거야 현아. 네 말대로 지난 십 년간 내가 해준 거라곤 고작 직장 상사로서, 인생 선배로서 널 보듬어 준 것밖에 없어. 그 정도는 누구나 다 하는 거라고. 그런데 그런 나를 형으로 대해주고 이렇게 챙겨주는 네 마음이 정말 고맙다.”

기적 형님의 말은 틀렸다.

누구나 다 그런 직장상사가 되지는 못한다.

내가 보육원을 나와 헌터 협회에 던전 청소부로 들어가기 전까지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해봤지만.

그 누구도 나에게 이처럼 진심으로 다가와 준 사람은 없었다.

솔직히 지난 10년 기적 형님이 없었다면 나는 헌터 협회에서 버티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과 다르게 워낙 모나고 가시가 많았으니까.

그렇게 서로에게 고마움을 느낀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꽤 긴 시간 통화를 했다.

물론 주로 말을 하는 쪽은 기적 형님이었지만.

이 형님은 감정이 격해져도 여전히 말이 많았다.

***

경기도 이천, 대현의 왕회장 강산호의 저택.

“늙으니 아침잠이 없어지는군. 덕분에 자네가 고생이야.”

강산호의 말에 그의 등 뒤에선 황 집사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회장님.”

그가 강산호의 수족이 된 지 언 40년.

그도 환갑이 넘은 나이가 되었지만, 그의 은인이자 주인인 강산호는 너무 많이 늙어 버렸다.

어느덧 강산호의 나이 아흔둘.

요즘 들어 주인은 과거를 추억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래. 내 자네에겐 항상 고마워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군.”

강산호의 말에 황 집사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광호(狂虎).

폭군(暴君).

그리고 대현(大現)의 왕(王).

불과 10년 전만 해도 강산호를 부를 때 따라다니던 별명들이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늙어버린 그의 주인은 전에 없던 약한 소리를 하며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게 했다.

“그나저나 요즘 그 친구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

강산호의 물음에 황 집사는 한 청년의 얼굴을 떠올렸다.

난데없이 찾아와 90년 묵은 주인의 숙원을 풀어준, 요즘 그의 주인이 깊은 관심을 나타내는 강현이라는 청년을.

“어제 오전과 오후는 불암산 F급 던전에서 보낸 뒤. 밤에는 집에서 콜팡 경매를 지켜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많이 벌었다던가?”

“네 회장님. 콜팡 관계자한테 따로 확인해 본 바로는 세금과 콜팡 수수료, 배송료를 제하면 경매에서 벌어들인 순수익만 약 800억 원 정도가 될 것으로 파악이 되었습니다.”

황 집사의 보고에 강산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오-. 각성한 지 한 달도 안 돼 800억이라 대단하구먼.”

강산호는 정말로 놀랐다.

강현이 각성한 지 불과 보름 남짓. 어떤 방법을 쓴 건지 몰라도 청소부란 직업을 가진 강현은 지금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발모제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었다.

“그래. 우리도 구매는 했겠지?”

“네. 어렵지 않게 낙찰받아서 현재 연구소에서 성분 분석하고 있습니다.”

“음. 분석 끝나면 그 친구와 상의해서 특허 등록을 하도록 하게. 노리는 놈들이 많을 테니 빨리 진행해야 할 거야.”

“네. 회장님.”

강산호의 당부에 황 집사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나저나 대상의 그 어린 살쾡이 놈은 어쩌고 있나?”

대상그룹의 회장 주석원.

재계서열 85위의 대기업을 이끄는 그 주석원조차도 강산호에겐 그저 어린 살쾡이에 불과했다.

“회장님께서 싼값에 송도 테마파크부지를 넘기셔서 겉으로는 수긍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내부적으로는 사람을 써서 뒤를 캐고 있었습니다.”

“뒤를 캐? 나를?”

“네. 회장님이 움직이시니 원래 테마파크부지로 사들였던 그 땅에 뭔가가 있다고 지레짐작한 모양입니다. 일현이 움직여 적당한 경고를 남기고 왔습니다.”

“설마 그 친구 정보가 살쾡이 놈 귀에 들어간 건 아니겠지?”

“비현에서 정보조작과 함께 역정보를 흘렸으니 그런 걱정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황 집사의 보고에 강산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현과 비현이 움직였다면 믿을 수 있었다. 그가 비현을 만들고 40년.

비현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 친구와 그 보육원 주변에도 인원을 배치하게.”

“안 그래도 보육원 주변 용지를 매입해 비현의 사택을 짓고 있습니다.”

“역시 자네가 내 마음을 잘 읽는구먼.”

“현재는 공사장 인부로 위장해 보육원을 보호하고 있으며 공사가 끝나는 대로 약 10여 명의 비현과 그 가족들이 입주할 예정입니다.”

황 집사의 보고에 강산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친구 분명 뭔가 있어. 아버지 건도 그렇고, 이번 발모제 경매 건도 그렇고. 지켜보면서 도움도 주고, 우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면 끌어들여야 하네. 이렇게 그 친구를 챙기는 것도 대현의 미래를 위한 일이니까. 게을리해서는 안 될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우우웅-.

황 집사의 손목에 있는 헌터 와치에서 묵직함 울림이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괜찮아. 받아보도록 해.”

고개를 숙여 강산호에게 양해를 구한 황 집사는 귓속을 울리는 비현의 보고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이내 강산호를 불렀다.

“회장님.”

“음?”

“강현 군이 지금 드론을 타고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로? 설마 우리가 지켜보고 있는 걸 들킨 건가?”

“그렇진 않은 것 같습니다. 일어나서 잠시 통화를 한 뒤 씻고 바로 드론을 불러 이곳으로 출발했다는 보곱니다.”

“흠…. 뭐 어떤 이유인지는 곧 알게 되겠지. 은인이 온다니 좋은 차나 한잔 준비해 주게.”

“네. 회장님.”

그렇게 황 집사가 물러가고 강산호는 물끄러미 진열장을 바라봤다.

낡은 수첩과 흑백사진, 그리고 황금색으로 빛나는 훈장 하나.

정부에서 선친의 공을 인정해 수여한 금성 독립 훈장이었다.

태극 독립 훈장을 제외한다면 가장 높은 등급의 독립 훈장이었다.

그가 이 훈장을 받는 순간 대현의 브랜드 이미지는 8년 만에 성삼을 추월해 1위 자리를 탈환했다.

밑바닥에서 시작해 대현을 이뤄 자수성가했다고 평가받던 오너일가가 독립투사의 후손이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우리 은인께서 이번엔 또 어떤 선물을 들고 오시려나.”

까악 까악 까악-!

흐뭇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강산호의 귓가로 까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기적 형님과 통화를 마친 후. 나는 시야 오른쪽 위에서 올라가고 있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고 기겁을 했다.

신경 쓰지 않았다면 그냥 넘어갔을 정도로 작은 메시지 창에선 쉴 새 없이 메시지가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중호 님이 새로운 가방에 교과서를 챙기며 행복해합니다. 0.1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이경아 님이 인형을 가지고 놀며 행복해합니다. 0.1포인트가 지급됩니다.

-김말숙 님이 세탁기가 성능이 좋다며 즐거워합니다. 0.1포인트가 지급됩니다.

…….

그 위로 이어진 무수한 메시지들.

그중에는 눈에 익은 이름이 더러 존재했다.

김정혜, 정미현.

정혜 누나와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아무래도 보육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보육원을 좀 방문해야겠다.

어차피 어머니에게 유클리안 잎을 우린 차를 드려야 하니, 겸사겸사 보육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을 하면 될 터.

물론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강산호 회장을 만나는 것.

***

‘언제봐도 으리으리하네.’

강 회장의 저택을 방문한 나는 지난번과는 다르게 도착하자마자 강 회장이 머무는 안채로 안내되었다.

경비를 서고 있는 각성자들 중 그 누구도 나를 경계하지 않았다.

심지어 황 집사마저도.

황 집사의 안내를 받아 예의 그 대청마루에서 다시 마주한 강 회장.

오랫동안 품고 있던 숙원을 이뤘기 때문일까?

다시 만난 강 회장은 마치 속세의 미련과 번뇌를 버리고 해탈을 앞둔 스님처럼 어딘가 초연해 보였다.

‘저번보다 더 기운이 없어 보이는 것도 같고….’

“어서 오시게. 허허. 그래. 아침 식사는 했나?”

“식전부터 연락도 없이 방문해 죄송합니다. 회장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게 호랑이 같은 기세가 사라진 강 회장은 마치 옆집 할아버지처럼 편했다.

“허허허. 그래, 아직 식전이면 같이 밥이나 한 끼 하면서 얘기 나누세나. 황 집사. 식사 좀 준비해주게.”

“네. 회장님.”

그렇게 강 회장의 명령을 받은 황 집사가 자리를 떠나고.

“자 좀 급해 보이는데. 일단 황 집사도 물렸으니 본론을 말해 보게.”

강 회장은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봤다.

역시 호랑이. 깜빡이도 없이 묵직한 돌직구가 들어왔다.

‘옆집 할아버지란 말은 취소다. 어우-. 무슨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하는 강 회장의 눈빛에 나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주눅이 들게 만드는 눈빛이다.

“어르신께 전해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부탁드릴 것도 있고요.”

“전해 줄 것과. 부탁이라. 그래. 어떤 것이 먼저인가?”

“부탁이 먼저입니다.”

“말해 보게. 내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들어줄 테니.”

나는 조심스럽게 인벤토리를 열어 꺼낸 아이템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게…?”

낡디 낡은 서책을 ‘이건 뭐지?’라는 눈으로 바라보던 왕회장은 이내 눈을 크게 치켜떴다.

훈민정음 해례본.

낡은 표지에 커다랗게 쓰여있는 한문.

얼룩이 있기는 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설마…. 이거 진품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내게 되물어 오는 강 회장.

“출처를 밝힐 수는 없지만, 진품이 확실합니다. 원하시면 마법적인 조사를 해 보셔도 좋습니다.”

“허. 허허허. 그래 이걸 내게 보여주며 할 부탁이라는 게 뭔가? 설마 나더러 이걸 사달라는 건가? 하긴 이런 물건이라면 부르는 게 값이긴 하지.”

강 회장의 목소리엔 뭔가 실망 어린 기색이 어려있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실망한 것이 아닌 나라는 사람에게 실망한 것처럼 보이는 강 회장.

“틀리셨습니다.”

“뭐?”

“이걸 국가에 기부해 주십시오.”

내 말에 강 회장은 다시 두 눈을 크게 치떴다.

“단.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는 대형박물관에 전시하는 게 조건입니다.”

내 말에 강 회장은 조심스럽게 표지를 넘겼다.

“이걸 전시하겠다고?”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강 회장. 그도 그럴 것이 간송본도 상주본도 존재한다는 것만 알 뿐 진품을 본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물론 간송본을 통해 영인본이 제작되어, 연구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으나, 서책이라는 게 워낙 물과 불에 취약하다 보니 원본인 간송본은 꽁꽁 싸매져 보관될 뿐 일반에 공개되지는 않았다.

간송본의 경우 마법처리가 되어 있음에도 말이다.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겨보던 강 회장은 이내 책을 덮으며 입을 열었다.

“이걸 왜 내게 가져온 겐가. 자네가 직접 기증하면 될 일이 아닌가?”

강 회장의 말이 맞는다.

해례본을 기증하고자 한다면 내가 직접 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강 회장을 찾아온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말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말의 무게가 다르다?”

“회장님과 저의 사회적 위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분명 기증을 하고 싶다면 그저 공개하고 절차를 밟아 문화재청에 기증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기증을 하게 되면 이 해례본이 제대로 전시된다는 보장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유는?”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욕심낼 만한 보물이기에 중간에 가짜로 바꿔치기가 될 수도 있고 분실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군. 당장 나조차도 욕심이 나니 말일세.”

강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회장님이 기증하시면 다릅니다. 재계 1, 2위를 다투는 대현 왕회장님의 기증이라면 누구도 이 책을 욕심내지 못할 테고 관리 또한 달라질 테죠.”

“한마디로 기증하는 사람에 따라 책이 받는 대접이 달라진다는 말이군. 맞나?”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회장님을 찾아왔습니다.”

나를 보던 강 회장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뭔가 만족스러운 얼굴.

‘이 책이 그렇게 좋은가?’

“좋네. 내가 국가에 기증하도록 하지. 물론 그전에 내가 마법적인 검사와 조치를 할 걸세. 괜찮겠나?”

강 회장의 물음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해서 진품인 게 확실해진다면 제 마음이 더 편하겠지요.”

무려 시스템이 보증한 물건이다. 당연히 가짜일 수가 없지만 나는 일단 그렇게 말했다.

그동안 왕회장이 나에게 보여준 행보를 봤을 때, 상당히 믿을 만하다는 게 나름의 결론이었다.

기존의 수배액을 시세에 맞게 달라는 요구에도 곧바로 맞춰서 5천억을 입금했던 때라든지, 보육원 부지 건을 지금까지 잡음이 없도록 처리한 부분은 내가 그를 신뢰할 이유가 되어 줬다.

만일 바꿔치기된다고 해도 나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내 눈엔 아이템 정보가 보이니까.’

그리고 이만한 큰 건을 원활하게 처리해 줄 사람은 내 주위에 왕회장님뿐이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강 회장이 입을 열었다.

“황 집사 들었는가? 사람을 좀 불러주게.”

강 회장이 그렇게 말을 마치는 순간.

“네. 회장님.”

떠난 줄 알았던 황 집사의 목소리가 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순간 온몸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와씨! 있는지도 몰랐네.’

분명 왕회장을 지키는 게 황 집사의 일일 테지만 이렇게 기척도 없이 등 뒤에 서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말 그대로 나는 그의 존재 자체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나는 팔뚝에 올라온 닭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한 가지 더? 말해 보게.”

“그 책을 기증한 것은 제가 아니라 한주영이라는 분이십니다. 저는 그분이 소장하고 계시던 것을 받은 것뿐입니다. 그러니 기증자의 이름은 한주영 님의 이름으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한주영이라…. 대단하신 분인가 보군. 이런 대단한 보물을 선뜻 국가에 기증하시는 걸 보면.”

강 회장의 말에 나는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네. 대단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훈민정음 해례본이 ‘주영본’이라고 불렸으면 좋겠습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께서 공개하신 해례본이 간송본으로 불리는 것처럼요.”

내 말을 들은 강 회장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주영본이라 불리게 해 주겠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이거면 됐다.

대현의 왕회장 강산호의 이름이라면 이 주영본은 절대 허투루 대접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강 회장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래. 이렇게 하면 부탁은 끝난 것일 테고. 전해 줄 거란 건 무엇인고?”

강 회장의 물음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아주 쓰디쓴, 독극물로 오해받을지도 모를 차를 강 회장이 마시게 해야 할 차례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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