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27화 (27/202)

27. 유클리안 잎사귀 차. 그리고 경매.

띠리리리리.

사행성 오락실에서나 들을 법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룰렛.

나는 두 손을 깍지끼고 기도하는 자세로 뚫어져라, 룰렛을 노려봤다.

하지만 워낙 빠르게 돌아가는 통에 내 눈마저 빙빙 돌 지경이어서 눈을 감았다.

“제발…. 제발……. 파란색.”

띠. 띠. 띡.

두 눈을 감고 기도하는 내 귓가로 룰렛의 회전이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간 포션하고 스크롤 값만 50억이다 제발…. 파란색.”

그렇게 마지막 기도를 마친 나는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씨….”

하지만 내 기도가 무색하게 룰렛의 바늘이 멈춘 곳은 889개나 존재하는 빨간색 칸 중에 하나.

“…빨!”

모 아니면 도였는데.

도가 걸렸다.

-아이템이 지급되었습니다. 인벤토리를 확인해 주세요.

포션하고 스크롤 값만 50억이 들었는데. 50억짜리 빨템이라니.

“네가 그럼 그렇지…. S급 하난 확정이니까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거냐?”

나는 이미 사라져버린 보상 룰렛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추가 보상 룰렛을 바라봤다.

황금색으로 찬연하게 빛나는 룰렛.

그곳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아이템.

훈민정음 해례본 (訓民正音 解例本)

“그래도 모가 여기 있네. .”

상주본을 가지고 있는 각성자는 기증의 대가로 천억을 요구했다고 한다.

보관 비용이나 박물관 수익, 역사적 가치 등을 고려해 보면 천억에 해당하지는 않아도 환산해 보면 큰 금액일 것임은 분명했다.

버튼을 눌렀고 보상 룰렛을 돌릴 때와는 다르게 아무런 긴장도 없이 룰렛이 멈추는 걸 지켜볼 수 있었다.

-아이템이 지급되었습니다. 인벤토리를 확인해 주세요.

-훈민정음 해례본을 습득하셨습니다.

-특수 옵션이 발동합니다.

-스킬: 언어의 마술사 F (LV1)을 습득합니다.

-상태창을 열어 스킬을 확인하세요.

시스템 메시지를 보며 인벤토리를 열어 두 개의 보상을 확인한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 S급??”

인벤토리에 들어온 두 개의 보상은 모두 S급이었으니까.

분명 내가 걸린 것은 빨간색 칸이었는데 지급된 보상은 S급 아이템이다.

‘10칸밖에 없던 노란색에서 나온 건 D급 마나의 묘약이었는데, 889개나 있던 빨간색 칸에선 S급이 나온다고? 대체 분류기준이 뭐냐…?’

뭐 어찌 됐든 좋았다.

일단 똥템이라 생각했던 빨템이 S급 아이템이었고, 나는 한 번에 S급 아이템 두 개를 얻은 격이니까.

‘아이템 등급과 색깔의 상관관계는 조금 더 고민해야겠지만.’

[아이템: 훈민정음 해례본 (訓民正音 解例本)]

[등급: S급]

[설명: 세종 28년(1446년) 위대한 대왕 세종이 백성을 위해 만들어 반포한 훈민정음의 창제원리가 담긴 해례본이다.]

하나는 당연히 훈민정음 해례본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이템: 유클리안 잎사귀 차]

[등급: S급]

[설명: 세계수 유클리안의 잎사귀로 만든 차. 음용하면 젊어질 수 있다.]

[추가설명: 행성 그르디안의 세계수 유클리안은 엘프들에게 어머니이자 신으로 추앙받는 존재이다. 그르디안의 엘프들은 유클리안의 잎으로 차를 만들어 마시며 젊음을 유지한다. 그르디안 엘프들의 장수 비결 중 하나인 유클리안 잎사귀 차는 ‘세계수 유클리안의 축복’으로 육체의 노화를 10년 전으로 되돌리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주의사항: 유클리안의 축복을 받은 그르디안의 엘프는 차를 다량으로 음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축복을 받지 못한 필멸자의 경우 단 1회 음용만 허락되어있다. (여러 회 음용 시 배앓이를 할 수가 있으며 추가 효과는 없다.)

유클리안의 잎사귀 차는 혀를 잘라내고 싶을 정도로 매우 쓴 맛을 자랑한다. (음용 시 꼭 사탕을 지참할 것.)

유클리안의 잎사귀 차라는 S급 아이템 이었다.

“회춘의…차?”

아이템 설명을 읽어내린 나는 정신이 멍해졌다.

비록 엘릭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무려 10년 전의 육체로 회춘을 시켜주는 차였다.

시중에 내놓는다면 수십억을 주고도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설 터.

특히 재벌이라 불리는 사람들 말이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조심스럽게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시들지 않는 초록의 나뭇잎으로 만든 것 같은 상자가 싱그러움을 뽐냈다.

달칵.

조심스럽게 상자의 덮개를 열자 그 안에 녹색의 이파리로 포장된 티백 열 개가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빼 들고 입맛을 다셨다.

S급인 걸 보니 좋은 아이템일 것은 분명했다.

주의사항을 봐도 발모제 때와는 다르게 주의할 만한 내용도 ‘맛’ 정도였고.

“좋은 건 내가 먼저 먹어봐야지. 흐흐.”

좋은 건 어머니 먼저 챙겨드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

당연히 어머니도 챙겨드릴 거다. 하지만 일단 내가 먼저 먹어보고 효과를 확인해야 권해드릴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이건, 그러니까 임상시험이다. 절대 젊어지고 싶은 욕심 때문에 마시는 게 아니라는 말씀.

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데워 컵에 따르고 주의사항에 따라 설탕도 한 봉지 준비했다. 사탕이 집에 없어서….

그렇게 준비를 마친 후.

녹색의 이파리로 포장된 티백을 컵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마치 봄날의 숲처럼 맑고 신선한 바람이 거실을 가득 채우며 퍼져 나갔다.

온갖 먼지와 매연에 찌들어 있던 폐가 깔끔하게 씻겨나가는 듯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아---.”

말 그대로 싱그러움 그 자체.

“이게 그렇게 쓰다고?”

의문이 들긴 했으나 나는 시스템의 주의사항을 잊지 않았다.

이미 한번 주의사항의 무시하고 내 몸에 실험했다가 쓴맛을 보지 않았는가.

나는 왼손등을 한번보곤 비장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템 주의사항의 무시하지 않는 게 신체 건강 정신건강에 좋다는 걸 몸소 체험하고 있는 사람이 나니까.

“그런데 꼭 이걸 내가 먼저 마셔 볼 필요가 있나?”

여전히 코끝을 간질이는 싱그러운 숲의 향기가 나를 유혹했다.

하지만 시스템은 분명히 이 차의 맛이 굉장히 쓰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잠시 찻잔을 바라보며 고민을 하던 나는 이내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와 친분이 있고 바로 근처에 사는 사람.

지금, 이 지구상에 단 10개밖에 없는 S급 소모템을 줘도 전혀 아깝지 않을 사람.

기적 형님에게.

“응. 현아 무슨 일이야?”

“네. 형님. 저 오늘 콜팡 경매 있는 거 아시죠?”

“응. 사이트에서 확인했지. 아주 반응이 핫하던데? 대발 날 것 같아!”

여전히 밝고 경쾌한 기적 형님의 목소리.

“그…. 시간 괜찮으시면 제집에서 같이 경매 지켜보시면서 맥주나 한잔하실래요?”

나는 유클리안 잎사귀 차가 들어있는 찻잔을 흘끗 바라보곤 말을 이었다.

“드릴 것도 있고요.”

“어? 그럴까? 같이 경매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치킨 시켜놔 형이 맥주사 갈게.”

기적 형님은 흔쾌히 그러마 하고 답하곤 전화를 끊었다.

나는 아직도 싱그러운 봄 향기를 내뿜는 찻잔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거 형님한테 좋은 거래요. 10년이나 젊어진다니까…. 형님도 장가가셔야죠.’

나는 이 모든 게 형님을 위한 일이라며 스스로를 세뇌했다.

어찌 됐건 차의 효과는 확실하다. 기적 형님에게 절대 나쁜 게 아니었다.

절대로 내가 쓴 걸 싫어해서 이러는 게 아니다.

진짜로.

***

“쾌에 에 엑!!!”

혀끝에서 느껴지는 말도 안 되는 맛의 향연에 이기적은 설탕 봉지를 쥔 채 화장실로 달렸다.

“우에에엑.”

강현에게 들었던 설명보다 더 쓴, 혀를 잘라내고 싶을 정도로 쓴맛이 입안 가득 퍼져 그를 괴롭혔다.

몸에 좋은 거라는 강현의 말에 차마 게워낼 수는 없어 물로 몇 번이나 가글을 해봤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마시자마자 설탕을 때려 넣어서 이 정도인 걸까?

이기적은 절반쯤 빈 설탕 봉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뎡말. 혀들 달라내고 팁네.(정말 혀를 잘라내고 싶네.).”

그러곤 남은 설탕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입안을 지옥으로 만들어놓은 쓴맛을 없애기엔 설탕 1㎏은 너무 부족했다.

***

“와 이거 제정신인 사람이 먹을만한 게 아닌데?”

입안에 사탕을 우물거리며 중얼거리는 기적 형님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설탕만으론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는 것 같아 편의점으로 달려가 10봉지가 넘는 사탕을 쓸어다가 형님께 드렸지만 죄송스러운 마음은 여전했다.

“현아. 너도 이거 마셨어? 와-. 향이랑 다르게 너무 쓴데? 이거 사람 마시라고 만들어놓은 차 맞아?”

입안의 쓴맛이 어느 정도 가셨는지 기적 형님은 쉴 새 없이 사탕을 우물거리며 내가 물어왔다.

“아. 네….”

“확실히 몸에 좋은 차이긴 한가보다. 이렇게 쓴 걸 보면. 원래 몸에 좋은 게 입엔 쓰다잖아.”

“형님. 지금 바로 느껴지는 변화는 없으신 거죠?”

“응 아직 없네. 내가 확실히 눈에 보일만 한 변화가 생기면 바로 연락해 줄게. 이것도 콜팡에서 판매할 생각이야? 새로 만든 제품?”

“아, 네 뭐 그렇죠.”

“그럼 이것도 나중에 막 몇억씩 가고 그러는 거 아니야? 지금 발모제만 봐도 몇억 들여서라도 낙찰받겠다는 사람이 수두룩하던데.”

기적 형님의 말에 나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시스템 말대로라면 몇억이 아니라 몇십억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렇게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경매를 진행할 시간이 다가왔다.

경매 자체는 콜팡에서 진행하는 것이긴 하지만 명색이 판매자인데 신경을 쓰지 않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헌터 와치를 조작해 콜팡의 경매페이지에 접속했다.

솔직하게 이번 경매로 얼마나 벌게 될지 궁금하기도 했고.

‘기적 형님 말대로 한 병에 몇억씩이나 할까?’

그렇게 기대를 품고 접속한 경매페이지.

하지만 경매페이지는 내 기대와는 다르게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보통 여기서 대화도 한다고 하지 않았나?”

버젓이 채팅창이 존재함에도 올라오는 메시지라곤 경매 시간을 알리는 메시지뿐이었다.

그렇게 홀로그램으로 띄워놓은 경매페이지를 지켜보던 나는 이내 의아함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접속자:10,234,562명

“그러게 천만 명이 넘는 사람이 접속해 있는데도 말 한마디 없네?”

기적 형님도 아무런 대화가 없는 채팅창을 보곤 의문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우리의 의문은 곧 올라온 경매관리자의 메시지를 보곤 풀어졌다.

<경매 시작시각까지 5분 남았습니다. 접속자가 많은 관계로 원활한 경매 진행을 위해 채팅창을 얼렸습니다. 경매 참가자분들께 이 부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너무 많은 대화가 오가다 보니 콜팡의 서버에 문제가 생겼던 모양이다.

하긴 천만 명의 사람이 한마디씩만 채팅을 치더라도 천만 마디다. 콜팡이나 되니까 이걸 감당하는 거지 어중간한 플랫폼은 감당하지도 못했으리라.

잠시 후 경매관리자의 경매 시작 메시지와 함께 시작된 자라나라머리머리 발모제의 경매.

나는 첫 경매부터 마지막까지 흥미로운 눈으로 경매를 지켜볼 수 있었다.

시작가는 천만 원.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지는 호가에 나는 정신이 없었다.

‘이거….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벌지도 모르겠는걸?’

기적 형님도 그걸 느꼈나 보다.

“어…. 현아. 너 이러다가 재벌 되겠는데?”

멍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리는 걸 보면.

“…그러게요.”

왠지 이번 경매가 끝나면 계좌에 그동안 내가 썼던 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들어올 것 같다.

그렇게 나와 기적 형님이 경매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시야 한쪽 구석에서 시스템 메시지가 작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김정혜 님이 TV를 보며 행복해합니다. 0.1포인트가 지급됩니다.

***

“이 새끼 오늘도 안 나오는 거 아냐?”

백금색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는 아름다운 얼굴의 미녀, 나타샤 일리니치나는 앙칼진 목소리로 옆에 앉은 남자에게 말했다.

그녀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공대장인 세르게이는 눈살을 찌푸릴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도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공대의 메인 탱커에게 불만이 있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지금 이곳에 모인 인원은 99명.

메인 탱커인 바르디 에죠프가 칩거한 지난 며칠 동안 이들은 이렇게 기약 없이 매일매일 길드 하우스에 모이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아직 던전 브레이크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만,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할 경우 던전 공략권이 길드 내의 다른 공대에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

그렇게 되면 길드에서 세르게이 공대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기다려봐. 오늘은 반드시 오겠다고 말했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언젠데? 오늘 밤 11시 59분? 네가 이렇게 무르게 구니까 바르디 그 개자식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 아니야?!”

하지만 세르게이의 말에도 여전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나타샤, 급기야 그 비난의 화살은 세르게이에게 향했다.

“뭐야?!”

발끈한 세르게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공대대기실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져 내렸다.

빙혼의 기사라고 불리는 그의 몸에서 뿜어진 기파가 주변의 기온을 끌어내린 것이었다.

“일어나면 뭐? 한판 붙을까?!”

하지만 나타샤는 이에 밀리지 않고 양손에 거대한 화염구 두 개를 만들어내며 세르게이를 노려봤다.

누가 홍염의 마녀 아니랄까 봐 그녀가 만들어낸 두 개의 화염구는 세르게이가 뿜어내는 기파를 밀어내며 주변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쾅!

하지만 두 사람의 대립은 오래가지 않았다.

공대대기실의 문이 부서질 것처럼 열리며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안으로 걸어들어왔으니까.

“뭐야? 둘이 또 싸우는 거야?”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나타샤의 얼굴이 봄눈 사이에 피어난 꽃처럼 화사해졌다.

“바르디! 왜 이제 왔어어-. 흐응-. 보고 싶었자나-.”

조금 전까지 신경질을 내고 있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바르디를 향한 나타샤의 목소리엔 묘한 콧소리와 함께 교태가 듬뿍 배 있었다.

‘미친년! 저 콧소리는 또 뭐야. 조금 전까지 그 욕을 해놓고….’

세르게이가 그렇게 나타샤를 씹으며 자리에 앉을 때였다.

“바르디!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경악 어린 나타샤의 외침에 바르디를 돌아본 세르게이는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통나무처럼 굵은 목을 타고 내려와 단단한 어깨 위에서 찰랑거리는 연갈색의 머리칼.

바르디는 비단결 같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뭐긴 뭐야? 내 머리카락이지.”

“…뭐?”

“내가 말했잖아 기적 같은 발모제를 찾았다고.”

“정말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지난 며칠간 던전 공략을 미뤄 왔던 거야?”

일그러지는 나타샤의 얼굴.

그녀는 진짜 마녀로 불려도 될 만큼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날카롭게 외쳤다.

“내. 대머리 다시 돌려내!!”

이내 그녀의 손에서 뿜어진 화염이 바르디의 머리를 향해 쏘아져 가고.

화르륵.

바르디의 연갈색 머리칼은 순식간에 재가되어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다시 머리칼을 잃은, 바르디. 하지만 그는 미묘하게 웃고 있었다.

“???”

나타샤가 의문스러운 눈으로 그런 바르디를 바라보는 것도 잠시, 그녀의 눈엔 경악이 어렸다.

“다시 자라…나?”

재가되어 사라진 머리카락에 다시 반들반들해졌던 바르디의 머리에서 순식간에 머리칼이 자라나 다시 찰랑거렸으니까.

바르디는 잃어버린 머리칼을 되찾은 삼손처럼 커다랗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테스트를 해 봤지. 내가 불꽃을 뿜어내도 다시 자라더라고. 하하하하.”

그의 직업은 화염의 전사.

그리고 그의 직업 전용 스킬은 ‘맨 오브 파이어’. 말 그대로 온몸에서 화염을 뿜어내 몬스터의 어그로를 끄는 스킬이었다.

패시브로 적용된 ‘화염 내성 피부’ 덕에 피부에 화상을 입는 일은 없었으나 그의 털은 그렇지 못했다.

타버린 눈썹은 문신을 그려 넣었지만, 머리는 그의 친한 지인들은 다 아는 그의 콤플렉스가 되었다.

그런 그가 다시 머리칼을 되찾은 것이다.

바르디의 말을 들은 나타샤의 얼굴은 더 일그러질 수 없을 정도로 구겨졌다.

“응? 나타샤 왜 그래?”

그런 나타샤의 반응에 바르디가 나타샤에게 다가서자 그녀가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가까이 오지마! 이 씨발 장발충 새끼야!!”

그렇다.

나타샤 일리니치나, 그녀는 바르디가 아닌 바르디의 대머리를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평소와는 다른 나타샤의 반응에 움찔 몸을 떠는 바르디와 그런 그를 극혐하는 눈빛으로 쏘아보는 나타샤.

바르디 에죠프.

그는 오늘 머리카락을 얻고, 자신을 사랑하던 아름다운 미녀를 잃었다.

‘미친것들이 아주 쌍으로 지랄을 하는구나.’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세르게이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발모제를 사겠다고 공대 일정을 미루는 놈이나, 조금 전까지 좋아죽던 남자가 머리를 길렀다고 쌍욕을 박는 년이나….

하아-.

‘공대 메인 탱커하고 메인 딜러만 아니면 당장 잘라버리는 건데.’

그렇게 오늘도 세르게이의 한숨은 깊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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