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18화 (18/202)

18. 등급 업이 시급합니다.

현장 소장님과 대화를 마치고 나서 어머니 몰래 정혜 누나를 끌고 쇼핑을 하러 나왔다.

새로 건물을 올릴 동안은 지금 건물에서 지내야 하니 그동안 쓸 가전제품이나 가구를 좀 살 생각이었다.

어제 보니까 너무 낡았더라고.

“현아 이거 어때? 이만한 TV로 만화 보면 애들이 좋아하겠지?”

“그 TV로 엔플릭스 보고 싶어 하는 건 누나 같은데?”

80인치는 넘어 보이는 커다란 티브이를 가리키며 말하는 누나에게 핀잔을 주긴 했지만 내가 보기에도 정말 좋아 보였다.

“아 왜에-. 이거 하나 거실에 놓고 막 애들 만화도 틀어주고 영화도 틀어주면 얼마나 좋아.”

“그래. 사라. 사.”

나는 화통하게 지갑을 열었다.

그 많은 돈 계좌에 쌓아두면 뭐 하겠는가. 이럴 때 써야지.

플렉스가 뭐 별건가?

이게 바로 플렉스지.

***

“끄으…. 사, 사지마…!”

반나절. 정혜 누나와 함께 쇼핑을 한 시간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양팔 가득 쇼핑백을 주렁주렁 매단 채 누나를 뜯어 말리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그 반나절 쇼핑으로 거의 녹초가 되다시피 했다.

“이제 그만 사라…. 많이 샀다 아이가….”

“오호호호호호!”

저건 마녀다.

던전 청소부 일을 하며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던전을 드나들어도 지치지 않았던 나인데.

‘와…. 이건 정말 두 번은 못 할 짓이다.’

집으로 돌아온 난 거의 소파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지금 나는 무언가를 사는 행위가 이렇게 진이 빠지고 힘든 일이라는 걸 처음 느끼는 중이었다.

정혜 누나는 꼼꼼해도 너무 꼼꼼했다.

색연필, 장난감. 크레파스 하나를 살 때도 어느 게 더 좋은지 비교분석까지 해서 골랐다.

내 눈엔 다 그게 그걸로 보이더구만.

그렇게 업소용 냉장고와 이름도 모르는 커다란 세탁기까지, 구매하고 난 이후에야 정혜 누나와의 지옥 같은 쇼핑을 마칠 수 있었다.

‘그때 그냥 집에 왔어야 했는데….’

하지만 난 그 이후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했다.

무슨 선택을 했냐고?

바로 상점 창에 판매할 아이템을 사기 위해 각성자 스토어에 들른 것.

‘미친놈. 쇼핑 끝내고 또 쇼핑하러 가다니.’

지옥을 탈출해 도착한 곳이 무간지옥인 격이었다.

처음 내 행색 덕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직원들은 내가 하나둘 아이템을 구매하기 시작하자 태도가 돌변했다.

마치 호구를 노리는 승냥이처럼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입과, 신상이라며 원하지도 않는 아이템을 보여주는 친절함까지.

그들은 정혜 누나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었고, 나는 그 지옥을 탈출하기까지 100억이라는 돈을 써야만 했다.

뭐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F등급에서 D등급까지 약 90여 개의 아이템을 구매하며 각성자 스토어 멤버십 가입에 등급 업도 받고 할인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돈을 쓴 만큼 대우를 받는 세상이다.

“후-. 그럼 이제 제품을 등록해 볼까?”

소파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린 나는 상점창을 열었다.

상점창을 열자마자 유독 내 눈을 끄는 것.

[보유 포인트:0]

계좌에 가득한 잔액과는 다르게 어디 내놓기 민망한 보유 포인트를 보며 나는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다음 퀘스트는 언제 주는 거야. 이놈의 시스템은 도대체가 알 수가 없어.”

그도 그럴 것이 첫 퀘스트를 끝낸 지 벌써 며칠이 지났지만, 다음 퀘스트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특성 퀘스트: 던전을 확보하자.]

……

[진행상태: 진행 중.]

1. 아공간이 생성될 부지확보 (완료).

2. ??? (진행 불가)

[보상: 아공간 청소부 전용 던전.]

[제한시간: 96일 17:37]

그리고 그건 특성 퀘스트도 마찬가지였다.

“저 물음표는 또 뭐냐? 어쩔 수 있나 퀘스트가 진행 불가라는데. 상점에 아이템 팔아서 포인트 벌어야지. 흐흐.”

하지만 이젠 괜찮았다.

내게는 상점창이 있으니까.

수행하기도 힘든 퀘스트를 클리어해서 10포인트 20포인트 버느니 상점 창에 제품을 팔고 말지.

상점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모르니까 처음엔 조금 헤매긴 할 테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F등급 아이템부터 차례대로 판매 등록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미소짓던 내 얼굴이 구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해당 등급의 제품은 판매하실 수 없습니다.

-해당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선 사용자의 등급을 올리셔야 합니다.

내가 E급 아이템을 판매 등록하려 하자 시스템이 토해낸 메시지다.

[상점 등급: F]

[검색: ]

[구매] [판매]

[보유 포인트:0]

그러고 보니 내 상점 등급은 F급.

처음엔 저 등급이 왜 있나 했지만 이런 용도였나보다.

“설마 구매도 막혀 있는 건 아니겠지?”

그때 내 머릿속에 든 것은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판매가 등급으로 막혀 있다면 구매 또한 막혀 있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하지만 보유 포인트가 0인 지금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전무.

나는 판매 창에 올려놓은 40개의 F급 아이템들이 빨리 팔리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구매 창을 열어 E등급의 아이템을 구매하려고 해봤자.

-포인트가 부족해 해당 아이템을 구매하실 수 없습니다.

라는 메시지만 토해낼 뿐이었으니까.

“하아-. 아이 그럼 상점 등급을 올릴 방법을 알려주든가…. 왜 넌 뭐 하나 쉽게 알려주는 게 없냐?”

나는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이미 상점 등급을 올릴 방법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이름: 강현

종족: 인간

레벨: 1

상태창에 여전히 1로 표시되고 있는 레벨을 올리는 게 그 방법이라는 것을.

그렇게 상점 창으로 꿀 빨려던 내 장밋빛 미래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

하루가 지났다.

하아.

그리고 내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각성자 스토어에서 구매한 F등급 아이템들의 가격은 대충 1000만 원에서 1억 원 사이.

그런 아이템을 모조리 10포인트에 판매가를 책정해 상점에 올렸고 아이템들은 단 하루 만에 모두 팔려나갔다.

시스템 창을 조작해서 새롭게 생긴 구매 댓글 목록을 살펴봤다.

-멸망할 세계의 예비 수호자: 좋은 무구를 싼값에 팔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은 세상의 거인이 낳은 아이: 누나 생일선물 득템 개꿀.

-마녀의 샘에 빠진 소녀: 마력수프 만들기 딱인 재료네요. 최저가 검색하다 우연히 발견했는데 앞으로 자주 이용할게요.

이들 덕분에 난 400 포인트를 벌었다.

한마디로 현금 20억을 400포인트로 교환한 샘.

근데 구매자들 닉네임이 좀 특이한데. 요즘 저렇게 짓는 게 유행인가.

어쨌든 400포인트로 발모제를 구매하면 40병. 약 40억 원어치의 발모제를 만들어 팔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20억은 남는 장사를 했지만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아…. 정말. 왜 이러는 거냐. 나한테…….”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내 예상이 맞았기 때문.

100포인트를 사용해 E등급의 아이템을 구매하려 한 내게 시스템은, 인생은 실전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해당 등급의 제품은 구매할 수 없습니다.

-해당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선 사용자의 등급을 올리셔야 합니다.

-특성 퀘스트 ‘던전을 확보하자’가 갱신되었습니다. 퀘스트창을 열어 확인해 주세요.

그 후 선명하게 눈앞에 떠오른 갱신된 퀘스트를 보며 나는 절규했다.

“아악!! ^#^%@$^$^!”

오만가지 쌍욕이 목구멍을 통해 쏘아져 나왔고 숨이 차서 더는 욕을 할 수 없을 때까지 욕을 토해냈다.

[진행상태: 진행 중.]

1. 아공간이 생성될 부지확보 (완료).

2. 100레벨 달성 (진행 중)

“꼭 나를 던전에 집어넣어야 속이 후련하겠냐?!!”

레벨업을 하기 위해선 당연히 몬스터를 사냥해야 한다.

저기 북쪽 두만강과 압록강 너머의 몬스터 필드에 갈 생각이 아니라면 당연히 던전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

그리고 그것은 내가 절규하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지금, 던전에 들어가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내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으니까.

“아오! 이 돌팔이. 사람을 만나면 고쳐진다며!! 반말 찍찍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내가 다시 그 병원에 가면 호구다! 호구!”

그렇게 나를 상담해준 이예슬이란 예쁜 이름을 가진 할아버지 상담사에 대한 원망도 해봤지만 변한 건 없었다.

“아오…. 씨. 간다. 가. 던전 가면 되잖아!”

그렇게 시스템에 반항하기를 포기한 채 옷을 갈아입고 집 밖으로 나왔다.

목적지는 각성자 스토어.

어제는 상점에 판매할 제품을 고르기 위해 가성비 좋은 제품들로 추렸다면 오늘은 내 목숨을 지켜줄 장비들을 골라야 했다.

가격 따윈 상관없이 말이다.

***

저녁 8시.

폐점을 한 시간 앞둔 강북 각성자 스토어는 고객들이 거의 빠져나가 한산했다.

그때 스토어 안으로 들어서는 한 손님.

온종일 서서 고객 응대를 하는 직원들에게는 보통 이 시간대가 누적된 피로도가 가장 높은 시간이다.

하지만 매대 앞으로 다가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지혜영은 만면에 미소를 띨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어제 하루 100억에 가까운 돈을 쓰고 간 거물이었으니까.

A급과 S급 아이템이 즐비한 강남점이라면 몰라도 이곳 강북점에선 한 고객이 하루에 100억 원어치의 아이템을 구매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것도 모두 F~D급의 아이템을.

“어서 오세요.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 때문에 지혜영의 목소리는 상큼하고 발랄했다.

어제 이 고객이 사간 방어구만으로도 그녀는 반년 치 월급과 맞먹는 인센티브를 받게 되었으니 미소가 절로 나올 수밖에.

하지만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 강현은 음울하고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F급 중갑 좀 보여주세요.”

“F급 중갑 말씀이십니까. 고객님. 이 제품이 요즘 가장 많이 나가는 제품인데요. 중갑치고는 무게도 가볍고 방어력도 높은 편이라…….”

지혜영이 태블릿으로 카탈로그를 보여주며 제품설명을 이어가려는 찰나.

“아니 그런 거 말고요. 무게 상관없으니까 방어력 제일 높은 거로 보여주세요.”

강현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방어력. 무조건 방어력이야. 생체기 하나라도 생기면 안 돼. 몬스터 중엔 독을 사용하는 놈들도 많잖아.’

그렇다. 강현은 무구를 모조리 방어력에 몰빵할 생각이었다.

경량화고 에어 프레시고 다 필요 없었다.

지금 강현에게 필요한 것은 방어력뿐.

“아…. 그럼. 이 제품은 어떠세요? 이 제품이 방어력은 D등급인데 무게가 많이 나가고 사용자 체형에 맞게 변화하는 자체 변형 마법을 제외하곤 기타 마법 옵션이 없어서 F등급으로 판정받은 제품이거든요. 아주 적은 양이지만 아다만티움도 섞여 있어서 F 등급 중에선 방어력만큼은 정말 최고인 제품이에요.”

검은 광택을 흘리는 풀 플레이트메일.

그것을 본 강현의 눈이 반짝였다.

투구와 건틀렛까지 포함한 갑옷의 무게는 300㎏.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탱크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무게였다.

하지만 카탈로그에 적힌 방어력은 정말 F등급 갑옷이라 볼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방어력만 두고 보자면 D등급 중에서도 최상이라 불릴만한 갑옷.

경량화 마법이라던가 기타 사용자 편의적인 마법이 부여되어있었다면 D급이라 부르기에 충분한 물건이었다.

물론 마법이 부여되면 그만큼 가격이 올라갔을 테지만.

풀 세트 가격이 F급치곤 비싼 편인 20억이었지만 정말 그 돈이 아깝지 않았다.

“이걸로 하죠. 제품 좀 보여주세요.”

결정을 내린 강현이 제품을 보여 달라고 하자 지혜영은 조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보시는 것처럼 이 제품이 무게가 상당히 나가서 중갑 마스터리 스킬이 없으신 분들은 사용하기가 곤란하실 텐데 괜찮으실까요?”

그녀의 걱정은 당연하였다.

노가다와 같은 던전 청소부 일로 근육이 발달해 있는 강현이었지만 이런 중갑을 착용할 전사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보통 이런 중갑을 착용하는 전사는 탱커가 99%였고 그런 이들은 대부분 모 영화에 나오는 녹색 거인처럼 근육이 우락부락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괜찮으니까. 보여주세요.”

강현의 단호한 대답에 지혜영은 최후통첩을 하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제품에 하자가 없는 한 개인적인 사유나 고객님의 변심에 의한 환불은 어려우세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걱정하는 마음이 이해는 됐지만, 강현은 계속해서 괜찮겠냐고 질문하는 그녀에게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걱정이 꼭 자신을 약자로 취급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고객 아닌가요? 환불하는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제품 보여주세요.”

가뜩이나 들어가기 싫은 던전을 들어가야 하는 마당이니 그의 심기가 좋을 리가 있겠는가.

그런 강현의 불편한 심기를 감지한 지혜영은 재빨리 고개를 숙여 사과하곤 제품을 가져왔다.

300㎏에 달하는 중갑이었지만, 마법 캐리어를 사용했기에 가녀린 그녀가 갑옷을 가지고 오는 것엔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강현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중갑.

전체적으로 검은색 일색인 갑옷은 마치 한 마리 흑표를 연상케 할 정도로 늘씬하게 잘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강현을 충분히 매료시킬 만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일단 외관상 멋있어 보이면 좋지 않겠는가.

“좋네요. 지금 결제할게요. 아, 제품은 잠시 후에 찾으러 와도 되죠? 액세서리 구매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물론입니다. 고객님.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갑옷을 구매한 강현은 서둘러 액세서리 상점으로 달려갔다.

목표는 힘.

목걸이 하나와 귀걸이 두 개 팔찌 두 개와 반지 열 개.

모든 액세서리를 힘으로 맞춘 강현은 포션 상점에 들러 한 병에 1억이 넘는 최고급 힐링 포션과 버프 포션 그리고 해독 포션을 잔뜩 구매했다.

자신의 목숨줄이니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F급 던전에 들어가는 것 치곤 지나치게 과한 강현의 사냥 준비는 계속되었고. 방어구, 액세서리, 포션, 스크롤 상점 순으로 진행된 강현의 쇼핑은 다시 방어구 상점으로 돌아와 거대한 타워실드를 구매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이날 강현의 각성자 스토어 1일 개인구매기록은 200억으로 경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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