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5화
퍼플의 말대로 이게 모노크롬의 영향이라면 새삼스러운걸.
대상이라는 게 생각보다 연예계에 영향력이 커서, 요즘은 ‘아이돌 음악이 대중성을 찾았다’라는 말도 나오고 있었다.
더군다나 대상의 주인공인 모노크롬이 묻혀 있다가 발굴된 그룹이었으니. 숨겨진 원석이 더 있다며 비인기 아이돌을 소개하는 기사도 몇 번 본 적이 있다.
‘후배들한테 기회가 생기면 좋은 일이지.’
그게 모노크롬이 지향하던 길이고.
대상 아이돌의 무게감을 느끼고 있는데 옐로의 에너지 넘치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래서 후배들이 많아진 김에, 저희도 그거 하고 싶어요.”
“뭐를?”
“아이리스 라인이요!”
옐로는 야망이 넘치는 표정으로 선언했다.
“그린이가 <타임스테이지>에 같이 나왔던 에니는 벌써 포섭했거든요?”
“친해진 거지, 무슨 포섭이야!”
옐로의 표현이 웃긴지 네이비가 까르르 웃었다.
에니는 프로듀서 문제로 베터 엔터테인먼트의 차기 걸그룹 런칭이 미뤄져서 아직 데뷔 전이었다.
데뷔도 안 한 걸그룹 새싹을 벌써 포섭했으면 대단한데.
“라인 만들려면 또 뭘 하면 좋을까요?”
“글쎄. 그건 모노크롬한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주인 님도 그게 있잖아요. 주인님단.”
그건 또 어디서 들은 거야?
머쓱하게 그건 허상의 집단이라고 말해 주려 했으나 반짝이는 눈동자를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모노크롬을 쭉 옆에서 봐왔으니 도움 정도는 줄 수 있겠지.
‘으음. 뭐가 좋을까.’
모노크롬은 힘든 후배들을 도와주다가 저절로 라인이 형성되었다.
그렇다고 아이리스도 힘든 상황에 빠진 걸그룹을 찾으라고 하기엔 뭐하고.
‘재민이처럼 후배들을 이리 굴렸다, 저리 굴렸다 해 보면……?’
마침 옐로가 아이리스의 퍼포먼스 라인 아니었나.
그러나 트윙클 챌린지 때 옐로는 팀 미로의 로아에게 시달린 적이 있었다. 재민이 아니라 굴려지는 후배 입장에 가까웠지.
그게 아니면…… 모노크롬은 몬클하우스에 초대하면서 계속 다른 아이돌을 만났는데.
“역시 친분을 쌓으려면 주기적으로 만나는 게 좋지 않을까? 어디 초대를 하거나.”
“우리 그거 있잖아! 아이리스 주간.”
“그건 뭔데?”
고개를 갸웃하자 말을 꺼냈던 네이비가 설명해줬다.
“저희가 7명이니까 월화수목금토일 한 요일씩 맡아서 라디오처럼 진행하는 거예요. 각자 하고 싶은 거로.”
오호라. 내가 잠시 아이리스의 프로듀싱을 맡았을 때 컨텐츠의 중요성을 강조했더니, 이번에 아예 정기적인 자체 컨텐츠 코너를 만들 생각인 듯했다.
“처음엔 멤버들끼리 하다가 자리 잡으면 게스트도 초대할 수도 있고. 괜찮겠다.”
걸그룹 팬들은 특히나 컨텐츠에 목마른 경우가 많으니까.
어느새 그게 뭐냐고 웃던 네이비와 퍼플까지도 아이리스 라인을 위해 재잘재잘 아이디어를 내기 시작했다.
보이그룹에 모노크롬 라인, 걸그룹에 아이리스 라인이 있으면 든든하겠는걸.
그들의 아이돌 업계 정복을 응원하고 돌아오는데, 우형의 대기실 앞에는 또 새로운 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허억. 안녕하세요! 트웬티스퀘어의 식스라고 합니다! 저! 진짜! TV에서나 보던 선배님들을 여기서 뵐 줄 몰랐는데! 사인 받을 수 있을까요?”
“사, 사인? 그, 펜, 펜 있나?”
후배의 사인 요청에 허둥지둥하는 더클랜이었다.
더클랜은 우형보다 먼저 컴백하여 이제 활동 마지막 주.
아마 다들 우형의 대기실에 인사하러 왔다가 앞에서 마주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사인 요청에 저렇게 당황하는 모습이란…….
‘진짜 과거 모노크롬을 많이 닮았단 말이지.’
후배는 다른 멤버 없이 혼자였는데, 사인하는 더클랜이 신기한지 반짝반짝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방송으로 이미지가 많이 순화되긴 했어도 실물로 보면 정말 무섭다는 말이 많은 더클랜이었다. 칭찬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의미의 실물 깡패라는 말이 돌 정도.
인상이 강해서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완전체 더클랜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모습이었다.
“선배님들 이번 활동도! 정말 정말 잘 봤어요. 저희도 한번! 댄스 커버를 해 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우리…… 노래를?”
“네! 정말! 롤모델이십니다!”
힘이 잔뜩 들어간 후배의 말에 이담이 입꼬리를 실룩이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클랜 멤버들은 체감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이미 1위 가수 타이틀도 얻었고, 후배들에겐 충분히 멋진 선배로 보일 텐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흥미로운 광경을 보고 있다가 다가가자, 더클랜 멤버들이 나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두목님!”
“너흰 두목님으로 정착된 거니…….”
실물 깡패에게 듣는 두목님 소리는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앞에 있던 후배도 내가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안녕하십니까!” 하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너희 다 우형이한테 인사하러 온 거지? 내가 불러줄…….”
“어! 너희 또 왔네.”
문밖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는지 우형이 먼저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더클랜이 찾아왔다는 소식에 오늘의 일일 매니저 해랑도 옆으로 다가왔다.
“오늘 활동 마지막 날이라서 인사드리려고요.”
“아, 오늘이구나. 활동 수고했다. 그리고…….”
더클랜을 격려한 우형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식스라는 예명의 후배는 입을 벌리고 있다가 우형의 시선을 받자 머리를 팍 숙였다.
“아, 아, 안녕하십니까! 트웬티스퀘어의 식스입니다!”
더클랜 앞에서도 힘이 바짝 들어가 있던 그는 더 선배인 모노크롬을 보자 빳빳하게 얼어 버렸다.
모노크롬과 친한 후배들을 주로 봐 왔더니, 이 정도로 대선배 대하듯이 보는 건 또 신선하네.
그래도 우형에게 인사하러 찾아온 건 맞는지 식스는 떨면서도 할 말을 다 했다.
“서, 선배님들 대상 소감 봤어요. 소원이 이뤄지셨다고 해서 저희도 새해에 소원을 빌었거든요. 이렇게 직접 뵈니까…… 저희도 힘을 얻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초면인데 벌써 몬클교 신자 같은 고백이었다.
마침 오늘은 신선 우형과 2대 토템 해랑이 같이 있는 날. 효험을 보고자 찾아온 것이라면 적절한 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형은 신선 능력을 바라는 후배에게 덕담을 건넸다.
“나한테 크게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노력이 배신하진 않더라. 잘될 거야. 응원할게.”
“감사합니다!”
식스는 선배들을 오래 붙잡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듯, 꾸벅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여전히 모노크롬의 대기실에 꿀이 발렸는지, 교대하듯이 <뮤직더라이브>의 MC 도한이 나타났다.
“왜 다들 복도에 모여 계세요?”
“인사하려다 보니 어쩌다……. 트웬티스퀘어가 오늘 컴백하는 신인인가?”
도한은 MC니까 출연진 정보는 꿰고 있겠지.
도한도 멀어져가는 식스의 뒷모습을 보고는 내 질문에 바로 대답했다.
“신인 아니에요. 아니, 신인인가? 저희 이코드보다는 먼저 데뷔하셨어요.”
이코드보다 먼저 데뷔했는데 신인이기도 해?
모순된 답변에 의아함을 느끼고 있는데.
“활동 1년 하시고, 최근에 재데뷔하셨더라고요.”
“아아. 재데뷔…….”
드물지만 그런 경우가 있지.
데뷔는 마쳤는데 반응이 미미할 경우 혁신을 꾀하기 위해 택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도한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가 모노크롬의 대상 소감을 보고 소원을 빌었다던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확실히 이해했다.
이 짧은 설명만으로도 트웬티스퀘어라는 그룹이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왔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튼! 더클랜 찾아다녔는데.”
도한이 MC용 큐카드를 더클랜의 리더, 동영에게 건넸다.
“다음 MC 잘 부탁드립니다.”
“가, 감사합니다.”
도한이 배꼽 인사를 하자 동영도 얼떨결에 같이 허리를 숙였다.
도한이 <뮤직더라이브>의 MC에서 내려오고, 그 자리에는 동영이 새로운 MC로 들어간다고 한다.
최근엔 다른 멤버들도 이렇게 활동이 늘어나서 더클랜의 소속사인 아우름 컴퍼니가 멤버들 눈치를 좀 더 보고 있다나, 뭐라나.
‘원래 이담이가 혼자 회사 제어기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잘된 일이지.’
차기 MC에게 큐카드 수여식을 마친 도한은 크게 미련이 없어 보였다.
“MC도한 랩네임 같아서 잘 어울렸는데.”
“저는 이제 다음 앨범 활동 준비 들어가야죠.”
<뮤직더라이브>는 MC의 회전이 빠른 편이었다.
오래 보지 못하는 건 아쉬워도 많은 아이돌에게 기회가 돌아가는 것은 장점이었다.
“너희 컴백 티저 뜨기 시작했지? 컨셉이…… 화랑이었던가?”
“네.”
“……설마 장르는 힙합이니?”
도한은 “그건 스포일러라.”라며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지만.
‘웃는 걸 보니 조만간 S-힙합을 실제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도한은 음악 방송 MC가 처음인 동영을 위해 다양한 팁을 전수해 주고.
그 뒤에선 우형이 신인 가수 컨셉답지 않은 선배미를 뽐내며 흐뭇하게 웃었다.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