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4화
모노크롬의 공식 영상은 보통 무대 의상 혹은 정돈된 사복 차림으로 찍지만, 연습생이라며 자신을 소개하는 우형은 막 연습하다 나온 듯 수수한 티셔츠 차림이었다.
거기에 세팅되지 않은 헤어는 꼭 ‘비주얼 컨셉이 정해질 때까지 어떤 헤어스타일을 할지 몰라 머리카락을 길러야만 하는 데뷔 직전 연습생’을 떠올리게 했다.
우형의 이런 신인 부캐 연기는 데뷔 티저 이후 활동 비하인드에서도 이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면 무대 위에서 보여줄 프로다운 모습이 더 강조될 테니까.’
뮤직비디오 속에서도 사람들은 그의 옷차림을 보고 촌스럽다고 웃지만 그의 노래에 금세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따라서 이 페이크 데뷔 다큐멘터리의 목적은 어수룩한 모습 많이 찍기!
“이런 좋은 회사에서 좋은 데뷔 기회를 얻게 되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우형의 조심스러운 말투가 신인 연기와 합쳐지니 ‘카메라가 어색한 신인’의 모습을 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다.
“스튜디오 어스의 연습생 생활은 어떤가요?”
“제가 회사 첫 번째 연습생인데 선배님들이 관심을 많이 주셔서, 네…….”
“가장 잘 챙겨주는 선배는?”
“…….”
스태프의 질문에 우형은 눈동자를 굴리며 어물거렸다.
현실에서는 착한 선배로 유명한 모노크롬이지만, 페이크 다큐멘터리 속 회사는 가상의 스튜디오 어스.
우형뿐만 아니라 멤버들도 이 컨셉에 참여했다.
“녹음실에 먼지가 이게 뭐야! 나 노래하다 기침이라도 하면 책임질 거얏!”
“죄, 죄송합니다.”
까랑까랑한 한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이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동안 우형은 돌돌이 테이프로 녹음실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그러다 한이의 코트 먼지를 떼주는 척하며 그의 머리카락을 돌돌이로 밀어버리자마자 떨어지는 스태프의 “컷!” 사인.
“아, 아야. 내 소중한 머리카락 뽑으려고.”
“밉상이라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네.”
다행히 테이프의 접착력은 약했지만 한이가 엄살을 부리자 우형이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떼어냈다.
“착한 한이는 이 컨셉 너무 어렵다.”
한이가 제 이름을 3인칭으로 부르며 한숨을 푹 쉬었다.
한이가 이런 성격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지만 연기를 너무 잘해서 문제였다. 빛을 발하는 연기력에 나도 박수가 절로 나올 정도.
“누구보다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연기가 아니라 진짜 같았어.”
“아차, 이놈의 재능이. 저 성격 안 좋다고 소문나는 건 아니겠죠? 연기를 좀 못해볼까요?”
“아냐. 페이크 다큐가 원래 그렇지.”
아무도 실제로 믿지 않는 걸 전제로 만드는 영상이니까.
단지 평소에 한이 본체가 지내는 공간에서 본격적인 연기를 펼치니까 현실감이 두 배가 되었다.
그런데 이 컨셉에 현실처럼 몰입하는 건 의외로 연기파 한이가 아니라 다른 멤버였다.
“난 데뷔곡이 댄스곡 아닌 건 인정 못 해!”
조금 과장이 들어가긴 했지만, 이건 연기가 아니라 본심이었다.
재민은 우형의 솔로 앨범 기획 단계에서 꾸준히 댄스곡을 밀었으나, 결국 ‘이상 속의 밴드 보컬을 꿈꾸는 소년’ 컨셉과 어울리지 않아서 반려되었다.
‘댄스를 넣으면 ‘댄스 가수를 꿈꾸는 소년’ 컨셉이 되어버린단 말이지…….’
댄스 가수를 원하는 청년 재민은 우형과 내 옆에서 “컬러즈가 좋아할 텐데……. 댄스곡 재밌는데…….” 하며 미련 넘치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곤 했다.
댄스 무대가 시각적으로 볼 게 많다는 점에는 동의했기에 “그럼 2집을 내게 되면 댄스곡은 어때?”라고 했더니.
“그러니까 여우는 지금부터 댄스곡으로 2집을 준비한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형님.”
데뷔도 안 했는데 2집부터 준비하자는 재민과 옆에서 그를 부추기는 준해.
가상의 스튜디오 어스에는 솔로 가수 한이와 댄스 유닛 제이제이가 선배로 등장한다.
아마 동생 라인이 우형처럼 따로 데뷔하게 되면 이런 형태가 아닐까 해서.
그때가 되면 이들이 또 우형의 후배 연습생으로 들어오는 컨셉으로 바뀌겠지.
이렇게 뻗어 나가는 스튜디오 어스 세계관.
그리고 아직 나오지 않은 한 멤버는 활동 비하인드에서 등장할 예정이었다.
***
“가수랑 같이 메이크업 받는 매니저가 어디 있어.”
“여기 있잖아.”
우형의 혼잣말에 해랑이 뭐가 이상하냐는 투로 대답했다.
우형의 솔로 활동에는 특별 매니저가 있었다.
연예인보다 더 연예인 같은 매니저. 그게 해랑이 맡은 역할이었다.
페이크 다큐멘터리는 이렇게 데뷔 과정뿐만 아니라 활동 비하인드로도 이어졌다. 당연히 진짜 비하인드는 따로 있고.
페이크 비하인드를 위해 해랑도 무대에 오르는 우형과 함께 메이크업을 받는 중이었다.
나는 메이크업 디자이너에게 다가가 내 요구사항을 전했다.
“해랑이는 따로 비주얼 컨셉이 정해진 건 아니니까, 아무튼 연예인 느낌 나게 해 주세요.”
“글리터도 바를까요?”
“으음. 무대 메이크업까지는 안 해도 괜찮을 것 같고, 헤어만큼은 각 잡고 세팅한 느낌이 났으면 좋겠어요.”
“무대 오르는 건 저인데…….”
해랑의 스타일링을 정하고 있는데 잠시 뒷전이 된 우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도 화려하게 하고 싶어?”
“꼭 그렇다기보다는요. 다들 해랑이 신경 쓰시니까.”
우형은 눈을 살짝 가리는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치우며 머쓱하게 웃었다.
이거 또 의도치 않은 나르시시스트 발언 같은데. ‘주인공은 나니까 내게 주목해달라’ 같은.
“하지만 넌 아직 신인이잖아. 해랑이는 프로 매니저 설정이란 말야. 네가 연차가 더 차야지 해랑이를 이길 수 있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진짜 신인 된 기분이에요…….”
말은 이렇게 해도 우형을 방치하는 게 아니었다.
이미 그의 스타일은 회의에 회의를 거쳐 완성된 터라 더 건드릴 게 없었다.
‘촌스러운데 연출된 촌스러움이라 결과적으론 세련되어야 하고…….’
오랜만에 제시된 내 난해한 주문에 헤어 디자이너와 스타일리스트 팀은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는 듯하다.
다만 ‘어떻게 조금이라도 더 이쁘게 만들까’ 고민하느라 시간이 걸렸을 뿐, 우리의 지향점은 뚜렷했기에 헤맬 일은 없었다.
우형의 스타일은 준해가 찾아온 자료에서 힌트를 얻었다.
‘옛날 순정만화에 나오는 음악 하는 미소년 캐릭터.’
머리도 좀 길고, 조금 치렁치렁하고, 기타 케이스 메고 다니고.
그래서 지금 우형의 의상은 세미 펑크룩이었다. 유행은 돌고 돈다고, 마침 요즘 Y2K 감성이 뜨고 있단 말이지.
재킷이고 바지고 찢어진 곳이 많은 스타일이라, 컬러즈는 무릎 시리지 말라며 우형의 데미지진 사진 위에 아기자기한 그림 스티커를 붙여 올리곤 했다.
그에 비해 해랑은 단정, 깔끔한 스타일. 그러나 피지컬은 너무나도 연예인인.
“전에 봤을 때보다 긴장 많이 풀린 것 같지? 해랑이 네가 보기에.”
“네. 며칠 전엔 컨셉에 몰입하는 줄 알았는데.”
해랑은 진짜 매니저가 아니고, 따라서 우형의 활동에 매일 붙어 있지 않았다.
활동 1주 차 첫날과 마지막 날만 함께할 예정이었는데, 며칠 전인 활동 첫날엔 해랑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대상까지 받아본 우형도 막상 솔로 데뷔를 앞두니 생각보다 긴장을 많이 했던 것이다.
‘그땐 계속 해랑이 붙잡고 말 걸더니 이젠 웃으면서 자길 주목하란 농담도 하고.’
많은 아이돌이 솔로 활동 땐 의지할 멤버가 없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하던데 일일 매니저를 둔 건 정답이었다.
“그럼 해랑이는 복도에서 우리 비하인드 영상 찍고, 컬러즈 대기 줄에 잠깐 얼굴 비추고…….”
내가 해랑의 스케줄을 챙기고 있자 우형이 또 앞머리를 슬쩍 치우고 관심이 필요한 눈길을 보냈다.
“너는 사녹 전까지 체력 비축해야지.”
“그, 그렇죠.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점점 쭈굴한 신입 컨셉에 몰입하는 것 같은데.
‘하지만 넌 대상 아이돌이잖아…….’
언제 또 한번 칭찬 감옥에 가둬버려야겠는걸.
잠시 후에 컬러즈와 만나면 자연스레 칭찬 감옥이 형성되겠지만 말이다.
***
우형은 신인 컨셉에 빠져들고 있지만 어쨌든 모노크롬은 인기 아이돌이고 나는 그들의 담당자. 방송국에 오면 만나자는 사람이 많았다.
오늘도 안면이 있는 작가와 잠시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는데, 코너에 숨어 소곤거리는 수상한 여자아이 무리를 발견했다.
“가서 인사하자.”
“우리 아실까?”
“바쁘신 것 같은데…….”
걸그룹으로 추정되는 상큼한 의상의 여자아이 네 명.
그들이 누굴 보고 있나 궁금해서 나도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어봤더니,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앗! 주인 니임!”
이렇게 발랄하고 크게 날 ‘주인 님’이라고 부를 사람은…… 옐로뿐이었다.
옐로가 이쪽을 바라보자 내 앞에 있던 여자아이 무리는 화들짝 놀라며 “저분이 주인님이래.”, “헉.” 하는 소리를 내며 자리를 떴다.
‘……아니, 방금까지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후배로 보이는 아이들이 아이리스를 연예인 보듯이 보고 있었다는 거 아니야.
그런데 ‘주인 님’의 등장이 이 뿌듯한 장면을 망치고 말았다.
그런데 얼핏 “진짜 계신 분이었어?”라는 말도 들린 것 같았는데……. 주인 님을 아나? 혹시 무지개인가?
이미 떠나버려서 물어볼 수도 없었기에 나는 아이리스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보색 조합이네?”
“막내 라인끼리 따로 방송국 채널에 올라갈 영상 찍을 게 있어서요.”
퍼플이 다시 길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대답했다.
어쩐지 귀여운 조합이다 싶더니.
여기 모여 있는 건 옐로와 네이비, 퍼플.
가장 어린 네이비와 퍼플은 당연히 막내 라인이고, 셋째인 옐로도 가끔 아이리스의 막내 라인에 포함되었다. 언니 라인 중에서 막내라나.
“아까 저기 너희 후배들이 있었는데, 부끄러웠나 봐. 인사하려고 기회 보다가 나 때문에 놀라서 도망간 것 같아…….”
“그래요? 누구지?”
내가 모든 아이돌의 얼굴을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일하면서 꽤나 많은 아이돌의 얼굴을 외웠다. 낯선 얼굴이라면 보통은 신인이었다.
“아마 신인 후배들 같은데. 너희가 자기들 이름 알지 궁금해하더라고.”
“그러고 보니 우리 요즘 새로 만나는 후배들이 많았지?”
네이비가 옐로와 퍼플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나도 모노크롬에게 인사하는 후배 중에 처음 보는 얼굴이 많아졌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 세상 가수와 저 세상 가수의 구별이 안 되는 상태였기에 그냥 넘어갔었다.
‘그런데 아이리스도 비슷하게 느꼈다면 이상하네.’
내가 기존에 알던 연예인과 모노크롬이 만났을 때, 모노크롬은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다.
‘원래 알고 있었지만 그간 마주칠 일이 없던 분’ 정도로 인지했을 뿐.
그만큼 기존의 연예계와 게임 속 연예계는 자연스레 합쳐졌는데 아이리스 멤버들은 ‘요즘 못 보던 후배들이 많아졌다’라고 한단 말이지.
말 그대로 잘 모르던 후배들이 방송국에 나타나는 빈도가 높아졌다는 뜻이었다.
“요즘 아이돌 업계가 좀 커졌나?”
“그럴지도요. 아이돌 그룹이 대상을 받은 게 몇 년 만이잖아요.”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