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2화
재민이 태블릿을 들고 와 우형에게 내밀었다. 화면에는 남자 장발 이미지가 몇 개 떠 있었다.
“이 정도로 길게 기를 생각은 없어.”
“아, 왜. 길러 줘.”
재민은 미련을 못 버리고 우형에게 투정을 부렸다.
“재민이 네가 길러보면?”
“저요? 저는 가벼운 게 좋아서.”
그렇게 말하며 재민은 내가 정말 기르라고 시킬 것 같았는지 도망갔다.
하긴 댄서는 머리가 길면 신경 쓸 게 많지. 걸그룹이 무대 위에서 장발을 통제하며 춤추는 것을 볼 때마다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재민 외의 멤버들도 마치 선생님께 시험 답안지를 제출해 검사받듯이 번갈아 가면서 찾아왔다.
해랑은 우형 옆에 앉아 어떤 밴드의 공연 사진을 함께 찾기도 하고.
한이는 드라마 촬영을 나가서도 계속 메시지를 보내며 우형의 핸드폰을 울리게 했고.
모노크롬의 기획 담당 준해는 아예 노트북을 들고 와서 프레젠테이션할 기세였다.
‘이렇게 멤버 사랑이 지극한 팀이라니.’
흐뭇하게 바라보는 나와 다르게 우형은 멤버들의 요구 사항이 많아져서 머리가 복잡한 듯했다.
결국 우형은 멤버들이 전부 회사에 나온 날 그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너희는 나를 뭐로 만들고 싶은 거야……?”
우형은 멤버들이 모아온 이미지를 한 폴더에 담아 그들에게 보여줬다.
계속 새로운 것을 찾으며 파고들다 보니 점점 특이한 자료가 많아졌고.
‘이것들을 다 조합하자면…… 70년대 사이버 펑크 세계관 속 무지개색 머리의 메탈 밴드맨 정도일까.’
멤버 개개인이 ‘자신이 생각하는 우형의 솔로 앨범’에 맞춰서 전부 다른 자료를 들고 찾아오니 각자의 개성이 너무 강해져 버렸다.
“와. 이렇게 보니 가관이다.”
“이 가발 사진 모음집은 누구 거야?”
“재민이 형이 코스프레 가발 계속 검색하고 있던데?”
멤버들도 중구난방인 점을 인정하며 반성했다.
“각자 다른 방향으로 발전시키지 말고, 이제부터 한 이미지를 정해서 수렴해나가자.”
이 정도면 자료는 충분히 모은 것 같으니까 구체화하는 단계로 들어가야지.
내 말에 빠르게 수긍한 멤버들은 ‘그러면 어떤 여우형을 보여줄 것인가’라는 주제로 토론을 시작하려는데…….
“그런데 너희도 내 솔로 앨범 기획에 참여하는 거야?”
“당연하지! 우리 빼놓으려고?”
재민이 무슨 말을 하냐며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어서 해랑은 멤버들이 이렇게 적극적인 이유를 설명했다.
“스튜디오 어스에서 데뷔하는 첫 가수잖아.”
모노크롬은 스튜디오 어스의 첫 아티스트지만, 뉴마에서 이적해 온 것이라 첫 데뷔 가수는 아니었다.
‘그렇구나. 스튜디오 어스가 처음으로 만드는 아티스트.’
우형의 솔로 데뷔는 자연스럽게 정해져서, 이런 의미가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 못 했다.
멤버들에게는 이 점이 매우 중요한 듯했다.
“데뷔하면 신인 가수잖아요. 그러니까 신인 느낌이 났으면 좋겠어요. 예전에 잡지 촬영할 때 형이 신입 사원 했던 것처럼.”
준해가 구체적인 예시를 들며 원하는 느낌을 설명했다.
“스튜디오 어스의 신인 가수 여우형, 그리고 저희는 소속사 선배.”
신인처럼 풋풋한 느낌이 났으면 좋겠다는 뜻인지, 우형을 강제로 후배 신인 가수로 만들어 선배 노릇을 하고 싶다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우형은 다른 목적이 있어 보이는 멤버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너희도 나중에 솔로 데뷔하게 되면 내 후배인데? 지금 이렇게 막 나가면 안 될 텐데.”
“그건 그때 일이고.”
한이는 아무 걱정 없는 표정이었다.
나중을 걱정하지 말고 지금을 즐기자. 좋은 마음가짐이지.
졸지에 선배 4명을 모시게 될 위기에 처한 우형이 내게 시선으로 도움을 구했다.
“진짜 괜찮은 건가요?”
“그런 말이 있잖아. 사공이 많으면?”
“산으로 간다……?”
우형이 퀴즈를 맞히듯 멍하니 정답을 내뱉었다.
그것도 맞지만 내가 하려는 말은 그게 아니었다.
“아니. 사공이 많으면 재밌다.”
사공이 다들 제대로 일한다면 배가 빠르게 나갈 테니 재밌겠지.
좋은 동료가 있으면 일하기 즐겁다는 속담이었다.
‘거기에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면 더 재밌지.’
놀이공원의 후룸라이드처럼…….
“두목님 속담 사전엔 새로운 게 많네요. 저번에 알려주신 ‘참을 인은 세 번이 한계다’도 그렇고.”
“속담도 시대에 맞춰서 변화해 나가야지.”
그게 바로 온고지신 아니겠어.
정식으로 노 저을 권리를 얻은 멤버들은 아예 눌러앉아 우형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이런저런 요구를 했다.
‘이게 진정한 프로듀싱 회사지.’
모노크롬 조별과제. 발표자 여우형.
솔로지만 외롭지는 않은 우형의 데뷔 앨범 기획은 순탄하게 나아갔다.
***
엄마는 최근에야 모노크롬 멤버들의 얼굴과 이름을 외운 듯했다.
“그런데 남자애들이 너무 말랐더라. 밥은 잘 먹는다니?”
“밥이야 잘 먹고 다니지. 안 먹이면 팬들이 회사 죽이러…… 아니, 꾸준히 운동도 하고 우리보다 더 건강할걸.”
TV야 보지만 거의 드라마 위주.
엄마는 가수라는 존재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다. 자주 들려오는 노래는 알아도 그걸 부른 가수가 누군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런 엄마 아래서 자라온 나도 가수에 크게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였고.
‘아이돌도 그냥 ‘아이돌’이라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미지만 알고 있었지…….’
마이 엔터를 플레이하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냥 반짝반짝한 아이돌과 캐주얼 게임의 조합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플레이 초반에도 헤맸고, 실제 엔터 업계에 들어온 후에는 더욱 많이 헤맸다.
‘가수를 열성적으로 좋아해 봤으면 좀 달랐으려나?’
아니지. 심연을 너무 깊이 들여다보지 않아서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팬의 심정에 더 이입했으면 퀘스트를 수행하기도 전에 의욕이 꺾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번 가라앉은 그룹이 다시 뜨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았을 테니까.
어쨌든 돌알못이던 나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평화로운 세계에 도달했다.
엄마는 내가 가수들과 함께 일한다니까 연예계에도 조금씩 관심을 보였다.
“어? 엄마, 이 노래 알아?”
틀어놓은 TV에서 어렴풋이 노래가 흘러나오자 엄마가 흥얼거리며 따라 불렀다.
귀에 익은 노래였기에 놀라며 물어보자.
“요즘 라디오에 많이 나오던데. 노래가 좋더라.”
“그럼 배명희 선생님도 알아? 이 노래 부르신 분.”
“응. 아주 옛날에 노래 내다가 요즘 다시 TV 나오잖아.”
그럼 배명희 선생님은 원래 현실에 계셨나?
내가 마이 엔터 세계 속에 있을 때도 해외의 유명 가수는 그대로 존재했다.
‘내가 몰랐을 뿐인가? 아니면, 세계가 합쳐지면서 엄마한테도 없던 기억이 생긴 걸까?’
내가 가수를 많이 알았으면 이 세상 가수와 저 세상 가수를 구별할 수 있었을 텐데, 아는 가수가 많지 않았던 탓에 확인할 길이 없었다.
다만 나도 세상과 아예 단절되었던 건 아니었다. 당연히 원래 알고 있던 연예인들도 있다.
그리고 요즘은 모노크롬이 활동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모습을 보며 세계가 합쳐진 걸 실감하는 중이었다.
‘뭐, 결국 이런 세상이 됐는데 굳이 구별할 필요는 없지.’
여기가 성골, 진골 따지는 신라도 아니고…….
내가 엔터 업계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이야기를 밖에 말하고 다니거나 연예계 인맥을 자랑한 적은 없었는데, 엄마에겐 이 이야기를 전해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나 배명희 선생님이랑 친해.”
대상 아이돌과 같이 일한다는데도 안 믿던 엄마.
스튜디오 어스의 사장님이 누구고, 동료들이 어떻다는 등의 이야기를 계속 전한 덕분에 멀쩡한 회사가 맞냐며 의심하는 것은 그만두었지만.
옛날 연예계에 조폭이 많이 관여되었단 사실이 머릿속에 뿌리 깊이 자리 잡았는지, 여전히 연예계를 향한 불신은 남아 있었다.
내가 일하면서 별별 꼴을 다 보는 게 아니냐며 걱정하던 엄마에게 좋은 사람들과 많이 알고 지낸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는데.
“넌 거기서 일하면서 거짓말이 많이 늘었다?”
“아니이, 진짜야…….”
……사실 엄마는 연예계가 아니라, 나를 못 믿는 게 아닐까?
갑자기 딸이 평생 관심도 없던 분야에 깊이 침투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도 가끔 이 상황이 얼떨떨하긴 하지만!
“라솔 씨네 회사랑 계약하셨는데 내가 라솔 씨랑 잘 알고 지내는…… 엄마, 이라솔 씨는 알아?”
“글쎄. 들어본 것도 같고.”
라솔 씨는 모르고, 배명희 선생님은 알고. 옛날에 활동하던 사람 이름만 좀 아는 건가.
“그럼 천상식 씨는 알아?”
“나 그 사람은 별로더라.”
음. 나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아.
한이는 사인 셔틀, 아니, 대외적으로만 친한 선배인 그의 사인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직원들의 부모님이 좋아할 수도 있으니까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회사에 둔 천상식의 사인이 몇 장 남아있는데, 엄마를 위해 가져올 필요는 없어 보였다.
***
“그래서…… 선생님 사인을 받아갈 수 있을까요?”
“어머나. 어머니가 내 노래를 잘 들어주신다고요.”
느닷없는 나의 사인 요청에 배명희가 웃었다.
내가 그녀와의 친분을 자랑했다가 거짓말쟁이로 몰린 이야기를 했더니 재밌어하는 눈치였다.
“가만 보자. 그러면 어떻게 써야 우리가 친해 보일까.”
배명희는 빈 종이에 사인을 해두고 어떤 멘트를 쓸지 고민에 빠졌다.
그사이에 라솔이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내려와 내게 건네기에 감사 인사를 전했다. 참고로 내가 와 있는 곳은 라솔의 회사다.
“제가 다 서운해라. 주인 씨는 저도 스카우트하고 싶을 정도로 일 잘하시는데. 그것도 말씀드려보지 그래요?”
“말해볼까 했는데…….”
라솔의 상냥한 제안에 대답할 말을 고르고 있자 라솔이 먼저 내 표정을 읽어냈다.
“앗. 제 이름을 모르시나……?”
“……저희 엄마가 특이한 거죠.”
내가 라솔을 잘 모를 때 송준오 피디가 저런 표정을 지었던 것 같은데.
나도 뭐라 할 처지가 아니었기에 화제를 돌렸다.
우리는 꽤 정기적으로 모였다. 일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지인 모임. 물론 일 이야기도 안 하는 건 아니었다.
“성운 씨가 우형이 솔로 앨범에도 참여해 주셔서 정말 든든해요.”
“뭘요. 성운이는 우리 회사보다 후배들 회사에 가는 걸 더 좋아하던걸요?”
프로듀서로 자리 잡은 성운이 다른 프로듀싱 회사를 자꾸 오가는 게 신경 쓰이지 않을까? 물론 우리가 그를 우리 회사로 데려오려고 물밑작업을 할 건 아니지만.
그런 마음으로 라솔을 바라보니 그녀는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성운이가 저희한테 좀 시달릴 때가 있는 것 같은데, 거기 가 있으면 알아서 잘 있겠거니 안심되기도 해요.”
설마 어린이집 시즌2……?
‘아, 아니지. 성운 씨도 우리 도와주러 오는 거니까…….’
모노크롬의 병아리 같은 후배들이 자꾸 찾아오겠다고 스튜디오 어스의 문을 두드리고 있어서 소문난 키즈 카페 같은 기분을 느끼는 중이다.
이 대화를 듣던 배명희는 성운의 마음이 이해되는 듯했다.
“주변에도 막둥이만 아들인 경우가 많은데. 그런 애들이 어릴 때 꼭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걸 좋아하더라고. 집에서 누나들이 치근대는 게 싫다나. 그런데 또 누나가 없으면 울어요.”
“그러고 보니 라솔 씨 회사는 여성 아티스트가 더 많은 이유가 있는 거예요?”
“꼭 그런 건 아닌데. 아참! 마침 최근에 저희가 눈독 들이고 있는 분이 있거든요.”
라솔이 손뼉을 짝 치며 한 남자 가수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사님도 아세요? 도준결 씨.”
“<유어보이스>에 나오시는 분이요?”
“네! 어디서 그런 분이 나타나셨는지.”
도준결. 이름만 보면 20대 청년 같지만, 그는 40여 년의 경력을 지닌 중견 가수였다.
긴 무명 시절을 거쳐 새로운 기회를 찾으러 방송에 나왔다는 그는, 대체 이 실력에 어떻게 무명이었냐고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뛰어난 가창력을 지니고 있었다.
온 커뮤니티에 그의 무대 영상 링크가 돌아다닐 정도로 화제를 몰고 다니는 그였으나, 나는 어쩐지 자꾸만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미친 보컬 장인이 생각난단 말야.’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