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1화
내가 리더가 아니었다면. 다른 멤버가 리더로서 모노크롬을 이끌어나갔다면.
‘해랑이?’
해랑은 차분하니까 자신보다 리더 역할을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우형을 제외하면 가장 연장자이기도 하고.
하지만 가끔 동생의 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가 떠올랐다. 해랑은 동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경향이 있었다.
리더 역할까지 맡게 되면 기꺼이 자신을 소모할 터였다. 우형은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다.
‘한이는…….’
해랑과는 다르게 항시 멘탈이 단단한 편이라, 그런 면에선 리더에 가장 걸맞을지도 모른다.
옛날엔 말썽꾸러기였던 그도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차분해졌으니.
그러나 한이는 승부욕이 무척이나 강했다. 팀의 대표가 되면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타입.
그가 리더가 되면 지금 같은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지 못할 것이다.
‘윤환이한테는 일을 더 맡길 수가 없지.’
우형이 최근 침울한 기분에 빠진 것이 바로 윤환 때문이었다.
그가 문제여서가 아니라, 그에게 미안해서.
윤환은 현재 회사의 의사에 따라 솔로 활동을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회사에서 발언권이 약한 우형이 리더 노릇을 하겠다고 그의 솔로 활동을 따라다니며 챙겨줄 수도 없었다.
바쁜 그에게 일을 떠맡기는 건 당연히 안 될 일이었다.
‘그럼 준해?’
준해는 똑 부러지니까 뭐든 잘하지 않을까.
18살의 나이로 데뷔한 막내 준해는 올해로 22살. 데뷔 당시 우형의 나이가 되었다.
세월이 지난 것을 체감하던 우형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준해는 학교 다니느라 바쁘고…….’
모노크롬의 활동은 연 단위로 계획되는 게 아니라 즉석에서 정한 듯이 진행되었다.
모노크롬의 대우가 좋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후배인 아이리스도 비슷한 상황이었으니까.
다만 아이리스는 스케줄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기에 다른 일을 신경 안 쓰고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지만, 모노크롬은 활동기와 비활동기가 들쭉날쭉한 상황.
그 탓에 준해는 학업 계획을 세우지 못해 곤란해했었다.
‘……역시 리더 정도는 내가 맡아야 맞아.’
동생들이 의지할 만큼 든든한 리더가 되지 못하더라도.
모노크롬의 활동이 적은 지금, 리더의 역할은 주로 이런 것들이었다. 씨알도 먹히지 않더라도 모노크롬의 의견 개진하기, 거절당하고 우울해지기…….
회사에서 듣는 이야기는 주로 안 좋은 내용이었기에 회사와 멤버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는 중이었다.
제 정신력이 그리 강한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버틸 만했다. 동생들에게 맡기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하아…….”
우형의 누나는 동생의 표정이 이리저리 바뀌는 것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봤다.
저런 성격으로 5년이나 연예인으로 활동했다는 게 신기했다.
“넌 그러고도 계속 가수 하고 싶어?”
“……응.”
데뷔 전엔 ‘포기할까?’와 ‘아니, 그래도.’를 반복하면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던 우형이었다.
그러던 그가 이젠 그만두겠다는 소리는 죽어도 안 한다.
이런 점을 보면 팀 내에서 나름대로 맏형 노릇을 하는 것 같긴 한데.
솔직한 심정으로는, ‘힘들기만 하면 굳이 계속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적응되는 게 아니라 점점 더 벅차 보였으니.
“너만 힘든 거 아니잖아. 그만 징징거리란 소린 아니고.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힘들다면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로 힘들 거 아니야.”
“그렇지…….”
“그런데 다른 애들도 그 회사랑 계속 같이 일할 거래?”
우형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 계약 만료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건…… 얘기해 봐야지.”
아직 대놓고 재계약 이야기를 꺼내는 멤버는 없었다.
만일 한 명이라도 계약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면.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선택을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현실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하지만 이런 불안을 계속 묻어만 놓는다면 마음의 준비도 못 한 채로 마지막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허심탄회하게 대화해볼 시기가 다가왔다.
***
모노크롬 데뷔 5년 차.
요즘 모노크롬의 숙소는 고3 수험생이 있는 가정 같았다.
“하암-. 형 본가 간다더니 언제 들어왔대?”
“쉿. 윤환이 늦게 들어와서 잔다.”
우형이 입술 위에 검지를 갖다 대자 한이가 입을 가렸다.
늦은 새벽, 우형이 본가에서 숙소로 돌아왔을 때 윤환은 늦게까지 녹음하다가 막 퇴근한 참이었다.
윤환은 늦잠을 자게 두고, 우형은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 중이었다.
“피곤할 텐데 밥이라도 잘 챙겨 먹어야지.”
“흠. 형의 요리로 잘 챙겨 먹일 수 있다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우형이 흘깃 노려보자 한이는 다시 입을 가렸다.
“어이쿠. 조용히 있을게요.”
우형이 요리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주방을 가장 잘 활용하는 그였다.
단지, 매운 떡볶이처럼 제가 먹지 않을 음식을 괴팍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어서 멤버들이 요리 실력을 놀린 것이 문제였다.
뒤끝 있는 우형은 복수하듯이 더욱 극단적인 요리로 멤버들의 미각을 놀라게 했다.
그나마 윤환에게는 폭탄이 아닌 건강식을 챙겨 먹였다.
“디톡스 하는 느낌이야.”
“좋은 뜻이지?”
“그럼.”
윤환도 일어나자마자 고3 수험생 같은 기분으로 우형이 챙겨주는 아침을 묵묵히 먹었다.
맛이 어떤지와는 별개로, 무슨 마음으로 챙겨주는지 아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라도 같이 있지 않으면 벽이 생겨버릴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활동 범위가 점점 달라지는 컬러즈와 윤환의 개인팬들처럼.
그래서 이렇게 우형에게 보살핌을 받고, 한이와 노래 이야기를 하고, 해랑이 운동하러 갈 때 같이 나서기도 하고, 준해에게 기타 치는 법을 알려주고. 윤환은 모노크롬 멤버로 있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현실이 따라주지 않을 때가 있다.
오늘은 윤환도 따로 스케줄이 없는 날. 우형이 멤버들을 불러 모았다.
“우리…… 얘기해 봐야 할 게 있어.”
***
뚝.
멍하니 앉아 있던 우형은 이어폰으로 들려오던 음악이 끊기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약 한 시간 정도로 맞춰둔 플레이리스트 재생이 끝난 모양이었다.
우형은 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12월 31일, 오후 11시 30분.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인적 드문 곳에 있는 버스정류장이었다.
“하아…….”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핸드폰 화면 속에는 친구나 친척, 지인들의 새해 인사가 쌓이고 있었다.
그중엔 연예계에서 알게 된 인맥도 있었으나, 직원들이 포함된 모노크롬의 단체방은 조용하기만 했다.
‘새해 인사가 이렇게 힘든 줄은 몰랐네.’
이런 상황에 멤버들과 컬러즈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내년도 잘 부탁한다고 웃으며 인사하기에는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행복한 생일 보내라는 인사가 돌아올 텐데, 거기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1월 1일의 자신은 조금 불행할 것 같았으니까.
‘울고 싶다…….’
처량하게 울면서 새해를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우형은 메신저를 닫고 QBC의 온에어 화면을 틀었다.
화면 속에선 <음악대상>의 최우수상을 받은 한 피아니스트가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가수, 프로듀서, 음악단원……. 카메라에 잡히는 모두가 별세계의 사람 같았다.
모노크롬이 저 사이에 있었다면 이렇게 슬프진 않을 텐데.
화면은 타종 행사 중계 화면으로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해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소원 정도는 빌어도 되겠지.’
어느 신이 듣는지는 몰라도 단지 소원을 비는 것뿐인데. 회사에서처럼 거절당하진 않을 테니까.
어릴 적엔 생일 소원이 잘 이루어진다며 신기해했던 우형이었다. 어느샌가 그 기억도 잊고 있었다.
우형은 스마트폰을 가방 위에 내려두고 기도하듯 양손을 맞잡았다.
‘지금은 힘들어도 나중에 생각해 보면 별거 아닌 일이었다며 웃어넘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멤버들은 모두 뉴마와 재계약하기를 선택했다.
어쩌면 모노크롬으로 있을 마지막 기회. 이게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기회가 되기를 바랐다.
‘우리와 주변 사람들한테 행복한 일들이 있기를.’
그래서 내년엔 웃으면서 새해 인사를 할 수 있기를.
생일을 맞이한 우형의 소원은 누군가에게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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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 요즘 작업실에 많이 있지 않아?
뭘까.. 뭘 준비하고 있는 걸까?^^
└한이는 드라마 들어가고 애들 얘기하는 거 보면 몬클 앨범은 더 하반기 같은데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
└솔..로..?
└콘서트에서나 보던 솔로무대 뮤비도 나오고 음방 돌고 직캠도 뜨고 그런다는 거지 어?
└크어어 김칫국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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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크롬 전용 PC 앞에 앉은 우형이 습관적으로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넘겼다.
앞머리는 눈을 살짝 덮고 뒷머리는 목덜미를 덮을 정도의 기장.
머리카락이 길어지니 일상생활을 하다가도 손이 저절로 머리로 가는 듯했다.
‘요즘 컬러즈가 우형이 머리가 조금이라도 짧아지는 걸 못 봐서…….’
정규 앨범 활동을 마치고 팬미팅을 준비할 시기였던가.
따뜻해지는 날씨에 맞춰서 멤버들이 헤어를 조금 산뜻하게 정리한 적이 있었는데.
[어라 우형이 머리 왜 짧아졌지 혹시 뷰이라이브에서 이유 말한 적 있나요? 아시는 분]
[이쁘긴한데 나 놀랐잖아ㅠㅠㅠ]
[우리 여우 머리카락 못 잃어 지켜]
국방의 의무를 다하러 떠날 준비를 하는 줄 알고 심장이 덜컹하는 컬러즈가 속출했었다.
‘그때 준해는 우형이보다도 더 앞머리가 짧아졌었는데…….’
준해에겐 [우리 요키 움쫙쫙 호로록] 하면서 귀엽다는 주접만 늘어놓던 컬러즈였다.
그들의 눈엔 우형의 헤어 기장만 특히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그래서…… 컬러즈의 예민한 부분을 건들지 않기 위해 우형은 머리를 쭉 기르는 중이었다.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머리끈이라도 줄까?”
머리를 묶고 다니는 윤희가 여분 머리끈을 내밀자 우형은 “됐어.”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우형의 손은 여전히 앞머리를 가만히 두지 못하고 움직였다.
“흐음…….”
나도 단발을 유지하면서 거지존 기장이 얼마나 거슬리는지는 잘 아니까.
뭐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던 내 시야에 꽤 적당해 보이는 아이템이 포착되었다.
“그럼 이건?”
우형은 내가 내민 늑대 귀 머리띠를 보고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도 요즘 모노크롬의 늑대 귀 머리띠는 울 때만 쓰는 게 아니었다. 가성비 늑대 코스프레 할 때도 쓰고, 무인도에서 멤버 사냥할 때도 쓰고.
무슨 일만 있으면 나오는 만능 아이템이니까 앞머리 올릴 때 쓸 수도 있지.
‘……원래 머리띠 본연의 기능이 그거지만.’
그러나 우형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모자 쓰면 돼서, 괜찮아요.”
우형의 말대로 책상 위엔 볼캡이 하나 있었다.
“그러면 됐고. 뭐 좋은 자료라도 찾았어?”
“네. 말씀하셨던 것처럼 레트로 느낌이 좋아서 여러 영화 이미지를 찾아봤는데…….”
컬러즈의 김칫국은 허상이 아니었다. 지금은 우형의 솔로 앨범 기획 단계 중.
보이그룹 멤버는 연차가 차서 개인 활동이 늘어나는 이 시기에 솔로 데뷔를 많이 하는 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군대 가기 전.’
여행 가기 전에 화분에 물을 듬뿍 주듯이, 전역 때까지 팬들이 메마르지 않게 사회에 있는 모습을 많이 남겨둬야 하니까…….
그래서 지금 우형은 PC로 벌점 내역을 관리하는 게 아니라 솔로 앨범에 활용할 레퍼런스를 찾고 있었다.
작년, 재작년 같았으면 자료 찾는 것 정도는 직원들에게 맡기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모노크롬 멤버 전원이 프로듀싱 회사 소속.
우형도 아티스트이자 프로듀서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할 권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본인 앨범이니까 본인 의견이 많이 들어가는 게 만족도가 제일 높겠지.’
그러나 우형 외에도 레퍼런스 조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여우 형! 이거 어때?”
바로 모노크롬 멤버들이었다.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