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0화
저 뒤에 ‘당연히 그런 이유로 기사를 쓰진 않았겠지만 그만큼 황당하단 뜻’이란 말을 덧붙여 난 책임에서 쏙 빠져나갔다.
근거 없이 일을 키운 건 상대방이 먼저였기에 정당방위로 넘어갈 수 있었다.
‘저번처럼 누가 선빵을 치면 사람들도 호응해 줄 텐데, 이번엔 내가 제삼자라서 어렵네.’
명분이 없는 내가 나서봤자 ‘쟤 뭔데 끼어듦?’ 소리만 듣고 끝날 가능성이 크다.
누가 먼저 나서지 않아도 열 내는 사람들은 저격당한 연예인의 팬들뿐.
“아이리스랑 SPID 팬들은 분위기가 어때요?”
윤희는 커뮤니티 전문가답게 현재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기사에 언급된 게 정황상 SPID 리더에 가깝긴 한데 정확하진 않아서 스피디는 먹금 중이고요.”
“무지개는요?”
윤희는 대답 대신 태블릿 화면을 보여줬다.
[무지/개 같다ㅎ]
무지개는 그들의 팬덤명을 활용해 교양 있는 비난을 날리는 중이었다.
‘무지개는 이렇게 욕하는구나…….’
무지개가 아니라 무지 개.
소중한 팬덤명을 부정적으로 변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무지개의 대담한 어휘 활용에 놀라고 있자 윤희는 더 감탄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원래 안티들이 무지개를 조롱할 때 쓰이던 말인데, 언제부터인지 무지개가 쓰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팬덤 조롱할 땐 안 쓰이는 것 같아요.”
누가 ‘너넨 무지개 아니고 무지 개.’라고 했는데 ‘응. 너도 무지 개 같음.’이라고 반박하면 할 말이 없긴 하지.
무지개는 이 비하 단어를 역으로 활용하기 위해 과감하게 빼앗은 듯했다.
‘음…… 껄렁즈가 생각나.’
컬러즈가 껄렁즈의 등장에 화를 내고 몰아냈으면 더 악을 쓰고 버티려고 했을 텐데.
필요할 때 데려다 놓고 소통을 시도하니 ‘어라? 나도 몬클에 조금 관심 있는데 껄렁즈인가?’ 하는 라이트팬들이 들어와 성격이 애매해진 그들.
지금은 라이트팬들이 바로 컬러즈로 편입되는 비율이 높아져서 거의 사어가 되어가는 중이다.
가끔 컬러즈가 술 마시고 나서 ‘나 지금 껄렁즈ㅎ’ 하고 썼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그건 꽐라즈였나.’
보통 알딸딸한 상태로 멤버들을 향해 주접을 날리고 싶을 때 쓰는 단어였다.
사실 그런 점은 맨정신일 때와 크게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윤희는 현재 뉴레인에 있는 전 직장 동료들의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뉴레인도 이번엔 가만히 있지 않을 모양이던데요.”
“반박 기사 낸대요?”
“그건 이야기를 더 해본다는데, 흐지부지 넘어가진 않을 것 같아요.”
전담팀을 구성한 보람이 여기서 나타나다니.
나의 대표 시절 플레이를 닮아 루머 해명에 소극적이던 뉴레인이 이번엔 칼을 갈 모양이다.
나는 조간신문처럼 내가 원하는 정보를 쏙쏙 알려준 윤희에게 감사를 전하고 자리에 와서 앉았다.
‘레드는 이 일로 신경 많이 쓰고 있을 테니…… 대신 아이리스 정보책한테 연락해 볼까?’
정보책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지만, 아이리스 덕후 중에서도 아이리스 정보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어휴.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고! 저 정말 답답했어요…….]
……바로 아이리스 그 자체인 그린이었다.
같은 멤버로서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아서 연락하기가 조심스러웠는데 오히려 반기는 목소리였다.
한탄이라도 하고 싶은데 마땅히 토로할 곳이 없어서 답답하던 차였다고 한다.
[기자 한 분만 그런 게 아니에요! 거긴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저격한다니까요. 전에도 마이하트 선배님들한테 휴일에 매니저 차를 타고 몰래 데이트하러 갔다느니 한 적도 있어요. 그냥 비공개 스케줄이었는데…….]
그녀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그린은 아이리스 멤버로서뿐만 아니라 걸그룹 덕후로서 스타토픽에 매우 강한 유감을 품고 있었다.
[……너무 제가 아는 이야기만 했나요? 죄송해요. 바쁘신데.]
다다다 쏟아낸 후에 빠르게 이성을 찾는 것까지 그린다웠다.
“아냐. 덕분에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파악했어. 지금 레드는 어때?”
[언니는…… 확실히 전이랑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어떻게?”
[예전엔 애써 괜찮은 척해서 제가 다 안쓰러웠거든요. 속병 들까 봐 조마조마하기도 했고. 그런데 이번엔 짜증을 내더라고요!]
그린은 “솔직히 이렇게 화내는 게 나은 것 같아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음성 통화였지만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참는 것보다 화내는 게 정신 건강 면에선 낫지.
“회사에선 어떻게 한대?”
[이번엔 에이펙트랑도 엮여서 같이 얘기해 본다고 했어요.]
지금은 사옥까지 공유하는 사이이니 뉴레인 혼자서 해결하진 않을 것이다.
[레드 언니도 뭔가 하려는 건지 요즘 누구랑 자꾸 연락하던데…….]
“연락?”
[네. 오렌지 언니가 그러는데, 레드 언니가 사람 보는 눈이 좋아서 필요한 사람은 귀신같이 잘 찾는대요. 그래서 저는 이사님이랑 연락하는 줄 알았어요.]
당연히 나는 아니다. 레드에게 신경 쓸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린에게 연락한 거니까.
‘회사 직원을 얘기하는 건 아닐 테고…… 다른 해결책이라도 떠올렸나?’
그린은 “스타토픽 사라졌으면.”이라는 말을 남기고 통화를 종료했다. 쌓인 게 아주 많은 목소리였다.
나는 아이리스의 반응에 이어, SPID의 반응도 해랑에게서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진짜 짜증 나지 않냐?’ 한마디 하고 다른 얘기 하던데요.”
해랑도 스타토픽의 희생양이 된 적 있어서 공감을 구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크게 타격은 없는지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고.
‘팬덤은 가수 따라간다더니.’
스피디가 ‘관심종자에게 먹이 금지’라는 태도를 고수하는 건 SPID가 그러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일에 일일이 열 내면서 성내기에는 신인 시절부터 바빴던 그들이었다.
‘우리도 바빴으면 아마 그냥 지나간 일들도 있었을 거야.’
지오엘의 디스랩 사건이라든지…….
참고로 무지개임을 공공연히 밝힌 지오엘은 이번 일에 관한 SNS 글을 올렸다.
[Breaking news. 고장 난 펜대는 내려둬 Fxxxxxx starter’s pick. 애송이들의 언론]
글에 첨부된 건 부러진 볼펜의 사진. 직접 찍었는지 배경엔 지오엘의 작업 컴퓨터가 있었다.
기사를 보고 화가 나서 펜을 부러트린 걸까, 아니면 SNS에 올리려고 애써 부러트린 걸까.
아무튼 스타토픽을 break 하겠다는 경고는 잘 전해져왔다.
‘재작년 스캔들 때 뒤에서 어땠을지 상상이 가네.’
그땐 무지개인 걸 밝히지 않아서 이렇게 SNS에서 대놓고 광분하는 일은 없었지만.
지금 무지개들은 ‘일단 아군……? 사격 중지……?’ 같은 태도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팬질에 도움은 안 되는데 할 말은 대신해주니까 말릴 필요는 없지.
가장 세게 입을 연 건 지오엘이었지만, 결국 스타토픽의 입을 닫게 만든 건 다른 이였다.
[C씨가 나인가? Choi씨ㅋㅋ]
이 멘트와 함께 기사 내용을 캡처해 SNS 릴스로 올린 것은, 에이펙트 엔터 소속 걸그룹 ‘비하이’의 멤버 최세라.
비하이는 SPID의 1년 후배이자 아이리스의 1년 선배였다.
같은 시기에 활동한 걸그룹이니 아이리스와 친분이 있는 건 이상하지 않은데.
C씨가 자신이라고 주장하며 레드까지 태그한 그녀는.
[사귀는 사이는 아니에요]
라는 멘트를 달아 레드와의 투샷을 올리기까지 했다.
‘……C씨가 SPID 리더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고?’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참전에 여론은 급속도로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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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토픽 이니셜 정리
A사=A펙트
B사=비->rain->뉴레인
C씨=비하이 Choi세라(Cera라는 설도)
D씨=아이리스 reD
└인수에 입김 들어갔다는 건 뭐임?
└인수 전에 세라가 ‘호오~ 좋아요’라고 했다는 듯
└호오~ 미쳤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입김이었냐고
└겨울에 추워서 손에 입김 불면 엔터사 대통합 가능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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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토픽이 비장하게 내놓은 이 기사는 단숨에 ‘호오~’라는 새로운 밈에 밀려 버렸다.
레드와 최세라는 ‘호오 콤비’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얼마 후, 통화로 듣게 된 레드의 목소리는 걱정과 다르게 밝은 목소리였다.
[예전에 이사님이 하신 거 보고 배웠어요.]
“내가 한 거?”
[전에 스타토픽보고 계획적으로 문화계에 손대는 거 아니냐고 하셨던 거요. 자신 있게 말씀하시니까 맞는 소리 같더라고요.]
……그러니까 근거 없이 당당하게 말하는 법을 배웠다는 거야?
‘그런 걸 배워도 괜찮은가?’
어쨌든 좋은 결론이 났으니 좋은 게 좋은 건가?
레드의 이야기를 종합해보자면 이랬다.
스타토픽의 기사 속 C씨는 아마 SPID의 리더가 맞다.
다만 스타토픽은 명예훼손으로 몇 번이나 문제 된 적이 있어서 간접적인 정보만 밝히며 누구인지 ‘특정’이 아니라 ‘추정’만 되게 기사를 썼고.
레드는 그 빈틈을 노렸다고 한다.
[세라 언니가 같은 음악 방송에서 특별 MC를 맡은 적이 있었거든요. 끼워 맞추면 뭐든 안 맞겠어요.]
“그렇지. 기사 자체가 끼워 맞춰서 만든 이야기였는데.”
[그러니까요!]
레드가 부탁하자 최세라도 선뜻 그녀를 도와 SNS에 글을 업로드했다고 한다.
이 SNS 글을 기사로 퍼트리는 건 에이펙트 엔터와 뉴레인의 일이었다.
‘학교 친구가 많이 없어서 사람을 사귀고 싶다고 했었는데.’
시선에서 관심이 드러난 탓에 여러 염문설에 휘말리곤 했지.
그래도 그런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이번에 흔쾌히 나서준 최세라처럼 좋은 인연도 많이 만든 듯했다.
참고로 내가 뉴레인에 처음 갔을 때 레드가 최 비서를 빤히 봤던 건 친해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 같아서’였다고 한다.
예전엔 대표처럼 기계적인 이미지가 있었다나.
‘그린이가 전해준 말이 맞나 봐.’
레드는 사람 보는 눈이 좋다는 말.
곁에 좋은 사람을 많이 두면 앞으로도 무슨 일이든 잘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너도 봤니? 지오엘 그 사람이 SNS에 글 올린 거.”
레드의 사람 좋아하는 성격을 생각하다 보니 갑자기 불안해졌다.
지오엘이 아이리스에 대한 팬심을 대놓고 드러내는데, 친해질 마음이 생기면 어쩌지?
[감사하긴 한데. 그냥 이 정도 거리감이 좋겠죠?]
“내 생각엔 그게 나을 것 같아.”
회개했다고 해도 F워드를 거침없이 쓰는 래퍼와 엮이면 걸그룹 이미지에 좋을 건 없지.
레드의 통찰력은 정확했다. 내 걱정이 필요 없을 정도로.
나는 다 큰 아이가 이제 독립하여 사회로 나가도 된다는 것을 깨달은 부모처럼 안심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