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화
아직 밖이 어렴풋한 새벽인데 왜 여기 나와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TV 보다가 잠도 안 잔 건 아니지?”
“아니. 나도 방금 일어났어.”
“그런데 왜 여기 나와 있어.”
잠을 더 자고 싶으면 침대에서 나오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으면 되는 일이고, 일어나고 싶으면 제대로 일어나서 할 일을 하면 될 텐데.
재민은 거실 소파와 한 몸이 된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진짜 숙소에 수맥 흐르나 봐.”
잠이 덜 깬 머리로 무슨 얘기인지 생각하던 해랑은 얼마 전에 멤버들끼리 꿈 얘기를 했던 것을 떠올렸다.
“너도 꿈꿨어?”
“응.”
“무슨 꿈?”
재민은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무서운 꿈…….”
아직도 꿈 내용이 생생한지 재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 정도로 가라앉은 재민을 보는 것은 재작년 발목 부상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가 걱정된 해랑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재민이 먼저 머리를 털어내곤 고개를 들었다.
“예전엔 일어나도 옆에 다른 형이 있으니까 괜찮았는데 지금은 방에 혼자 있으니까 무섭잖아.”
“공포 영화라도 보고 잤어?”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아니, 보긴 했다.”
귀신 꿈을 꾼 건 아니지만 마침 공포 영화를 본 건 사실이었다.
은연중에 몸에 긴장이 쌓인 채로 자는 바람에 좋지 않은 기억이 꿈으로 나타났던 걸까.
악몽의 과학적인 이유를 찾은 재민은 뒹굴뒹굴하며 해랑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형 방에 매트리스 하나 놔 줘. 나 공포 영화 보면 들어가서 자게.”
기껏 개인실이 생겼는데 룸메이트를 자처하는 재민.
숙소 이사 덕분에 한이의 소음에서 겨우 벗어난 해랑은 단호했다.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 봐.”
“형 방이 제일 자기 좋을 것 같단 말야.”
재민이 탐내는 것도 당연했다. 휴식을 중시하는 해랑은 본인 방을 가장 편안한 공간으로 만들어 놓았으니까.
“아니면 우리 둘 방 사이에 벽이 하나 있으니까 거기에 창문을 뚫으면 어때?”
재민의 아이디어가 점점 이상한 쪽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냥 두면 더 획기적인 발상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해랑은 한발 물러섰다.
“바닥에 러그 깔려 있으니까 그냥 이불 가져와서 자.”
“아! 그럼 내가 접이식 매트리스를 사서 들고 다녀야겠다. 형 집에 가서 없는 날엔 다른 방 가면 되니까.”
“……그러든지.”
해랑은 결국 재민을 ‘원하는 데서 자야 직성이 풀리는 고양이’ 같은 것으로 취급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우형도 이제 막 일어났는지 비척거리며 거실로 나왔다.
“무슨 얘기 해?”
“재민이가 악몽 꿨대서.”
“여기 기운이 안 좋은가……?”
우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재민은 멤버들에게 괜한 걱정거리를 주고 싶지 않고, 지금 숙소도 마음에 들었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나 평소엔 잘 자는데 이번에만 그런 거야. 무서운 영화 보고 잤거든.”
“어쩐지 네 방 앞에서 ‘으으으. 문 열지 마.’ 하는 소리 들리더라.”
“그래서 재민이는 아무 방에서나 자고 싶대.”
“그게 왜 그렇게 돼……?”
범인은 재민의 사고 흐름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세히 들어보면 나름대로 논리가 있으니 그냥 받아들이면 되었다.
재민의 접이식 매트리스 구매 계획은 막 일어난 다른 멤버들에게도 바로 전해졌다.
“너…… 나랑 룸메이트 하기 싫다고 할 땐 언제고. 난 문 안 열어줄 거야.”
한이는 재민이 복귀 후 원래 룸메이트였던 자신을 버리고 우형에게 갔다며 뒤끝 있는 모습을 보였다.
장난스레 대꾸했지만, 재민의 짐이 사라져 절반이 텅 빈 방에서 자야 했던 충격을 아직도 기억하는 한이였다.
“하기 싫은 게 아니라 한번 해 봤으니까 다른 룸메이트도 경험해 보고 싶단 거였지…….”
“그럼 해랑이 형이나 준해 방으로 가겠네.”
“해랑 형이랑은 이미 얘기했어.”
자연스레 두 사람의 시선은 준해에게로 옮겨갔다.
“나, 나는 뭐…… 원래 누가 들어와서 같이 자든 상관없어서.”
준해는 데뷔 초부터 매니저와 같이 방을 쓰기도 했으니 옆에 누가 와 있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음표 악기만 안 들고 오면 돼.”
“응. 그럼 영화 같이 보자.”
“그럴 거면 그냥 거실에 이불 펴놓고 다 같이 TV로 영화 보다 자는 게 낫지 않아?”
“오! 재밌겠다.”
생각나는 대로 아무 얘기나 꺼냈는데 흥미를 돋운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방을 공유하던 예전처럼 다시 개인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질 듯했다.
***
몬클하우스는 집주인 할아버님과 이야기가 잘 되어 뉴마의 임대 계약이 끝나고도 당분간 모노크롬이 더 사용하기로 했다.
‘어쩌다 보니 음악대상 아티스트를 배출한 집이 되어서 집주인 할아버님이 싱글벙글하셨지…….’
부동산 공인중개사들도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은 다 성공해서 나갔다’라는 영업 멘트를 자주 꺼내지 않던가.
그런데 입주자 모노크롬이 새해 첫 대상을 받았으니. 자기 집에 좋은 기운이 흐른다는데 누가 안 좋아하겠어.
하지만 그곳을 영원히 몬클하우스로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이 많이 들었다고는 해도 처음부터 그곳은 임시 숙소였으니까.
‘주변 환경이 많이 노출된 게 제일 걸리기도 하고.’
좀비 서바이벌도 그렇고, 모노크롬이 계속 지낼 곳이 아니란 생각에 과감하게 컨텐츠 촬영을 할 수 있었다.
그 전부터 상승세를 유지하던 모노크롬은 대상을 받고 난 후 더욱 많은 주목을 받는 중이다.
보안 문제를 생각하면 아쉬워도 적당히 정리하는 게 맞다. 멤버들도 그 점은 충분히 양지하고 있었다.
“저희 활동할 때마다 계속 비어 있었는데요, 뭐. 자주 못 가면 관리하기도 힘들 테고.”
한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말대로 모노크롬이 바빠지면 필연적으로 방치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상상 카페> 촬영 땐 숙소보다 몬클하우스가 가까워서 그쪽으로 퇴근한 적도 있었지만, 그때가 특수했던 거니까.
대상을 받고 나서 모노크롬을 찾는 연락이 많아져서 지금은 몬클하우스 방문이 더 뜸해진 참이었다.
“재민이 온실 볼 때마다 오랜만에 왔구나 싶더라니까.”
마당의 잔디는 업체를 불러 관리했지만, 온실은 온전히 재민의 영역이었기에 아무도 건들지 않았다.
그래서 우형은 온실이 얼마나 더 밀림이 되어 있는지를 보며 방문주기를 체감했다고 한다.
“온실도 정리해야 하는데 재민이는 아쉽지 않겠어?”
“네. 겨울에 다 시들었고…….”
날이 따뜻해지니 다시 새싹이 나긴 했으나, 그게 전에 심었던 식물인지 잡초인지 구별이 안 되는 상황.
재민은 미련 없는 얼굴로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대신 이 산세베리아를 제 키랑 비슷해질 때까지 키워보려고요.”
아역 손님들이 방문했을 때 선물로 가져온 산세베리아는 이사실 앞 창가에 뒀다.
재민은 그것을 새로운 육성 대상으로 삼았다.
‘드라마처럼 모의 작당하려면 너무 큰 것보다는 난초 정도 크기여야 멋있는데…….’
재민의 애정 담긴 화분으로 음모를 꾸미는 건 너무한가. 식물을 잘 모르는 나보다는 밀림도 만들어 본 재민이 더 잘 키우겠지.
나는 산세베리아 관리권을 그의 손에 맡기기로 했다.
이렇게 몬클하우스에 큰 미련을 보이지 않는 멤버들이 있는 한편,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멤버들도 있었다.
“그래도 가끔 쉬러 가는 거 좋았는데. 살면서 별장 같은 거 가져볼 기회 얼마 없잖아요.”
“확실히, 기분 전환하는 데엔 좋았지.”
해랑이 준해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휴식을 중시하고 하늘을 자주 올려다본다던 해랑은 그 환경이 특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말인데…….”
가끔은 서울을 벗어난 곳에서 기분 전환하는 게 좋단 말이지. 그건 회사도 바라는 바였다.
“몬클하우스처럼 한 곳에 정착하는 게 아니라, 여행 가듯이 여러 환경을 체험해보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싶어.”
새로운 공간에선 새로운 컨텐츠 소재가 떠오르겠지.
모노크롬에게 어떤 공간이 가장 잘 맞는지를 찾아가다 보면 언젠가 두 번째 몬클하우스가 생길 수도 있고.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무엇보다 컬러즈. 리얼리티 컨텐츠가 주기적으로 올라오다가 안 올라오면 얼마나 슬퍼하겠어.’
갓 데뷔한 신인들도 찍는 리얼리티 예능 하나 못 보고 울던 그들 아니던가. 이제 겨우 몬클하우스로 배불러진 참인데.
물론 대상 아이돌과 함께 리얼리티를 제작하고 싶어 하는 곳도 있겠지만.
방송국이나 다른 제작사가 함께하면 이해관계가 얽혀서 ‘휴식’보다는 ‘예능 촬영’에 집중될 가능성이 컸다. 그들이 원하는 그림을 어느 정도는 뽑아줘야 하니까.
반면에 우리 자체 컨텐츠는 느긋하면 느긋한 대로 편집해 올리는 스타일. 힐링 컨텐츠는 우리끼리 제작하는 게 편했다.
‘자체 컨텐츠라면 주목도를 온전히 모노크롬 채널이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장점이지.’
굳이 다른 홍보가 필요치 않았다. 모노크롬을 보고 싶은 사람들은 모노크롬 채널에 가장 먼저 찾아올 테니까.
“후보를 뽑아 봤는데. 산, 바다, 섬, 교외, 도심. 이렇게 한 번씩 가보면 다양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
“바다!”
여름에 태어난 여름 남자여서 그런지 재민은 바다라는 단어에 눈을 반짝였다.
산이 많은 나라라 산은 가까이서도 찾을 수 있지만, 바다는 보통 마음먹고 가야 하는 곳.
이런 컨텐츠 촬영을 구실 삼아 편하게 바다 휴양 계획을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그럼 바다나 섬으로 먼저 알아볼까? 특히 섬은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해서 날씨랑 계절을 많이 탈 것 같거든. 팬미팅 마치고 가면 딱 좋을 것 같긴 한데.”
춥지도 덥지도 않고 적당히 따뜻한 시기.
멤버들도 따스한 햇볕을 상상하는지 표정이 한결 온화해졌다.
“좋아요. 공연 끝나고 휴식 겸.”
“섬에서 휴양하는 거 되게 유럽 부자 같다.”
한이는 섬보다는 유럽 부자 기분에 더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멤버들은 새 리얼리티 컨텐츠인 ‘몬클바캉스’ 계획을 회사에 맡기고 팬미팅 준비에 전념했다.
모노크롬이 연습실에서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 동안, 나는 이전부터 준비한 이 계획을 구체화하는 데에 집중했다.
‘전혀 의심하는 얼굴이 아니었지.’
메인 댄서 겸 안무가로 바쁜 재민 대신, 나는 산세베리아의 먼지를 닦아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나가던 윤희가 그런 내 모습을 봤는지 수상한 눈길을 보냈다.
“지금 이사님 표정 좀, 드라마에 나오는 흑막 같은데요?”
“네. 바로 그거예요.”
“특히 이럴 때 즐거워 보이시는 것 같아요.”
“제가요?”
업보 청산으로 고통받던 내가 멤버를 속여먹을 때 즐거워 보인다니.
설마 이게 나의 본성인 걸까?
“그런데 재밌는 일은 맞잖아요.”
“그렇긴 해요. 이게 다 즐거운 추억이죠.”
윤희도 어차피 나와 같은 편이었다. 그녀도 내게 물들었는지 흑막 같은 미소를 짓고 자리로 돌아갔다.
이렇게 마음이 잘 맞는 직원들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이후, 무사히 팬미팅을 마친 멤버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섬 휴양을 즐기러 출발했다.
그게 어떤 섬인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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