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1화
<아이돌 대운동회>는 한 번 개편이 있었다.
나중엔 겨울 녹화, 겨울 방영으로 바뀌지만, 모노크롬이 3년 차일 때의 돌대회는 여름 방학 시즌에 방영했다.
몇 년 후, 돌대회의 대항마로 나오는 QBC의 <아이돌부 방학캠프>가 여름 방학을 내세우며 시작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ZBS의 돌대회가 놓친 여름 시즌을 잡으면 배가 더 아플 테니까!
많은 출연자, 그보다 더 많은 관객을 한 체육관 안에 몰아넣기에는 겨울이 나았지만, 여름은 여름만의 장점이 있었다.
에너지와 활력이 넘치는 계절. 더위와 싸우며 수분 보충하는 모습은 화보 그 자체.
이 시기의 돌대회에서는 아이돌의 청량한 사진이 무수히 탄생했다. 물론 팬들이 진행 요원 몰래 찍은 사진들이었다.
여름의 에너지를 받아서인지 팬들도 열과 성을 다해 출연 아이돌을 응원했고, 활기찬 분위기는 아이돌의 사기 고취에도 더할 나위 없었다.
“오, 재민! 너랑 나랑 같은 조다.”
재민이 참여하는 경기는 장애물 달리기. 코스 곳곳에는 허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애물이 설치되었다.
SPID의 윤규가 출발선으로 이동하는 재민에게 총총 뛰어왔다.
반가운 얼굴이었지만 같은 조라면 이번 경기에서만큼은 라이벌. 재민은 단호한 표정을 짓고 그를 맞았다.
“나 진짜 금메달 따야 하거든? 멤버들이랑 약속했어.”
정확히 말하자면 약속을 한 게 아니라, 모노크롬이 무관인 상태로 촬영을 끝낼 수는 없다며 포부 어린 통보를 하고 나온 것이었지만.
육상 경기에서 우수한 성적을 낼 것으로 예상되는 해랑도 있었으나, 그가 참가하는 달리기 경주는 촬영 후반부에 배치되어 있었다.
모노크롬의 날쌘돌이 댄서의 저력을 제일 먼저 보여주는 것이 이번 경기의 목표였다.
“난 약속까진 아니고…… 내기 걸었는데.”
“무슨 내기?”
“금메달 따는 사람한테 멤버들이 문상 만 원권 한 장씩 사 주기로.”
SPID는 7인조이니 금메달 본인을 제외하면 문상 6만 원어치란 뜻이었다.
인기 아이돌치고 소소한 보상이었으나 원래 본업으로 얻는 소득보다 게임으로 얻는 소득이 더 신나는 법이다.
“은메달은 뭐 안 준대?”
“왜. 네가 1등 하고 싶어서? 너 금메달 만들어주면 네가 대신 문상 사줄래? 살살 할까?”
재민이 손가락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지. 봐주는 게 아니라 전력으로 해야지. 네가 간발의 차로 2등으로 들어와. 내가 1등 할 거니까.”
당당한 재민의 발언에 윤규도 씩 웃었다. 언제나 전력을 다한다는 점에서 코드가 잘 맞는 둘이었다.
자신만만한 두 사람은 실제로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1, 2위를 다투며 선두를 유지했다.
그러나 사고는 후반 코스에 들어섰을 때 일어났다.
“어……!”
경기 전, 세트 위치를 조정하다가 밀렸는지 장애물과 바닥재 사이에 틈이 벌어져 있었다.
한 공간에서 다양한 게임을 진행하다 보니 그때그때 즉석에서 세팅하느라 스태프가 세심하게 확인하지 못한 듯했다.
재민의 바로 뒤에 있던 윤규는 재민의 몸이 과도하게 기울어지자 그의 옷을 붙잡았다.
윤규가 붙잡은 덕분에 ‘콰당’ 소리를 내며 구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재민이 바로 일어나지 않자 윤규는 그가 가볍게 넘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두 사람이 멈춘 사이에 뒤에서 달리던 주자들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너…… 발목 괜찮아?”
윤규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이며 재민을 바라봤다.
하지만 재민의 귀에는 윤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처음 느껴지는 것은 발목 통증. 그리고 다음에 바로 든 생각은.
‘촬영 중인데 어떡하지?’
아이돌이 수십 명에 관객이 수백 명. 스태프의 수도 만만치 않았다.
자신 때문에 촬영에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그 걱정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나서 뒤로 가고 싶었으나 절뚝거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니 주변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기를 보고 있던 준해가 달려오는 중이었다.
“형 괜찮아?”
“괜찮으니까 잠깐 부축 좀.”
재민은 최대한 괜찮은 표정을 짓고 깽깽이걸음으로 관계자 구역으로 들어왔다.
몇 스태프가 따라 들어왔고 재민은 녹화를 계속해달라며 준해를 다시 돌려보냈다.
결국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 것 같다고 판단한 재민은 촬영 도중에 퇴장했다.
***
모노크롬이 4인으로 임시 활동을 이어나가는 동안.
뉴마에는 오디션 프로그램 출연자였던 채윤환이 연습생으로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방송국에서 책임지고 데뷔로 직행시켜주는 순위권에는 들지 못했지만 꽤나 상위권에 머물렀던 그였다.
실력 있고 인지도까지 쌓은 연습생은 정말이지 희귀했다.
덕분에 윤환은 들어오기 전부터 직원들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솔로로 데뷔시키려나? 다음 보이그룹 만들 때까지 기다리긴 좀 그렇고.”
“그사이에 나가면 어떡해. 나라면 바로 데뷔시켜서 잡아놓는다.”
뉴마의 연습생 계약은 여전히 다른 회사에 비해 자유로웠다. 윤환도 그 점 때문에 이 회사에 들어오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실력은 있으나 실전 무대 경험 부족이 느껴진다고 지적받았던 윤환이었다.
학원에서 배우는 것보다는 실제 연예 기획사에 들어가는 게 단점을 더 잘 커버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듯했다.
그러나 언제 다른 기획사의 러브콜을 받고 나갈지 모르는 상황.
회사 윗선의 생각을 전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다며 대화를 나누던 직원들은 복도를 걷는 재민을 발견했다.
“솔로 가수가 서포트하기 쉽긴 하겠다.”
“그렇지. 팀은 한 명만 문제 생겨도 타격이 꽤…….”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재민의 귀에 이 이야기가 들어갔는지, 그는 잠시 멈칫하고는 다시 가던 길을 갔다.
재민이 연습실 문을 열자 모노크롬 멤버들이 그를 반겼다.
“재민! 네 생일 때 뭐 할지 얘기하고 있었어.”
“아, 형! 서프라이즈 하자니까 그걸 말하냐.”
“한이 때문에 서프라이즈는 글렀고, 생일상 직접 차려주는 게 어때.”
“재민이는 형 요리 별로 안 좋아하던데.”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멤버들에게 전염됐는지 재민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재민은 고개를 작게 절레절레 저었다.
“다음 날에 새벽 스케줄 있잖아.”
일해야 하는 멤버들이 쉬는 자신을 위해 휴식 시간을 빼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이는 재민이 혼자 빠져나가는 건 용서 못 한다는 듯이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에이. 스케줄 있다고 생일 안 챙기냐? 나중에 내 생일도 안 챙겨주려고!”
“아야! 나 올해 형 생일에도 제일 먼저 초콜릿 줬는데!”
“그게 생일 선물이야? 밸런타인데이 선물이지.”
한이의 팔에서 빠져나온 재민은 부스스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하며 말했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미역국 끓여준 지도 오래됐다고 집에 꼭 오랬어. 데뷔하고 나서 생일 때 전화만 잠깐 했잖아.”
“으음…… 부모님이 그러시면 어쩔 수 없고.”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니 멤버들도 바로 수긍했다.
생일날 일 때문에 부모님을 만나지 못하던 것은 멤버들도 마찬가지였기에 그 마음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럼 우리는 그 전날에 밥 먹자.”
“나 집에 가서 미역국 먹을 거니까 여우 형 미역국은 말고.”
“역시 사 먹는 게 최고지.”
요리를 거부당한 우형은 재민에게 시선으로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맞이한 7월 10일.
[재미나ㅠㅠㅠㅠ보고싶다 괜찮다곤 했지만 더더 건강해라 몬클이들 무병장수해]
[재민아 여름이 더운 이유가 뭔줄 아니 태양이 네 생일을 축하해주려고 다가온다는 거야.. 사이언스지에 실려서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 놀랐다더라 미라클]
[재민이가 특히 더 보고 싶은 날.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자! #빛나는_재민이의_여름 #재민아_생일축하해]
많은 이의 축하와 걱정을 함께 받은 재민의 생일엔 비가 내렸다.
***
푹푹 찌는 8월.
불쾌지수가 높은 계절이어서인지 재민은 성가셔하는 직원들의 얼굴을 더 많이 보게 되었다.
고맙게도 송준오 피디는 아이리스의 앨범 기획에 동원되는 와중에도 꾸준히 모노크롬의 의견을 대변해줬다.
그러나 프로듀스팀의 팀장인 그도 대표를 만나기가 영 쉽지 않은 듯했다.
“아니, 회사에 꼬박꼬박 나온다는 사람이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어려워? 비서님이 사실 대표였다고 해도 믿겠어. 사실 출근 안 하는 거 아냐?”
“피디님 바쁘잖아요. 제가 다시 한번 찾아가 볼게요.”
송준오 피디는 회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본인의 할 일을 하러 떠났다.
재민은 자신이 찾아가 보겠다고 했지만, 슬슬 자신감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회사는 재민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하고.
‘어쩌면 대표님 마음은 정해져 있을지도.’
다시 예전처럼 활동하고 싶은 마음과 별개로,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복귀는 신중히 해야 하는 게 맞다.
한번 다쳤던 재민이 다시 팀으로 활동하려면 고려할 사항이 많았다.
그래서 회사는 활동할 때 정말 문제가 생기지 않을지를 자꾸 물었고, 같은 질문을 계속 듣다 보니 이제는 재민 본인도 괜찮은지 확신을 하지 못했다.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될 만큼 나은 발목도 괜히 아파 오는 것 같았다.
멀쩡히 길을 걷다가 넘어질 것 같기도 했다.
어쩐지 점점 환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별 진척이 없이 다가온 9월.
여름의 열기가 물러나기 시작하고, 재민의 머릿속도 조금은 차가워졌다.
‘손이 덜 가는 팀이 되면……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을까.’
모노크롬이 작년보다 지원을 받지 못한 것도 어쩌면 본인이 다쳐서일지도 몰랐다.
발목을 다친 건 자신인데 모노크롬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도 자신이었다.
“채윤환 댄스 레슨도 잘 따라가고 진짜 아이돌 특화 인재인데. 회사는 아직도 이렇다 할 계획 없대?”
“지금 아이돌 두 팀만으로도 바쁘잖아. 아이리스는 막 데뷔했고 모노크롬은…… 앨범을 내더라도 명재민 복귀하면 파트랑 대형 다시 짤 거 고려하느라 손이 배로 많이 가는데.”
“어휴. 차라리…….”
안 될 그룹은 제쳐두고 품이 덜 드는 솔로 가수를 키우는 게 낫겠다.
우연히 직원들의 그런 대화를 들은 재민은 그게 맞는 소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모노크롬이 뒷전이 되는 건 싫어.’
그렇다면 아마도 정답은 하나였다.
모노크롬의 네 멤버가 지방 행사로 자리를 비운 날. 본가에 있겠다던 재민은 멤버들 몰래 숙소로 돌아왔다.
시간을 두고 계획한 일이라 그의 행동엔 망설임이 없었다.
캐리어를 끌고 현관문을 나서기 전, 재민은 다시 한번 뒤돌았다.
‘아마 마지막일 테니까…….’
몇 년이나 신세 진 이 친숙한 공간과도 작별 인사는 해야 하지 않을까.
재민은 어두운 거실에 대고 입을 열었다.
“괜찮아.”
보는 이는 아무도 없지만 재민은 애써 미소 지었다.
“괜찮아. 나는.”
***
숙소가 바뀌었지만 일어나자마자 눈을 거의 감은 채로 물 마시러 나오는 해랑의 습관은 여전했다.
초반엔 경로가 바뀐 탓에 벽이나 문에 몸을 쿵 부딪치기도 하던 그였으나, 이제는 제법 능숙하게 냉장고까지 이어지는 길을 찾을 줄 알았다.
밤새 건조해진 목을 축이고, 컵은 다시 쓸 테니 싱크대 옆에 내려놓고.
익숙한 동작으로 아침 루틴을 마치고 뒤돈 해랑은 인기척을 느끼고 멈칫했다.
“……깜, 짝이야.”
언제부터인지 재민이 거실 소파에 누워서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