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웬 우엉에 시금치?”
“모르겠어요. 시금치는 아니고 쑥이었나? 뭔가 초록색이었던 것 같은데.”
모노크롬 멤버로 뽑힌 우엉과 시금치라니.
‘김밥 멤버가 아니고?’
모노크롬의 구호인 ‘블랙 앤 화이트’가 김과 밥을 표현할 뻔했잖아.
얼마나 멋진 채소들이었길래 준해를 밀어내고 데뷔조가 된 거야? 시금치면 금방 시들시들해지는 거 아니야?
내 머리는 갑작스러운 이야기 전개를 따라가지 못하고 의문만 떠올렸다.
“아, 옆에 당근도 있었는데요. 시금치는 당근을 싫어했는데 작은 토끼가 나타나서 당근을 먹어버렸어요.”
“…….”
더 완벽한 야채김밥이 될 수도 있었다니.
배경만 그때였을 뿐이지, 그냥 비현실적인 꿈이었다.
가끔 멤버들 입에서 자연스레 연습생 시절 이야기가 나오길래 이번에도 그런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그래도 귀여운 꿈인걸.’
컬러즈가 들으면 좋아하겠어. 어쨌든 현실의 준해는 우엉과 시금치를 이기고 데뷔해냈으니까.
“오늘 손님들 오는 게 꿈으로 나타난 거 아닐까? 연관 있잖아, 토끼. 나머지 김밥 재료는 뭔지 모르겠지만.”
“아! 토끼, 당근!”
준해도 내 말을 듣고 생각나는 게 있는지 머리 위에 손바닥을 붙여 토끼 귀를 만들어냈다.
그렇다. 오늘은 이 스튜디오 어스에 손님들이 찾아올 예정이었다.
그것도 아주 귀여운 아기 토끼 같은 손님들이.
***
준해가 부스럭부스럭 소포장 된 젤리를 챙기자 당분 레이더를 지닌 한이가 다가왔다.
“뭔데 혼자 숨겨놓고 먹어? 나도 줘.”
“안 돼. 귀여운 젤리는 귀여운 사람만 먹을 수 있어.”
“그러니까 한이도 달라구요.”
한이는 컬러즈가 보지 않아도 애교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주로 그의 애교에 질색하는 사람 앞에서 한다는 게 문제지만…….
정말로 젤리가 먹고 싶다기보다는 준해의 반응이 보고 싶어서 자꾸만 채근하는 듯했다.
준해가 얼굴을 찌푸렸으나 한이는 개의치 않고 내민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내가 초대한 손님이니까 내가 보관하고 있다가 줄게.”
세뱃돈을 대신 잘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주겠다는 부모님 같은 대사. 하지만 똑똑이 준해는 속지 않았다.
“왜 형이 초대한 손님이야? 나 보러 온댔으니까 내 손님이지.”
“나랑 먼저 알게 된 사이니까 내 손님이야.”
두 사람이 “아닌데.”, “맞는데.” 하며 서로의 말을 듣지도 않고 부정하기 시작할 때쯤, 나도 슬쩍 끼어들었다.
“내 손님인데?”
“…….”
내가 연락하면서 일정 조정했는걸.
내 참전으로 둘의 생산성 없이 오가던 대화가 바로 종결되었다.
“두목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할 말이 없네요.”
“……그런데 오늘 초대하는 거 형보다 내가 더 빨리 알았을걸.”
“아닌데?”
“맞는데.”
……종결된 줄 알았는데 더 생산성 없는 대화로 진화해 버렸다.
어쨌든 손님 맞을 준비는 되고 있었기에 나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둘을 놔두고 자리를 옮겼다.
오늘 손님 초대의 목적은 ‘스튜디오 어스 사내 투어’.
‘회사도 홍보가 필요해.’
물론 회사가 제대로 세워지기 전부터 모노크롬의 새 소속사는 사람들의 관심거리였지만.
사명보다 모노크롬의 소속사라고 불릴 때가 더 많으니까, 프로듀싱 회사인 ‘스튜디오 어스’를 더 알릴 필요가 있었다.
약속 시각에 맞춰 연락을 받고 나가니 오늘의 손님들이 도착한 참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그치?”
“네!”
요즘은 우리의 아기 토끼, 아니, 시연의 성장을 보며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곤 했다. 마치 명절마다 조카를 보는 기분.
오늘 손님은 시연뿐만이 아니었다. 몬클하우스에 놀러 왔던 아역 4인방이 그 멤버 그대로 우리 회사에 찾아왔다.
시연, 나윤, 주원, 수민. 이른바 미래의 에메랄드 엔터 창립 멤버들.
새로운 회사를 소개해주기에는 안성맞춤인 엔터계 새싹들이었다.
‘아이들한테 설명해주는 시점으로 영상을 제작해서 올리면 다른 사람들도 이해하기 쉬울 테니까.’
컬러즈는 멤버들의 뷰이라이브로 회사 구조를 대충 알고 있겠지만.
정보를 조각조각 모아 전체 구조를 예상하는 것보다는 시원하게 공개된 영상으로 보는 게 훨씬 편할 것이다.
“그럼…… 이사실부터 구경할래?”
“좋아요!”
결국 내 직함은 이사가 되었다.
아무래도 내가 이사로서 명함을 뿌리고 다녔으니. 직급은 실장이지만 직함 정도는 유지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과거의 시연이는 내가 이사를 넘어 사장으로 진화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원래는 오늘도 이사실이 아니라 사장실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스튜디오 어스의 사장이 된 송준오 피디는 오늘 작곡 관련 미팅으로 자리를 비웠다.
회사 운영은 믿을 만한 직원들에게 맡기고 음악에 조금 더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이사실에 흥미를 보일까 했는데, 에메랄드 엔터가 세워지면 개인실 하나쯤은 받게 될 어린이들은 눈을 반짝였다.
“아, 그리고 이거!”
회사 투어를 시작하려는데 남자 아역 중 한 명인 수민이 투명 봉투에 든 귀여운 화분을 내게 내밀었다.
“산세베리아인데 공기 정화 능력이 있대요.”
창업 화분 선물까지 챙겨오다니.
나는 특수 능력까지 부가된 화분을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지금은 손바닥만 하지만 크면 임원실에 하나쯤 있는 난처럼 되는 거 아니야?’
창가에 두고 잎을 정성스레 닦으며 비리나 음모를 꾸미는 그거.
“고마워. 잘 키울게.”
잘 키워서 나도 음모를…… 아니, 신선한 공기를 맛봐야지.
컬러즈가 주로 볼 회사 소개 영상에 내 목소리가 메인으로 나오면 안 되니까, 회사를 소개할 메인 가이드는 따로 뒀다.
“아, 아-. 스튜디오 어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입구로 들어서자 한이가 놀이공원 가이드처럼 강의용 마이크 같은 것을 차고 대기하고 있었다.
“손님 입장하셨습니다. 1번 코너 대기, 1번 대기.”
한이는 마치 다른 이에게 지령을 전달하듯 마이크에 대고 속삭였다. 무전기 기능은 없을 텐데.
그래도 이런 퍼포먼스가 효과가 있었는지 아역 손님들은 테마파크에 입장한 것처럼 좋아했다.
“그러면 스튜디오 어스 투어 시작해 볼까요?”
“네-!”
배우로 몇 년이나 활동한 프로들이지만 어린이는 어린이.
처음 오는 공간이다 보니 집중이 이곳저곳으로 분산될 수도 있었는데 한이는 투어 기분을 내며 손님들을 순조롭게 유도했다.
오늘의 초대 손님을 위해 멤버들은 NPC처럼 각자 위치를 배정받았다.
이사실부터 소개해준다고 했지만, 이사실은 그냥 임원 의자에서 인증샷 찍기 체험 정도가 끝이고.
‘이사실 앞에 있는 사무실이 더 메인이지.’
아티스트실의 사무 공간에는 조금 밝은 헤어의 누군가가 앉아 열심히 키보드를 치고 있었다.
아역들을 이끌고 도착한 한이가 그에게 다가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여기 직원이세요?”
“아, 네.”
순식간에 생활 정보 프로그램 같아진 분위기.
이사실 문 바로 앞의 책상에 앉아 있던 것은 우형이었다.
컨셉……이기도 하지만 그는 정말로 사무실에 자리가 하나 생겼다.
‘우형이 자리라기보다는 모노크롬의 자리지만.’
아무래도 상사가 왔다 갔다 하는 자리는 부하 직원에겐 불편하기 마련. 옆에서 자꾸 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면 정신 사납기도 하고.
‘비서가 있었으면 아마 여기 앉았겠지만 지금은 비서가 없으니까…….’
윤희나 민형을 비롯한 직원들은 본인이 편한 자리에 앉도록 했고, 애매하게 비어있던 이 자리도 활용하고자 PC를 한 대 놓았다.
모노크롬도 전용 태블릿이나 노트북이 있지만 가끔 출력이나 스캔 등 전문 작업이 필요하면 이 PC를 사용하는 중이다.
물론 그런 사무적인 용도로만 쓰이는 건 아니었다.
‘재민이는 여기서 주로 지뢰 찾기를 하는 것 같고…….’
이사실 바로 앞이라 그 모습을 발견했었지.
쉬는 시간엔 뭘 하든 자유인데 재민이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랐던 게 기억났다.
[왜 컴퓨터 시간에 몰래 게임 하다가 걸린 학생처럼 놀라?]
[지뢰 찾기는 잔인하지 않아요?]
[그게 왜? 그냥 퍼즐게임인데.]
[펑 터지잖아요.]
상상력이 풍부해서 그런가.
내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보자 재민의 얼굴에도 똑같이 의문이 담겼다.
[핸드폰 게임 아니면 잔인한 게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게임 안 좋아하시길래.]
[내가…… 그랬나?]
내가 악동 컨셉을 멀리하던 걸 멤버 모두가 알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알게 모르게 티를 많이 내고 살았나.
[결국 지뢰를 안 터트리는 게 목적이니까…… 네가 잘하면 되지 않을까?]
[열심히 해 볼게요.]
재민은 더욱 열중하는 모습으로 지뢰가 있는 장소에 깃발을 꽂기 시작했다.
‘아니, 깃발을 꽂는다니. 그야말로 플래그 꽂는 거잖아.’
나는 혼자 불안한 상상을 했다가 고개를 털어냈다.
마이 엔터도 망한 지 오래고, 게임에서 벗어났으니 더 의식하지 말아야지. 물론 무서워서 앞으로 게임은 못 할 것 같지만.
아무튼…… 그런 용도의 PC 앞에 지금은 우형이 앉아 있었다.
“지금 뭐 하고 계시죠?”
한이는 스태프가 들고 있던 카메라를 가져와 모니터를 비췄다.
대충 일하는 척해달라고 요청하긴 했는데 생각보다 더 열심이라 뭘 하고 있나 했더니.
“부하들의 근태를 관리하고 있어요.”
“나 부하냐고.”
우형은 문서에 멤버들의 벌점을 열심히 입력 중이었다.
크게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 아직도 꿋꿋하게 벌점제를 유지하는 그였다.
“근태가 누군데요?”
-라는 어린이의 순수한 질문이 날아오자 바로 문서창을 내려 버렸지만.
대상 아이돌 그룹 리더답지 않은 쪼잔한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프로그램 창이 내려가자 나타난 배경화면은 어째서인지 해랑의 화보 사진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저거 멤버 중 한 명이 해놓은 거 아냐?’
멤버들만 쓰는 컴퓨터인데. 한이라면 몰라도 설마 해랑이 본인 사진을 설정해놨을 리는 없을 테고.
장난인가 싶어서 넘어갔는데, 다음으로 향한 작업실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곳의 담당 NPC는 해랑이었다. 우형 다음으로 작업실에 오래 있는 멤버니까.
그런데 잘 보니까 작업실 컴퓨터 배경화면도 해랑의 사진이었다.
“저건 누가 해놓은 거야?”
본인의 할 일을 마치고 아역들을 따라온 우형에게 물으니 그가 설명했다.
“해랑이 사진을 두면 효율이 높아지고 잘 풀린다는 소문이 있어서 한번 싹 바꿔봤어요. 저희 음악대상 때도 해랑이 포카에 기도했거든요.”
2대 토템으로서 잘 활동하고 있나 보군.
나에게도 기도하던 멤버들이니 이해가 가는 이유였다.
“컬러즈 말로는 안구건조증이 낫고 음이온이 나오고 공기도 정화되고…….”
해랑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거 아닌가. 산세베리아랑 같은 능력까지 붙었는데.
해랑이 정화한 깨끗한 공기를 마셔서인지 아역들은 이 작은 공간 안에서도 활기 넘치게 뽈뽈 잘 돌아다녔다.
나는 작업실을 멤버들이 틀어박혀 있는 공간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에겐 신기한 공간인 듯했다.
“오빠는 여기부터 여기까지 닿아요?”
“응.”
손이 큰 해랑이 키보드 건반 위에 손을 쫙 펴자 시연이 신기한 듯 자신의 손도 펼쳤다.
만날 때마다 쑥쑥 크는 시연도 해랑 옆에 있으니 여전히 아기였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나윤이 해랑에게 관심을 보이며 다가갔다.
“여기서 노래 만들어요? 무슨 노래?”
“어, 으음……. 힙합 쪽인데.”
다크 섹시를 설명할 수 없었던 해랑이 말을 얼버무렸으나, 나윤은 해랑이 무슨 말을 하든 까르르 웃었다.
마치 시연이 최애 준해를 바라볼 때의 시선과 비슷했다.
‘맞아. 그게 있었지. 사랑의 파르페 사건.’
작업실 구경을 마치고 장소를 옮길 때도 나윤은 해랑의 소매를 붙잡고 걸었다.
‘해랑의 매력은 아이와 동물에게 통하지 않는다’라는 설이 왜 나윤에겐 적용되지 않는 걸까?
뒤늦게 궁금증이 다시 떠올라 나는 나윤에게 슬쩍 물었다.
“나윤이는 해랑 오빠랑 있는 거 좋아?”
“네!”
“왜?”
“귀여워서요.”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