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0화
‘역시 예전 상사가 퇴사 후에 연락하는 건 좀 그런가……?’
자주 사담을 나누면서 친해진 것도 아니고. 남남이 된 지금은 내 연락이 부담스러울지도 모른다.
게다가 송 피디가 뉴마를 나가며 이직 이야기를 슬쩍 꺼내 봤는데 최 비서는 거절했다고 들었다.
‘이제 나도 스튜디오 어스 직원이니까 그것 때문에 연락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
그리고 뉴마에 불만이 많던 아티스트팀과 다르게 최 비서는 뉴마에 유감을 느낄 이유가 별로 없었다.
대표를 만나 혼란스러워하긴 했다지만 스스로 뉴마에 남았던 사람이니.
‘뉴마가 최 비서에게 안정을 주는 직장이라면 어쩔 수 없지.’
그래서 뉴마를 등지고 나간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기가 불편하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고.
환경이 달라졌으니 멀어지는 사람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가 싶어서 씁쓸해지려던 찰나에.
다시 연락을 준다는 게 빈말이 아니었는지 최 비서는 다시 내게 메시지를 보내 왔다.
그와 잡은 약속 시각은 회사원들이라면 직장에 있을 평일 낮이었다.
“이사님.”
아. 이쪽은 아직 이사님이라고 부르는구나.
그렇다면 나도 일단 이전처럼 그를 대하면 되겠지.
부캐로 만났던 사람을 본캐로 만나는 듯한 어색함은 지울 수 없었지만.
“이 시간에 만나자고 할 줄은 몰랐는데. 회사는……?”
“퇴사했습니다.”
“가, 갑자기?”
어쩐지 사복 차림이더라니!
뉴마 직원이 아닌 최 비서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그의 갑작스러운 퇴사 선언에 당황하고 말았다.
지금 이 세계는 게임의 굴레를 벗어났지만 튜토리얼 캐릭터일 정도로 게임과 깊이 연관되어 있던 사람이잖아.
게임 시스템이 사라져서 최 비서도 이제야 퇴사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걸까?
‘으음, 아니야. 의외로 게임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던 사람이니까…….’
원래 퇴사 생각이 있었다면 지금이 나오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긴 하지.
“그래서 연락이 좀 늦어졌습니다. 하던 일도 정리하고 인수인계도 하느라요.”
“바, 바빴겠네. 그래도 꼭 퇴사하고 만날 필요는 없지 않아?”
혹시 스튜디오 어스에 입사하려고……?
‘만나기 전까지는 부담스러울까 봐 걱정했으면서 금방 이런 욕심이 생긴다니까.’
하지만 마지막까지 이렇게 퇴사자의 모범을 보여줄 정도로 일을 잘하는 사람인데. 같이 일하면서 정말 편하기도 했고.
나는 튀어나오려는 인재 수집 욕구를 조용히 억눌렀다.
대표에 이어서 나까지 보좌해 온 최 비서만큼은 자유로울 권리가 있었다.
그리고 최 비서도 역시나 우리 회사로 이직하겠다고 뉴마를 나온 건 아니었다.
“조금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아서 전환점으로 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부하직원이 아니라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뵈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서요.”
물론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일 때도 사람 대 사람이긴 했지만.
‘그런 이유로 완전히 백수, 아니, 자유인이 될 때까지 약속을 미뤄왔던 거야?’
그가 나를 멀리할 생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안심되었다.
신세 진 사람에게 ‘부려먹는 상사’로만 기억되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럼 최 비서는…… 아니, 이제 최 비서가 아니지.”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이직처가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가 퇴사한 이상 이제 ‘비서님’이라고 부르기도 어렵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최단우 씨’ 정도인데. 갑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은 배명희와 라솔에게 ‘주인 씨’라고 불리는 것만큼이나 어색한 일이었다.
“그대로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호칭이 바뀌어야 한다면…… 다음에 언젠가 만나 뵙게 되면 그때 생각해 보죠.”
“언젠가……?”
왜 이렇게 다들 어디론가 떠날 것처럼 얘기하지.
마치 살다 보면 언젠가 만날 수 있으리라는 듯한 말투였다.
‘우형이처럼 군대……에 간다는 건 아닐 테고.’
최 비서의 나이를 생각하고 있는데 내 생각을 알아챘는지 아직은 최 비서인 그가 웃었다.
“여행을 좀 다녀 볼 생각입니다. 그간 여행 가 볼 생각을 안 해봐서.”
전에 연차 안 써도 된다고 하더니…… 역시 휴가를 꿈꾸고 있었잖아!
그냥 ‘부려먹는 상사’가 아니라 ‘여행 갈 여유도 안 주고 부려먹는 상사’로 기억되는 거 아니야?
업보가 발굴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제 끝난 줄 알았는데 또 이런 양심의 가책 어택이 남아 있었다니.
나에게는 그의 자유로운 여행을 응원할 의무가 있었기에 나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 여행 좋지. 이참에 여행 다니며 푹 쉬는 거 좋은 생각인 것 같아.”
“네. 그리고 돌아오면…….”
“돌아오면?”
설마 스튜디오 어스에 입사를?
자꾸 생각이 이쪽으로 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잠시 눈을 반짝였으나 그가 꺼낸 말은 뜻밖의 내용이었다.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까?”
“으응?”
“어떻게 지내실지 궁금해서요.”
내가 싫다고 하면 연을 끊을 생각이었던 거야?
퇴사한 회사에서 생긴 인연이라 연락이 부담되지 않을지 고민하던 건 나나 그나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당연히 되지.”
나는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다음에 만날 땐 정말로 그가 말한 대로 훨씬 동등한 관계로 만날 수 있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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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회사 이름 영어 붙여서 말하면 스튜디어스네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뜻이래 얘들아 공부하자
└아 엄마 게임 5분만 더
└공부하면 입사할 수 있는 거야?ㅇㅋㅇㅋ
└팬덤 학력도 챙겨주는 소속사가 있다?
└어? 스튜디어스? 스튜어디스? 다음 앨범 승무원 컨셉?
└정말 듣고싶은대로 듣는구나. 하지만 승무원 컨셉은 찬성이요.
└학구적이란 뜻이네? 이거 완전 매드 사이언티스트 아니냐?
└아니면 학생 컨셉? 하이틴물 찍어줘
└뭐? 대학원생 컨셉?
└대학원생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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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크롬이 스튜디오 어스로 소속을 옮기고 처음 내는 음반은 정규 앨범이 될 예정이었다.
6년 차에 발매한 에 이은 두 번째 정규 앨범.
모노크롬이 새롭게 시작하는 이 타이밍에 정규 앨범을 내는 것이 가장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갑자기 탈뉴마 하느라 못 냈던 미니 앨범에서도 우형이가 작곡한 곡은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야.’
미니 앨범의 타이틀로 발매하려고 했던 곡은 약간의 편곡을 가하여 이번 앨범에 수록하기로 했다.
당시 모노크롬은 길었던 뉴마 생활을 청산하기 직전이었고, 그 영향으로 타이틀곡도 ‘시즌 종료’ 느낌이 조금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엔딩곡 재질’.
보통 엔딩곡 재질의 노래는 수록곡인 경우가 많지만 우형은 이걸 타이틀곡으로 잘 살려냈다.
미니 앨범 발매가 무산된 게 정말 아쉬웠는데, 이번 앨범에 넣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타이틀곡 다음의 3번 트랙으로 낙점되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니까.’
어떤 이야기의 끝은 새로운 이야기의 프롤로그가 되기도 하지.
모노크롬의 새로운 이야기가 될 이번 정규 앨범의 제목은 .
첫 팬미팅 타이틀 , 그리고 스페셜 앨범과 콘서트의 타이틀인 의 계보를 이었다.
‘리얼’이 붙은 팬미팅은 모두에게 익숙한 회사원 컨셉. 그리고 ‘픽션’이 붙은 콘서트는 우주를 배경으로 세계관이 펼쳐진다.
그리고 ‘테일’이 붙은 이번 앨범은…….
“타이틀곡은 . ‘메르헨’을 제목에 그대로 넣는 게 직관적이면서도 분위기가 가장 잘 드러날 것 같아요.”
우형의 말대로 ‘동화’, ‘메르헨’을 메인 주제로 잡았다.
지금은 멤버들과 직원들이 모여 이번 정규 앨범의 전체적인 구성을 짜는 중이었다.
수록곡마다 에피소드를 하나씩 품고 있고, 이 이야기들이 모여 앨범 전체가 하나의 동화를 이루는 구성.
곡이 완성되기 전부터 어떤 이야기를 넣어야 할지, 무슨 제목의 곡이 들어가면 좋을지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이 회의 결과를 토대로 곡을 의뢰하고 세세한 설정을 쌓아갈 생각이었다.
“자신만의 달을 찾은 늑대…… 이건 해랑이 형 테마예요?”
“응. 준해 네가 해랑이를 보고 <이리> 컨셉을 만들었으니까, 그 연장선으로.”
준해가 설정 자료를 보다가 눈에 띄는 게 있는지 질문했다.
앨범에는 이렇게 멤버들을 테마로 삼은 곡들이 하나씩 들어갈 예정이었다.
모노크롬이 흑백 필름 속 세계에 들어가 모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번 의 전체적인 스토리.
바깥세상에서 스며든 빛이 필름에 잔상을 만들고, 필름 세계 속의 인물들은 이를 보며 바깥세상을 상상한다.
마치 거울 속 평행세계처럼 닮았지만 다른 세계가 배경이었다.
‘모노크롬 세계관에서 거울도 중요한 요소로 자주 등장했으니까.’
그리고 필름 세계 속에서 멤버들은 자신과 닮은 인물들을 만난다.
흑백 필름 속 세계이기에 색을 모르는 화가, 달을 찾는 늑대,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나르키소스, 백성을 잃고 체스판 위에 홀로 남은 킹, 빛이 없는 우주를 상상하는 꼬마 기관사…….
전부 모노크롬의 이전 앨범 컨셉을 활용한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동화는 동심 가득한 이야기잖아요.”
“그렇지.”
‘달을 찾은 늑대’ 이야기를 듣고 뭔가를 계속 생각하던 한이가 손을 들며 질문했다.
“저 형이 센터로 서면 동심이 아닌데요?”
“그게 무슨 소리야.”
한이의 지목을 받은 해랑이 황당하단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해랑과 달이 엮이면 <달의 뒷면>부터 생각나긴 하지…….
하지만 어둠의 컬러즈가 적지 않으니 컬러즈의 동심 말고 흑심도 채워줘야 하지 않을까.
‘같은 제목의 팬미팅은 어차피 또 8세 이상 관람가가 될 테니까…….’
이번 앨범 제목은 팬미팅 타이틀도 염두에 두고 지은 이름이었다.
“팬미팅에서 늑대 귀 머리띠를 쓰면 컬러즈는 귀여워할 테니까 대충 동심도 만족시킬 수 있어.”
“그, 그런…….”
늑대 귀 머리띠 벌칙을 가장 많이 경험했던 우형이 내 막무가내 해결책을 듣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멤버별로 정해진 캐릭터가 있어서 팬미팅 의상이나 코너를 짜기도 수월할 듯했다.
“그럼 저는요? 킹은요? 킹은 너무 불쌍한데요.”
이번엔 체스판의 킹 역할인 재민이 손을 들었다.
하긴 망국의 왕은 너무 꿈도 희망도 없지……. 동화가 꼭 밝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희망찬 게 좋잖아?
“음…… 백성 대신 미니크롬으로 재민 군단을 만들자.”
미니크롬 인형을 장난감 기차나 작은 카트에 태워서 등장시키면 컬러즈가 매우 좋아할 듯했다.
“그럼 저 등장할 땐 미니크롬 재단에서 소환되는 거로 해주세요.”
“현실에서 그런 특수 효과를……? 아니, 무대 리프트로 천천히 올라오는 연출이라면 가능하겠다.”
오랜만에 기획 회의를 하니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하지만 팬미팅 연출은 나중에 정해도 되니 일단 정규 앨범에 집중하자.
타이틀곡 은 2번 트랙.
그 앞의 1번 트랙은 앨범의 시작을 알리는 인트로 트랙이었다.
이 인트로 곡은 모노크롬의 기획 담당인 준해가 제목을 붙였다.
“인트로는 <에메랄드 시티>. 인물들이 소원을 이루러 간다는 걸 여기서 암시하는 거예요.”
이는 어느 동화에 나오는 지명이었다.
토네이도에 휘말려 다른 세계에 빠져버린 소녀가 동료들과 함께 소원을 이뤄주는 마법사를 찾아가는 이야기.
그 마법사가 사는 곳이 바로 에메랄드 시티였다.
‘소원에 반응하던 게임 세계에, 소원을 이루러 가는 이야기…….’
<궤도> 앨범도 소원을 이루는 별똥별에서 컨셉이 시작됐지.
이번 에서도 모노크롬은 필름 세계 속에서 헤매다가 자신을 닮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씩 찾아주게 된다.
그리고 결국 깨닫게 되지. 그들은 자기 자신이었고, 결국 이 모든 게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자신들의 내면에 품고 있던 약점을 이런 형태로 해소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트랙을 지나며 전개되는 이야기는 마지막 장에 이른다.
“마지막 곡은 아직 제목이 안 정해졌네?”
나는 멤버들의 의견이 담긴 곡 리스트를 쭉 훑다가 마지막 줄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번 앨범의 전개에 중요한 몇몇 곡은 멤버들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삼아 제목을 정하기로 했는데, 마지막 아웃트로 트랙도 그중 하나였다.
인트로나 타이틀곡만큼 중요한 마지막 곡의 제목은 아직 비어 있었다.
“이야기는 엔딩이 어떻게 나는지도 중요하니까 고민이 많았거든요.”
“단어 하나, 글자 하나 바꿔가며 이게 낫지 않겠냐, 아까 게 낫다 하면서…….”
열띤 회의를 펼쳤는지 멤버들은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번 정하면 바꾸기 어려우니까 고민이 많은 것도 이해 가지.
“그러면 마지막 곡 제목은 천천히 정하기로 하고…….”
지금 당장 정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넘어가려는데, 우형이 바로 끼어들었다.
“그러다가 아까 의견이 하나로 모였어요.”
반전이 있었잖아?
회의 직전에 정해져서 아직 자료에 업데이트가 안 된 것뿐이었던 모양이다.
“결말은 역시 이게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뭔데?”
멤버들도 정해진 제목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좋은 제목이 나왔을 듯해서 기대감이 담긴 시선을 보내자, 우형은 그 시선에 화답하듯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