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9화
과거가 바뀐 건가? 그 불친절하던 게임 시스템이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애프터 서비스를 해 줬다고?
‘아니. 만일 내 희망 사항이 반영되었다면 그냥 전 회사 자체를 없애주지 않았을까.’
동기의 말은 실제로 있었던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별로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묻어뒀던 퇴사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내가 어떻게 회사를 나왔더라.
내 자리의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양팔에 가득 안은 채로 빠르게 로비를 빠져나갔었지.
그리고…… 건물을 나가려던 참에 팀장놈이 따라오는 것 같아서 재빠르게 발로 로비의 유리문을 닫았다.
‘……그때 내 발에 닿았던 게 문이 아니라 정강이였나?’
난 또, 문에 발이 살짝 끼어서 아파하는 줄 알았지.
어쩐지 문이 그렇게 빨리 닫힌 것도 아닌데 다리를 부여잡고 주저앉더라. 나는 엄살을 부리며 쇼를 한다고 생각했고.
당시 양손에 짐이 가득했던 탓에 아래까지 보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멍이 꽤 세게 들었길래 사람들이 병원에 한번 가보라고 했는데 죽어도 괜찮다고 해서, 혹시 뭐 걸리는 게 있는 거 아니냐면서 약간 말이 돌긴 했어.”
“……흐음. 그래.”
내가 퇴사한 뒤에 말이 돌면 무슨 소용이야.
내가 있을 때도 말 옮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으니 타깃을 그쪽으로 돌린 것뿐이겠지.
그 인간의 퇴사 소식 외에는 별로 내 흥미를 끌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내가 대화에 큰 관심이 없는 게 느껴졌는지 동기는 화제를 바꿨다.
“물어보기도 염치없지만…… 잘 지냈어?”
“이런저런 일이 좀 있긴 했는데 잘 풀려서 만족스럽게 지내고 있어. 좋은 동료들도 만나고.”
회사에서 쫓겨나가듯이 퇴사했지만 잘 지낸다고, 그 회사에서 있었던 일은 결과적으로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알려주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이었다.
만일 날 깔보려고 만나자고 한 것이었다면 연예계에 주인님단을 만들고 있다고 더 과시할 생각이었는데, 만나자마자 사과를 한 탓에 그러진 않아도 될 듯했다.
“그렇구나. 너 연락이 안 된다길래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
“해외도 다녀오고 일이 바빠서 그렇게 됐어.”
나는 LA 로케 한 번 다녀온 게 끝이지만 내 다른 자아는 해외에 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
“바쁘게 지냈구나. 다행이다.”
“응. 너는 그 회사 아직 다니는 모양이네.”
“사람이 자주 바뀌니까 업무분장이 잘 안 되기도 하고 분위기도 좀 별로라. 나도 이직하려고 알아보는 중이야.”
동기는 나보다 입사가 늦긴 했지만 내가 퇴사하고도 2년을 더 다녔으니 오래 다니긴 했지.
주류 무리에 섞여서 편하게 지내다가 여러모로 불편한 상황이 생기니 이제야 그 회사가 그리 좋은 곳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요즘 이직도 쉬운 일이 아니던데……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 나는 이직했으니까.’
근황 이야기를 길게 나눌 생각은 없었다.
동기도 할 말은 다 한 듯하고 나도 들을 이야기는 다 들은 듯하여 대충 대화를 마무리하고 일어설까 했는데.
카페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동기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왔는지 화면이 저절로 켜졌고, 내 눈동자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응?’
평소라면 남의 핸드폰이 켜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텐데 눈길이 간 이유가 있었다.
잠금화면 배경 사진이…… 왠지 익숙한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저거…….’
모노크롬 새해 기념사진 아니야?
<음악대상> 대기실 복도에서 시상식 의상 입고 트로피 들고 찍은 사진.
새해를 맞은 컬러즈에게 무엇보다도 좋은 선물이 되리라고 생각해서, 그리고 컬러즈의 소원이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 담겼기에 새해 첫 사진으로 선정했다……라고 윤희가 설명했었다.
내가 핸드폰을 빤히 쳐다보는 것을 봤는지 동기가 머쓱하게 핸드폰의 전원 버튼을 눌러 화면을 껐다.
숨기고 싶은 듯했으나 나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팬이야?”
내가 동기의 핸드폰 속 모노크롬을 언급하자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그냥 노래가 좋아서…….”
‘노래가 좋아서’는 팬이 된 것을 말하기 부끄러울 때 자주 나오는 변명인데.
게다가 잠금화면 배경 사진으로 설정했다는 건 얼굴도 계속 보고 싶어서 해 둔 거 아니야?
내가 화면이 꺼진 핸드폰을 계속 바라보자 동기는 이실직고했다.
“아는 동생이 팬이라 자주 얘기를 들었더니 그냥 요즘 좀 신경 쓰여서……. 학생도 아니고 아이돌 좋아하는 거 좀 그런가.”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좋아하는 게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어르신들도 팬덤 문화 충분히 잘 즐기시는데.”
내내 심드렁하게 대화하다가 엔터사 직원의 자아가 튀어나와서 ‘아이돌 팬’을 두둔했는데, 내게 적극적으로 대화할 마음이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동기는 눈을 반짝였다.
“너도 모노크롬 알아? 혹시 팬이야?”
커뮤니티나 SNS를 애용하는 컬러즈는 내 이름을 안다.
실존 인물이 아니라 그냥 ‘주인님’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최근에 입덕한 것처럼 얘기하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다. 나보고 팬이냐고 묻는 걸 보면.
“……좋아하긴 하지. 모노크롬.”
“정말? 너는 언제부터 팬이었어?”
“아니, 팬은 아니고…….”
아까 그녀가 그랬듯이 나도 입덕부정기의 예비 컬러즈 같은 말을 꺼내고 말았다.
컬러즈가 아니라 관계자고, 좋아하게 된 지는 2년 정도 되었다는 사실은 내 입으로 알려주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더 연락할 빌미를 주고 싶진 않아.’
오늘은 그냥 깔끔하게 관계를 정리하려고 나온 것이었다.
동기도 팬 경력이 쌓이다 보면 언젠가 ‘주인님’의 존재를 알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동기는 같은 초보 컬러즈를 발견해서 반갑다는 시선을 보냈지만 나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일어섰다.
아쉬워하는 시선을 뒤로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더 홀가분했다.
***
눈이 내린 어느 날, 나는 라솔과 함께 배명희의 자택에 초대받았다.
배명희가 라솔의 회사와 계약했다는 소식은 기사를 통해 접했다.
‘검색 결과에 ‘배명희 신인상 논란’이란 글이 같이 나와서 무슨 일이라도 터진 줄 알았잖아…….’
알고 보니 배명희가 신인상을 받고 싶다며 포부를 드러냈으나 결국 그녀는 신인상 수상에 실패했다.
그 대신 받은 상이 ‘트렌드상’. 라솔이 대상을 받기 전에 받은 상이었다. 재작년에 모노크롬은 ‘올해의 트렌드상’을 받았고.
덕분에 ‘트렌드’가 들어간 상을 받으면 그다음 해 대상을 받는다는 속설이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나가고 있다는 듯하다.
아무튼 사람 불러오기를 좋아한다던 배명희는 라솔과 나를 동시에 집으로 초대했다.
마치 전생의 인연을 만나듯 한두 명씩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재회하던 나는 피커피와도 재회했다.
“상상 카페에서 마셨던 것보다 더 향이 좋은 것 같아요.”
“같은 원두라도 내리는 방법이 다르니까요. 그리고 그 피커피라는 게 맛있어 보이는 이름은 아닌 것 같아.”
배명희는 과거 아르바이트생의 네이밍 센스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반대급부로 ‘의외로 맛은 괜찮네’라는 반응을 끌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름이 기대의 한계치를 만든 모양이었다.
‘아무튼 예전에 찾아왔을 땐 기분이 조금 울적했는데.’
창밖으로는 눈 쌓인 풍경이 펼쳐져 있고 따뜻한 실내에는 커피 향이 가득하고.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자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라솔이 입을 열었다.
“이사님이 약속을 기억 못 하시길래 혹시 오기 싫으신가 했어요.”
“네? 설마요. 연락 주셔서 정말 반가웠는데요.”
“바로 오신다길래 저도 그건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기억상실 컨셉을 계속 이어가시는 줄 알았다니까요.”
라솔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어째서인지 그녀는 내가 잠시 ‘기억상실 컨셉’을 연기했다고 여기는 듯했다.
‘하긴 같은 질문을 두 번이나 했으니…….’
대표가 메신저로 라솔에게 ‘음악대상은 어떻게 받나요?’라고 질문한 것을 나중에야 발견했다.
음악대상 수상자를 처음 마주한 신주인은 항상 이런 반응을 하는구나. 역시 같은 신주인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실감한 순간이었다.
오늘 초대도 내가 모르는 새에 이미 약속이 잡혀 있었다.
<음악대상> 대기 시간에 만나서 모이기로 얘기를 나눴다는데, 나는 모르는 일이라 무심코 ‘배명희 선생님 댁에서요?’라고 물었다가 약속 장소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될 뻔했다.
“이사님은 다시 후배들이랑 일하게 되셨다면서요?”
“네. 예전에 약속해 놓은 게 있어서요.”
“에이. 저희가 데려올까 했는데 늦었네요. 먼저 말씀드릴걸.”
농담처럼 말했지만 회사 일로 고민이 생기면 자주 상담하던 라솔이라 아예 빈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대상 수상자한테 벌써 두 번째 스카우트 얘기를 듣는 거잖아……?’
어쩌다 이런 성공한 인생을 살게 되었을까.
감개무량하여 쑥스럽게 감사를 전하고 있는데 배명희가 뭔가 떠오른 듯이 말했다.
“그러면 거기서도 이사님이에요? ‘이사님’이 익숙해서 계속 그렇게 불렀네.”
“아뇨. 아직 부서명이 안 정해져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실장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은 스튜디오 어스의 전속 아티스트가 모노크롬 한 팀뿐이라 매니저들도 전부 모노크롬을 담당한다.
모노크롬의 활동을 총괄하는 팀과 매니지먼트팀을 따로 분리하기가 모호한 상황.
그래서 아티스트 기획실을 세우고 그 아래에 매니지먼트팀이 들어가는 그림으로 의견이 모이고 있었다.
“그럼 후배들은 실장님이라고 부르겠네요?”
“아뇨. 지금은 다들 제각각 부르고 있어요…….”
‘두목님’파 한이와 ‘주인 님’파 재민은 달라질 것 없고.
준해는 ‘대장님’이라는 임시 호칭을 발굴했다. 실장님이 될지 팀장님이 될지 모르니 일단 ‘장’이 붙은 호칭으로 부르면 나중에 적응하기 편하리라는 논리적인 이유에서였다.
해랑은 사람 이름을 잘 못 외운다더니 호칭 변화 적응에도 약한지 아직도 ‘이사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바뀐 호칭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던 우형은 습관대로 부르려다가 중간에 깨닫고 말을 멈추곤 했고.
가끔은 ‘아, 저기……’라며 거리감이 느껴지는 방식으로 나를 부르는 탓에 빨리 부서명이 확정되도록 노력하는 중이다.
“그런데 두 분은 그냥 이름으로 부르셔도 되지 않을까요……?”
나도 두 사람을 ‘라솔 씨’, ‘배명희 선생님’이라고 부르니까.
“그럼 주인 씨인가요?”
“네. 직함이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거고 저희가 비즈니스 관계는…… 아니잖아요?”
나는 동의를 구하듯이 물었다.
물론 두 사람 다 일 때문에 만나기는 했지만 지금은 조금 더 사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행히 두 사람도 나와 비슷한 생각인지 ‘주인 씨’라는 호칭을 여러 번 되뇌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어색하긴 한데 계속 부르면 익숙해지겠죠?”
“사실 저도 주인 씨라고 불린 적이 얼마 없어서 조금 어색하긴 하네요.”
이쪽이 더 익숙해야 할 텐데 어쩌다 ‘주인 님’이 더 익숙해졌을까.
근황에 호칭 이야기까지 나눈 우리는 가끔 이렇게 모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
이사님이었던 내가 이사가 아니게 된 탓에 여러 사람과 호칭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누구보다 호칭 문제를 정리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최 비서……를 계속 최 비서라고 부르면 건방져 보이지 않나?’
이제 내가 상사도 아닌데.
‘최 비서’가 아니라면 뭐라고 부르지? 최 비서님?
모노크롬과 최 비서를 처음 봤을 땐 게임 속 인물이란 생각이 강했던 탓에 내 말투가 반말로 정착되어 버렸다.
2년 동안 실컷 반말해 놓고 갑자기 ‘비서님.’ 하면서 경어를 쓰면 선 긋는 것 같고. 그렇다고 이름으로 부르면 친한 척하는 것 같고.
‘어느 쪽이든 어색하다면 우형이처럼 ‘아, 저기…….’라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방식으로 부를 수밖에 없어…….’
그래서 나는 [저… 시간 괜찮으면 할 말이 있는데…]라고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모르게 어미가 생략된 메시지를 보냈다.
지인들과는 천천히 연락을 재개했고, 그중에서도 최 비서와는 빠르게 연락이 닿은 편이었다.
2년 동안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꼭 직접 만나서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일이 바쁜지 나와 대화할 시간이 없어 보였다.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라는 답장을 보낸 이후로 그는 당분간 연락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