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398화 (398/430)

# 398화

이곳은 내가 살아왔던 현실에 내가 아는 연예계가 추가된 세계였다.

‘그러니까 전 회사 사람들이 있는 건 당연하지만.’

내가 무시하고 살면 엮일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날 먼저 찾을 줄은 몰랐다.

그 동기는 대표의 답장을 보고도 [할 말이 있는데 만날 수 없을까?]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거기에 대표는 답변을 안 했고.

왜 답변을 안 했는지는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았다. 불쾌한 감정만 일으키는 상대에게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았다.

‘좋은 사람들만 만나고 다녀도 부족한 인생인데.’

그나저나 대표는 이 메시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솔직히 말하면 대표가 ‘꺼져’라고 답변한 것도 놀라웠다.

예전의 나 같았으면 금방 우울한 감정에 빠져서 아무 대응도 못 했을 텐데. 단호하게 끊어내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있었던 걸까.

‘잠깐. 마지막 메시지는 대표가 확인을 안 한 것 같았는데, 내가 지금 대화창을 눌러서 읽음 표시가 뜬 건가?’

방송에서 만난 적 있는 작가님과 이름이 같아서 무심코 대화창을 누른 게 화근이었다.

대화를 더 할 건 아니니까 크게 상관은 없나. 그냥 ‘안읽씹’이 ‘읽씹’이 된 것뿐이지.

할 말이라는 게 뭔지는 몰라도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니까 굳이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것일 터.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서 나는 관심을 끄기로 했다.

***

송준오 피디가 세운 프로듀싱 회사의 이름은 다행히 ‘마이 엔터테인먼트’가 되지 않았다. 당연히 ‘재민 주식회사’도 아니었고.

일반적으로 소속사 이름에 붙는 ‘엔터테인먼트’나 ‘매니지먼트’, ‘컴퍼니’ 같은 명칭이 들어갈지 궁금했는데 전부 아니었다.

‘스튜디오 어스.’

아이돌 그룹인 모노크롬은 촬영 스케줄이 많았기에 ‘스튜디오’라는 단어를 들으면 촬영장의 세트나 사진 스튜디오가 먼저 떠올랐지만, 여기엔 음악가의 작업실이란 뜻도 있었다.

‘매니지먼트 회사보다는 프로듀싱 회사에 가까우니까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그리고 마이 엔터의 ‘마이’를 벗어나 ‘어스’가 된 점도 마음에 들었다.

마이 엔터에서 플레이어가 키우는 회사처럼 한 사람이 운영하는 회사가 아니라, 같이 운영해나가는 회사.

마이 엔터 세계관에서 벗어난 아티스트팀에겐 딱 맞는 이름이었다.

스튜디오 어스는 작지만 사옥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사옥으로 찾아가는 중이다.

‘대중교통으로 회사에 가는 건 정말 오랜만이야.’

비서가 모는 차를 타고 출퇴근한 게 일생에 다시 없을 경험이었지.

게다가 스케줄 현장으로 바로 이동할 땐 야간, 새벽 시간대일 때가 많아서 택시를 애용했고.

나는 사회 초년생이 된 신선한 기분으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스튜디오 어스에 도착했을 땐 사장님이 된 송준오 피디와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은 가오픈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보시다시피 아직 정리할 게 남아서.”

“사업장이 뚝딱 만들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마이 엔터에선 회사 이름만 적으면 뚝딱 만들어졌지만 여긴 현실이잖아?

회사 내부는 아직 조금 어수선했지만 그래도 직원들 몇몇이 벌써 나와 있었다. 모노크롬 멤버들도 곧 올 예정이었다.

오늘은 모노크롬 전담팀을 어떻게 구성할지 얘기할 시간이 필요하여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멤버들과 직원들은 이미 사옥에 몇 번이나 찾아왔다는데 나는 오늘이 첫 방문.

회사의 성질이 달라서인지 뉴마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훨씬 더 전문적인 느낌이네요.”

“아무래도 음악 작업을 메인으로 하는 회사니까요. 작업 공간에 신경 좀 썼습니다.”

모노크롬도 전속 아티스트 겸 창작자로서 이 회사에 소속된 것이었다.

이곳은 ‘아이돌 매니지먼트’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가 아니란 것이 체감되었다.

‘모노크롬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회사에 들어올 생각도 못 하지 않았을까.’

뉴마도 플레이어 낙하산으로 입사했는데 이곳도 모노크롬 낙하산으로 입사했지.

매니지먼트 전문은 아니지만 소속 아티스트인 모노크롬을 위한 공간도 당연히 따로 마련되었다.

층간 소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지하엔 연습실 공간이 있었다.

“넓은 공간은 넉넉히 있는 게 좋겠더라고요. 활용하기도 좋고. 그리고 멤버들이 안무를 만들 줄 아니까 댄스곡을 전체적으로 프로듀싱 할 수도 있고.”

아이돌 그룹 프로듀싱 경험이 있는 모노크롬이 있으니 이런 공간도 신경 써서 만들었다고 한다.

덕분에 스튜디오 어스는 작곡, 편곡 전문이 아니라 더 넓은 의미의 프로듀싱을 해 줄 수 있는 회사가 되었다.

나는 방음 처리가 된 문과 벽을 바라보다가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서 말했다.

“여기 방음 설비는 한이가 깐 건 아니겠죠? 전에 멤버들끼리 한이가 돈 내야 한다고 농담하던데.”

“진짜 튼튼하게 해놔서 소리가 뚫고 나오기 힘들 텐데. 이대로 써보고 유한이 목소리가 위층까지 들리면 그때 유한이한테 청구하기로 했죠.”

송준오 피디는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한이는 남들보다 조금 더 스릴 넘치는 회사 생활을 즐기게 될 듯했다.

사옥 구경을 마친 후, 이전 모노크롬 전담팀 주요 인원들과 회의실에 모였다.

민형과 윤희도 오늘 회사에 나와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요.”

“그래요? 전 왜 얼마 전에 본 것 같지.”

반가워하는 나와 달리 민형은 콧등을 긁으며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 대표……님이란 분? 이사님 친척이죠? 유전자가 엄청 강하던데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표는 <음악대상> 대기실에 잠깐 얼굴을 비쳤다가 갔다고 한다.

머리카락이 긴 내 모습은 대표 그 자체라서 바로 얼마 전에 만난 것처럼 느껴진 모양이었다.

대표가 내 친척이라고 생각하는 듯한데, 사정이 복잡하니까 대충 그렇다고 치고 넘어갈까.

“그런데 저 이제 이사도 아닌데 이사님이란 호칭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멤버들도 날 아직 이사님이라고 불렀다. 난 이사를 그만둔 지 한 달이 훌쩍 넘었는데.

모노크롬이 소속될 팀이 ‘아티스트 기획실’이 될지, ‘모노크롬 전담팀’이 될지에 따라 내 직함도 달라질 예정이었다.

그걸 얘기하려고 오늘 이렇게 모인 거고.

호칭 정리를 해야 할 듯해서 말을 꺼냈는데 민형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직함을 이사로 하면 안 될까요? 너무 입에 잘 붙는데.”

영업사원 같은 경우는 갓 입사한 평사원이라도 업무를 위해 대리 직함부터 다는 등 회사 내에서 부르는 직함은 회사 마음이지만.

‘어감이 좋다는 이유로 이사 직함을 붙이기는 좀 그렇지 않나……?’

나를 이사님이라고 부르는 멤버들도 이 화제에 바로 참여했다.

“주인 님이면 되는데.”

“성함을 막 부르는 건 형밖에 없을걸…….”

“역시 두목님이 제일이네.”

한이가 틈을 타 자신이 붙인 호칭을 밀었다.

직함이 두목이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

“아. 단장님은요?”

“단장님?”

방금 ‘주인 님’을 밀던 재민은 또 다른 호칭을 꺼냈다.

멤버들은 팀 미로의 수장인 민후를 단장이라고 불렀지.

회사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호칭이지만 팀 미로 소속인 재민은 단장이란 호칭이 익숙한가 했더니.

“주인님단이니까 단장님.”

“…….”

그거 아직도 남아 있었냐고.

재민의 ‘단장님’ 안은 금방 넘어가고 멤버들은 각기 의견을 내놓았다.

“그럼 우선 팀장님이라고…….”

“그러다 실장님이 되시면 헷갈리지 않을까?”

“그런데 ‘기획실’이 될지 ‘기획팀’이 될지도 더 얘기해봐야 하고…….”

“대장님…….”

사람은 한 명인데 이렇게 부를 호칭이 많다니.

나는 호칭이 점점 늘어나는 현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내가 ‘신대표’처럼 ‘신이사’로 개명하는 게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던 참에.

“주인 님, 계속 메시지 와요.”

재민의 말을 따라 테이블에 올려둔 내 핸드폰을 바라보니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뭐야? 대화가 끊겨 있길래 포기한 줄 알았더니.’

할 말이 있다던 그 동기였다.

내가 대화창을 누른 탓에 읽음 표시가 떠 버렸는데 그걸 본 모양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엎어두고 한숨을 쉬었다.

“별로 반갑지 않은 연락이 계속 오네.”

“저희도 요새 핸드폰 바쁘게 울리는데.”

“스팸 연락이 와?”

아니면 누가 번호라도 턴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심각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준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저희 대상 받은 이후로요. 대학 동기한테서도 연락 오고, 초중고 동창들도 연락하고…….”

“친척들이 제일 연락 많이 하지 않아?”

“데뷔했을 때 이후로 지금이 제일 연락 많이 오는 것 같아.”

멤버 전원이 겪는 현상인지 우형과 해랑도 한 마디씩 덧붙였다.

대상 수상을 축하한다는 연락이라면 나쁠 것은 없었다.

그간 한 번도 찾지 않다가 이제야 연락한 거라면 ‘대상 수상자와 친하다’고 과시하는 데에 이용당하는 기분일 수는 있겠지만.

“연락 한꺼번에 많이 오면 귀찮지는 않아? 만나자는 사람도 많을 텐데.”

“전 만나자는 연락 오면 좋던데.”

한이는 시간이 되면 연락해 온 사람들과 흔쾌히 만난다고 한다.

역시 인싸는 다른가 봐.

“특히 가수 한다고 약간 무시하던 애들이면 더더욱 만나야죠.”

성악을 배우다가 대중가요로 노선을 튼 한이는 대중 가수를 낮잡아 보는 사람들을 종종 겪어본 모양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굳이 만나줄 필요가 있나?’

내가 고개를 기울이자 한이는 다른 생각이 있는지 씩 웃었다.

“지금 잘나가는 제 모습 자랑하면 좋은데요. 태도가 바뀌면 그것대로 인정받는 기분도 들고.”

대상을 받는 순간에 천상식을 보면서 씩 웃은 것도 그런 이유였던 모양이다.

‘한이다운 대답인데…… 의외로 괜찮은 접근 방식이네.’

내가 못살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잘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복수일 수도 있잖아.

누굴 깎아내리거나 곤란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이니까 나름 건강한 방법이었다.

‘흐음. 그냥 넘어가기엔 찝찝하긴 해.’

전 회사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내가 계속 ‘잘못해서 쫓겨난 사람’으로 남을 테니까.

그땐 항변하기도 지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도망치듯 회사를 나왔는데, 지금이라면 만나서 뭐라고 한마디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대표가 꺼지라고 했던 것처럼.

상황이 달라지는 건 없어도 내 마음은 조금이나마 편해지겠지.

나는 회의를 마친 후, 뒤집어놨던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

반가운 사람도 아닌데 만날 준비 하는 데에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아서 오늘 나온 김에 바로 동기를 만나기로 했다.

당일 약속에 불만을 품지 않고 바로 나오겠다고 하는 건 의외였다.

‘정말로 급한 용건이었나?’

약속 장소인 카페에 앉아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그녀가 나타났다.

“내 연락처는 어떻게 알았어?”

퇴사한 후 핸드폰을 바꾸는 김에 번호도 바꿨는데. 바꾼 번호는 엄마와 정말 친했던 친구 몇 명에게만 알려줬다.

“다른 과 동기 중에 네 중학교 동창 있었잖아. 정말 중요한 할 말이 있다고 내가 알려달라고 했어. 내가 조른 거니까 연락처 알려줬다고 뭐라고 하지는 마…….”

단순히 회사에서 만난 동료라면 몰라도 대학교 동기이기도 한 탓에 다른 연결고리가 있었다.

2년간은 내가 연락이 안 되는 상태였기에 그 친구도 내게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 고민 끝에 연락처를 알려준 모양이었다.

“그래서 할 말이 있다는 게 뭔데?”

“저…… 사과하려고.”

“뭐를?”

“그게, 김 팀장. 얼마 전에 회사에서 문제 일으켜서 잘렸거든.”

김 팀장이란 날 회사에서 나가게 만든 그놈이었다.

망할 인간이 망했다는 이야기는 조금 흥미로웠기에 나는 가만히 동기의 이야기를 들었다.

“너 퇴사하고, 그 자리에 있던 대리님도 이직하셔서 신입을 한 명 뽑았는데……. 그 신입한테 김 팀장이 은근슬쩍 접근했다는 거야. 너도 알겠지만 그 사람 결혼했잖아.”

“그 신입 말은 다들 믿었어?”

내가 말할 땐 듣는 척도 안 하더니.

“알고 보니 그 신입이 부장님 조카였더라고…….”

“…….”

이 사회는 치사하게도 권력이 최고였다.

혈연이 없었으면 그 신입도 그냥 피해자로 남았을 거 아니야?

낙하산 경험자로서 그 낙하산 신입에게 이입돼서 더 화가 났다.

“그래서 징계를 받았는데 가족한텐 그걸 숨겼나 봐. 아내분이 수상하게 여기고 찾아와서 머리채 잡고 난리였어. 얘기하는 거 들어보니까 결혼하기 전부터 버릇이 나빴던 모양이더라…….”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아니지. 개는 귀여우니까 이런 데 비유하면 안 되지.

나는 귀엽고 착한 맥스와 복실이를 떠올리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김 팀장이 어떤 사람인지 까발려지고 다들 네 말 못 믿어준 거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어 했는데 연락처가 바뀌어서.”

“아. 나는 다시 만날 생각 없으니까 혹시나 연락처 알려줄 생각은 하지 마.”

미안해하든 말든 이미 늦었다.

오늘도 그냥 얘기만 들으러 나온 거지, 관계를 회복하러 나온 건 아니었다.

“……알았어. 나라도 대표로 사죄할게. 정말 미안해. 네가 그럴 애가 아닌데 그 사람 정강이 까면서 화를 낼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내가 그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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