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8화
11월 25일.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신주인의 생일이 지났다.
분명 아까까지 신주인과 함께 있었는데.
대표는 덩그러니 혼자 남아 11월 25일을 맞이했다.
‘……꿈인가?’
아니면 신주인이 현실로 돌아가고 이 세계가 게임이 되어서, 게임 속 캐릭터 시점으로 바뀐 건가?
하지만 달라진 것이 없었다.
12를 지난 시곗바늘은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계속 움직였고, 창밖으로는 도로를 지나는 차의 헤드라이트 빛이 어렴풋이 비쳤다 사라지곤 했다.
이곳은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미쳤어. 미쳤나 봐!”
신주인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대표가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라고 권했을 때, 주인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보다 빠르게 침착해지길래 ‘역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럴 생각이었던 거야!’
대표는 주인의 2년을 몰랐고, 설마 주인이 그사이에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버릴 정도로 이곳을 아끼게 되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2년이란 시간은 두 사람 사이에 간극을 만들었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건 두 사람의 본질이 같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대표가 주인을 ‘진짜 신주인’으로 여기고 돌려보내려 했다는 것은, 주인도 똑같이 대표를 ‘신주인’으로 남길 수 있다는 뜻이니까.
대표는 주인의 선택이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으려는, 실패하지 않은 신주인다운 선택이었다.
‘어떻게 살 거냐고 물어본 것도 이러려고 그런 거였어.’
조금 전까지 주인이 앉아 있던 의자의 등받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대표는 뒤늦게 황당함이 몰려왔다.
이 세계가 현실이 되었고, 지금은 대표가 이 세계의 신주인이었다.
‘해고로 처리해달란 것도, 설마 신주인으로 실업급여 받으며 정착하라고 그런 건 아니겠지?’
대표는 주인이 자신이 모아둔 돈을 펑펑 낭비하던 것을 떠올렸다.
돈을 탕진해버린 것도, 자신에게 아무 말도 안 한 것도 전부 원망스러웠지만 원망할 신주인이 없었다.
남은 것은 신주인이 쥐여 준 스마트폰뿐.
대표는 지문으로 스마트폰 잠금을 해제하고, 엄마와의 대화창을 찾았다.
바로 어제, 엄마는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냈고, 신주인은 돌아가려면 조금 더 걸릴 것 같다고 답장했다.
‘진짜 나쁜 애야.’
엄마를 보러 갈 수 있으면서 다른 걸 택하다니.
이미 2년 전에 자신이 그랬는데, 정확히 2년 후 신주인이 또 그랬다. 이번엔 다른 가능성을 남겨뒀다는 것이 다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신주인이라 그랬다는 결론으로 이어져서 대표는 본인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나 혼자 여기 남아서 어떡하라고!’
퀘스트를 발생시켜? 어떻게?
주인이 말한 대로 모노크롬의 퀘스트가 끝나기 전까지는 아직 게임 시스템이 유효한지, 스마트폰에는 마이 엔터가 남아 있었다.
대표는 마이 엔터 아이콘을 터치했다. 자신이 대표직을 그만둔 탓에 회사 관리창은 텅 비어 있었다.
남아 있는 것은 모노크롬이 발생시킨, 아니, 모노크롬과 신주인이 동시에 발생시킨 퀘스트뿐이었다.
‘……그래. 이게 남아 있어.’
대표의 눈에 들어온 건 ‘[신주인]의 현실 복귀’라는 퀘스트 보상이었다.
***
신주인은 뉴마를 떠났지만 최 비서는 뉴마에 남았다.
“신 이사님이 하셨던 일은 최 비서님이 거의 파악하고 계시죠?”
“네.”
“우선 아티스트팀 직원분들이 전부 이동하시니, 그쪽 대응을 부탁드릴게요. 배우팀으로 옮기시는 분들은 목록으로 정리해서 경영팀에 연락해 주시고…….”
사장의 비서가 그에게 할 일을 전달했다.
최 비서가 할 일은 아티스트팀 직원들의 퇴직과 부서 이동을 관리하는 것.
한마디로 아티스트팀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일이었다.
“양해 부탁드려요. 사장님도 정신이 없으실 때라.”
“괜찮습니다.”
아티스트팀을 싹 정리한 뉴마지만 최 비서를 같이 내보낼 생각은 없었다.
최 비서는 대표에 이어서 이사의 보좌까지 맡은 능력 있는 직원이었으니까.
거기에 현재 아티스트팀의 정리를 맡길 만한 사람이 최 비서뿐이었다.
아티스트팀의 수장이었던 주인이 없는 지금은 사장이 이 일을 처리해야 했지만, 그는 배우 회사가 된 뉴마 엔터테인먼트를 새로 단장하기 바빴다.
최 비서도 이 회사에서 자신이 할 일은 이것이라 생각하며 순순히 본인의 자리에 앉았다.
‘이사님의 남은 일을 정리하는 것.’
그의 자리는 여전히 이사실 앞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수선했지만 지금은 조용해진 이곳에서 최 비서는 주인이 자신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최 비서한테는 도움만 받았는데 마지막까지 내 멋대로 해서 미안해.]
주인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행을 간다고, 모노크롬에게는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고 했지만 최 비서에게는 조금 달랐다.
최 비서는 대표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주인은 대표에 관해서는 숨기지 않았다.
[원래 이 세계에 있던 신주인은 대표였으니까 차라리 이게 자연스러운 것 같아. 최 비서도 나보다는 대표를 더 오래 봐왔잖아.]
[하지만 제가 아는 신주인 이사님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녀의 말대로 대표를 더 오래 보좌하긴 했지만, ‘신주인’이라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 건 신주인 이사가 처음이었다.
최 비서가 아는 신주인은 대표가 아니라 신주인 이사였다.
[누구 한 명이 없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신주인은 신주인이거든.]
그러면서 주인은 “기억을 잃은 신주인이 이 세계 어딘가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말을 덧붙였다.
자신은 주인의 선택을 따르는 사람이었다.
주인의 마음은 이미 확고했고, 이번에도 자신은 그녀의 뜻을 따랐다.
확실히 이전과는 달랐다. 대표가 갑자기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때처럼 불안한 기분은 없었다.
뉴마도, 뉴레인도 그녀가 없이 돌아가기 시작했고 모노크롬 또한 새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만둘까.’
7년이나 자리를 지켰지만 그는 이 회사에 매인 사람은 아니었다.
아마도 사람에 매여 있었던 것이리라. 주인이 떠난 지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 자신은 뭘 해야 할까.
송준오 피디도 최 비서에게 슬쩍 이직 의사를 타진했으나, 최 비서는 이곳에서 마저 할 일이 있을 것 같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갈 곳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가고 싶은 곳은 딱히 없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들이 겪는 번아웃 증후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사님이 자꾸 쉬라고 하셨나.’
최 비서는 혹시 연차수당을 아껴야 할 정도로 큰돈이 들어갈 일이 있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던 주인을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사내 업무를 자주 자신에게 일임하곤 하던 그녀였다.
기왕 안 쉴 거면 알뜰살뜰 일하란 뜻이었을까. 계속하여 자신을 찾으니 더 쉴 생각이 사라졌다는 것은 모르고.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는데…….]
주인은 아티스트팀을 뒤엎으면서 최 비서에게는 불똥이 튀지 않도록 했다.
모노크롬을 내보내고, 전담팀의 주요 인원들의 퇴직을 직접 처리하고, 남은 인원들의 거취를 신경 쓰고.
주인은 마지막까지 사람을 챙겼다. 이 세계에 남을 신주인까지도.
[신주인이 도움을 구하면 도와줄 수 있어?]
주인은 그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한 듯했다.
최 비서는 ‘신주인 이사님’이라고 저장된 연락처로부터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
“신주인. 신주인이 날 속였어.”
퇴근 후, 주인의 자택 근처 카페에서 만난 대표는 배신감에 주먹을 쥐었다.
최 비서는 ‘기분 나빠’ 이후로 처음 듣는 대표의 목소리였다.
아는 목소리에 아는 얼굴, 심지어 주인이 가끔 입고 출근하던 옷을 입고 있었지만 머리카락만이 허리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
“알고 있었어? 신주인이 혼자 떠나려고 한 거.”
“……예. 이 세계에 대표님이 남으실 거라고 말씀하신 적은 있습니다.”
“말리지는 않았어?”
“저는 이사님의 뜻을 따르는 게 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표는 “역시 비서 캐라…….”라고 중얼거리다가 입을 합 다물었다.
“……혹시 신주인이 게, 아니, 데이터나 시스템 같은 이야기도 한 적 있어?”
“업무 데이터라면 남겨 두셨습니다만…….”
대표는 최 비서가 ‘게임’에 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것을 바로 파악했다.
‘최 비서가 날 알고 있다고 했는데. 신주인은 마이 엔터에 관해선 자세히 얘기를 안 했나 보네.’
결국 이곳에 남은 게임의 흔적이라고는 대표의 기억과, 대표의 손에 들린 주인의 스마트폰뿐이었다.
주인은 이곳을 완전한 현실로 만들고 떠났다. 그 사실이 다시 온몸으로 체감되었다.
그러면 이 비서 캐릭터는 대체 뭐지?
대표는 최 비서를 힐끔거리다 물었다.
“최 비서는 날 알고 있었다며. 신주인이 나, 대표였다는 것도.”
“정확히는 대표님이 이사님 핸드폰을 가져가셨을 때 확신하게 됐습니다.”
이곳을 현실로 만들려는데 주인이 자꾸 방해해서 그랬었지.
결국 주인이 현실화를 택했다는 게 아이러니한 점이었다.
아무튼 대표는 최 비서가 자신을 앞에 두고도 이렇게 덤덤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주인이 최 비서에 관해 이야기하며 ‘대표를 너무 오래 보다 보니 일반적인 사고에서 약간 벗어난 것 같다’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 그런 듯했다.
‘날 보고 놀라는 것보다야 이쪽이 이야기가 수월하니 좋지만.’
대표가 최 비서를 관찰하듯이 최 비서도 대표를 관찰했다.
대표와 독대하고, 최 비서는 주인이 ‘신주인은 신주인’이라고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특히 자신을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는 점.
주인이 뉴마에 처음 부임했을 때도 그랬다. 분명 처음 만나는 자리였는데도 자신과 대화를 많이 해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표의 말투를 구사했다.
대표와 주인은 자신을 똑같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 더 나아가 ‘신주인’이라는 같은 사람이었다는 점이 확실히 와닿았다.
부임 초반의 주인을 상대하는 듯한 묘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신주인이 나한테 모든 걸 떠넘기고 갔어.”
“……네.”
“그런데 난 신주인이 할 일이 남아있다고 생각해.”
최 비서는 눈을 크게 떴다.
최 비서는 대표가 주인의 행적을 알고 ‘신주인’의 삶에 적응하려고 자신을 부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다른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표는 주인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지체하지 않았다.
“모노크롬을 만나야겠어. 그리고 도움이 필요해.”
***
대표가 모노크롬 멤버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최 비서는 민형에게 연락했고, 민형이 잠시 본가로 흩어진 멤버들을 불러 모았다.
약속 장소는 사옥 내부 공사가 끝날 때까지 임시로 사용하려고 임대한 작업 공간.
“쌍둥이……?”
“아냐. 나 바보라고 한 사람!”
“녹음실 귀신?”
“대표님 친척분이라고…….”
“대체 신주인이 뭐라고 한 거야?”
다양한 호칭이 나왔으나 ‘이사님?’이라는 말만큼은 나오지 않았다.
멤버들은 대표를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인식했다.
대표는 그 점에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대표야. 신대표.”
대표의 지금 신분은 ‘신주인’이었지만, 대표는 자신을 대표라고 소개했다.
우형이 불안한 눈빛으로 대표를 바라봤다.
“대표님……이시라고요?”
자신이 뉴마의 대표였다는 것을 모노크롬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한 대표는…….
“응. 그런데 자세한 건 묻지 마. 나도 너희도 머리 아파지니까. 그냥 대표구나 하고 생각해.”
그냥 막 나가기로 했다. 최 비서의 반응을 보고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실제로 모노크롬 멤버들은 그녀의 당당함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상냥함은 없었지만, 막무가내인 점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대표는 멤버들에게 대답하거나 질문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할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신주인을 다시 데려올 생각이거든.”
“주인 님을요?”
빠르게 화제를 바꾸자 모노크롬 멤버들은 태클을 걸 생각도 못 하고 바로 대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신주인]의 현실 복귀.
처음엔 ‘신주인’의 해석만 갈린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신주인의 현실은 엄마가 있는 세계였다.
그러나 지금은 대표가 남은 이 세계 또한 신주인이 선택한 현실이 되었다.
신주인이 현실로 돌아온다는 퀘스트 보상이 아직 남아 있다.
그리고 보상을 받으려면 당연히 퀘스트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음악대상. 포기하긴 이르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협조해 줘야겠어.”
대표는 주인과 똑 닮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