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7화
신주인은 뉴마를 떠났다.
신주인 이사는 자신이 이끌던 아티스트팀을 유지하지 못했다.
결국 모노크롬과 회사에게 피해를 준 책임을 지고 조용히 회사를 떠나는 것이 이 사내 권력 다툼 스토리의 끝……이었으나 나는 대표에게 하나를 더 요구했다.
“나 해고로 처리해 줘.”
“실업급여 받게?”
“아니…… 내가 그걸 받아서 뭐 해.”
2년이나 대표로 지내온 대표도 아직은 일반 회사원의 사고가 익숙한 모양이었다.
‘예전에 퇴사하고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 차라리 해고당했으면 실업급여라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회사는 그것도 싫었나 보다, 하고.’
제 발로 나가도록 사람을 구석으로 몰아넣는 게 더 악질인데 말이야.
아니지. 해고를 당했어야 하는 건 그 팀장놈인데 왜 내가 아직까지 해고니 퇴사니 하며 기분이 나빠야 하는 거야.
나쁜 기억을 곱씹을 시간은 없었다. 나는 머리를 털고 다시 대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냥 해고되는 그림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신주인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려고 한 것 같잖아.”
“……그래, 그럼.”
물론 쫓겨나는 것도 좋은 그림은 아니었지만, 이게 더 후련할 것 같았다.
대표의 동의는 받았으나 대표는 여전히 회사로 출근하지 않았기에 나는 내 이름이 적힌 해고통보서를 직접 회사로 들고 갔다.
해고당하는 사람이 ‘내가 해고당하는 서류를 가져왔으니 내보내 달라.’라고 요구하는 이상한 상황.
실제로 권 실장은 ‘이 사람 뭐 하는 사람이지?’ 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적잖이 당황했는지, 당당하게 회사를 떠나는 나를 보고는 “자, 잘 들어가십시오.” 하며 손님을 배웅하듯 작게 고개를 꾸벅 숙인 것도 웃겼다.
‘그 사람 기억엔 내가 감정 기복이 큰 히스테릭 마이웨이 임원으로 남지 않을까.’
예전엔 권 실장이 나를 간 보듯이 보는 게 싫었는데, 막판에 내가 제멋대로 굴자 이해를 포기한 것처럼 나를 피했지. 원래 자기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은 피하는 게 상책이니까.
그래서 난 지금 신주인 이사가 아닌 그냥 신주인으로서 대표와 마주 앉아 있다. 나와 같은 시기에 대표직을 내려놓고 백수가 된 대표와.
“컬러즈가 대표는 백수가 돼도 이름이 대표라는 게 웃긴다고 했는데, 진짜 백수 대표네.”
“너도 백수잖아.”
대표가 피장파장이라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름이 대표인 쪽이 더 임팩트 있는걸. 백수를 대표하는 사람 같잖아.
“뉴레인 쪽은 어땠어? 경영자가 갑자기 바뀌었는데.”
“거긴 지금 거의 팀 단위로 굴러가니까 대표 자리에 누가 앉든 크게 상관없지, 뭐. 아이리스도 재계약하면서 채윤환처럼 자율적인 활동을 회사한테 어느 정도 보장받기로 합의했으니까.”
“아이리스랑 윤환이는 만족해도 기획실은 불만일 것 같은데……. 기획실장은 더 윗자리를 노리는 것 같았거든.”
“내가 보기에 기획실은 위에서 제어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일을 잘해. 새 윗사람한테 잘 보이겠다고 일 열심히 할걸.”
“일리 있네.”
대표는 뉴레인 기획실만큼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나도 기획실이 권력자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일을 척척 잘 해내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번엔 대표에게 화제를 돌렸다.
“너는 원래 여기서 지내려고 했잖아. 어차피 대표는 그만둘 거였지? 그럼 뭐 하면서 지내려고 했어?”
“지금 와서 왜 그런 걸 물어?”
“그냥 궁금하잖아.”
거리낄 것이 없어진 세상에서 신주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려고 했을까.
같은 신주인이니까 대표가 생각한 은퇴 이후의 삶은 내 이상적인 삶이기도 할 터였다.
“으음. 그냥 아르바이트하면서?”
“대표직 내려놓고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했다고?”
“아니,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간다는 뜻은 아니고. 내가 해외를 좀 돌아다녔었잖아.”
해외로 도피한 줄로만 알았는데, 대표는 의외로 그곳에서 다양한 삶의 형태를 보고 왔다고 설명했다.
“호텔 앞에 있는 카페 직원이 나한테 여행 중이냐고 말을 걸어서 대화를 좀 하게 됐거든. 그 사람은 원래 큰 IT 회사에 다녔는데 그만두고 카페 일을 한다는 거야.”
자신을 알아보는 이가 없는 해외에서 대표는 현지 사람들과 평범하게 대화하며 지낸 듯했다.
“아등바등 살기에는 너무 지쳤잖아. 그래서 나도 마음 편히 정착할 곳이 있으면 어디든 상관없겠다 싶었어. 그런 곳을 찾을 때까지는 여기저기 옮겨 다니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
“그렇구나. 그것도 나쁘지 않네.”
“너는 돌아가면 다시 취직할 거야?”
“나? 나는…….”
말을 얼버무리려는데, 타이밍 좋게 내 스마트폰이 울렸다.
이제 모노크롬 전담팀과 내 일이 달라져서 알림이 뜸해진 참이었는데.
화면을 확인해보니, 우형에게서 파일이 하나 와 있었다. 곧이어 메시지도 하나 도착했다.
[저희 복귀하면서 가장 먼저 발표할 곡인데… 아직 완성된 건 아니지만 먼저 들려드리려고요.]
나는 모노크롬에게 24일에 떠날 예정이라고 말했다. 25일부터는 연락이 잘 되지 않을 거라고.
지금은 24일 밤. 우형은 오늘이 지나기 전에 내게 보내려고 곡 작업을 1차로 급히 마무리한 모양이었다.
나는 대표에게 “잠깐만.”이라고 양해를 구하고 바로 우형이 보내온 음악 파일을 재생했다.
새 보금자리에 자리 잡는 모습은 아쉽게도 못 보게 되었지만, 노래를 듣고 있으니 모노크롬이 다시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서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모노크롬이 나에게 주는 생일 선물처럼 느껴졌다.
“착한 애들이지?”
“……정을 떼야지, 마지막까지 연락하고 있으면 어떡해?”
대표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안심이 안 되는지 미간을 좁혔다.
신주인이 미련 없이 떠나길 바랐는데 미련을 보이면 어떡하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대표가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깜깜한 창밖을 한 번 보고, 다시 대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정말 선택할 시간이었다.
“역시 이 세계가 게임으로 남는 건 상상이 안 가.”
“네가 그걸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이 세계의 모든 것이 현실과 똑같이 움직이는 건 대표의 퀘스트가 진행되는 상태,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겠지.
내가 돌아가면 현실화할 기회를 잃은 이 세계는 게임 속 세계로 남는다.
“여기가 게임으로 남으면, 내가 여기서 얻은 기억도 데이터로 만들어진 기억이 되는 거잖아?”
내가 계속 이 세계에 관해 이야기하자 대표는 한층 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너,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지?”
아니. 이건 이상한 생각이 아니라 내가 떠올린 최고의 선택이야.
나는 방금까지 모노크롬의 노래가 흘러나왔던 내 스마트폰을 대표의 손에 쥐여 줬다.
“신주인.”
나는 대표를 부르며 ‘신주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적어도 모노크롬의 퀘스트가 끝나기 전까지는 퀘스트를 만드는 힘이 남아 있을 거야.”
“뭐?”
“내가 엄마랑 대화 나눈 거 꼭 읽어. 재작년 생일부터 지금까지 나눈 메시지 전부.”
대표의 눈동자가 떨렸다.
신주인이 ‘현실 복귀’가 아니라 다른 보상을 택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이러는 게 아니다.
“엄마를 보고 싶다고 간절하게 소원을 빌어. 그럼 퀘스트를 발생시킬 수 있을 거야.”
대표가 이 세계에 올 때 한 번, 내가 이 세계에 올 때 또 한 번.
두 번이나 퀘스트를 발생시키며 차원의 문을 넘은 신주인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대표는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경악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네가 이럴 줄 알았으면 보상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 안 했어!”
“그래서 나도 너한테 말 안 한 거야.”
대표가 내게 선택지를 줬을 때 그렇게 말했지. 함구하고 있다가 생일 당일에 날 돌려보낼 생각도 했다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내가 돌아가서도 이곳에서 못다 한 일들을 마음에 담아둘까 봐 내 손으로 직접 정리할 수 있게 미리 말해준다고.
하지만 대표의 생각은 틀렸다.
생각할 시간이 생긴 덕분에, 나는 다른 선택지를 찾아냈다.
‘대표는 이미 이 세계를 현실화할 생각을 버렸어.’
그러니…… ‘[신주인]의 현실 복귀’ 대신, ‘이 세계의 현실화’라는 보상을 선택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이 현실로 남으면서, 신주인도 엄마를 만날 수 있는 선택지가 있는데 다른 선택을 할 리가 없잖아.
이곳이 현실이 되면 대표가 나 대신 신주인으로 살아갈 테니, 사라지는 건 2년간의 내 기억뿐인 셈이다.
내 앞에 있는 신주인 또한 2년 동안 자신의 삶을 살아왔는데, 하나만 남게 된다면 굳이 ‘신주인 이사’로 살아온 신주인이 남을 필요는 없지.
그러나 대표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어떻게 엄마를 만나는 퀘스트를 발생시켜? 나는 엄마를 버렸는데.”
“아니. 네가 엄마한테 메시지 보냈었잖아. 걱정하지 말라고.”
핸드폰이 부서졌을 때, 엄마는 나와의 연락이 갑자기 끊긴 것이 아니라 내가 연락되지 않는 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게임 시스템의 영향이 아니었다.
대화창이 돌아오고 확인했을 때, 핸드폰이 부서진 그날 내가 보내지 않은 메시지가 발송되었다.
잠시 연락이 안 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대표도 엄마를 잊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 엄마를 선택한 건 너야.”
대표는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신주인을 엄마에게로 돌려보내려 했다.
반대로 나는 정을 버리지 못하고, 엄마를 만나는 게 아니라 다른 선택지를 골랐지.
이 퀘스트는, 나보다는 대표가 더 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1시 55분.
모든 시계 바늘이 12를 향해 움직였고 이제는 시간이 없었다.
“신주인!”
대표가 나를 황급히 불렀지만 나는 보상을 선택했다.
옆에서 ‘치직’ 하는 노이즈 소리가 들려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암전되어가는 내 시선에 어렴풋이 스쳐 지나간 것은.
‘저건…….’
내가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 본 것과 같은, <퀘스트 발생!>이라는 문구였다.
***
모노크롬 멤버들은 밤늦게까지 숙소의 짐을 정리 중이었다.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면 물건이 섞이기 때문에 각자 자신의 짐을 분류할 필요가 있었다.
짐도 사람도 어수선한 와중, 거실에 앉아 있던 해랑이 뭔가를 발견한 듯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왜? 또 뭐 안 넣고 박스에 테이프 붙였어?”
체중을 실어 이불을 꾹꾹 압축하던 준해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해랑은 짐이 그렇게 많지 않다면서 빠르게 박스를 채워 닫더니,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자신의 물품을 찾는 바람에 몇 번이나 박스를 다시 열었다.
너무 익숙해서 인식하지 못한 곳에도 자신들의 물건이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해랑은 정말로 정리를 끝냈다면서 베란다로 이어진 창가 앞자리에 앉아 쉬는 중이었다.
그는 항상 이 고정 자리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익숙한 자리도 이제 마지막이었다.
“아니, 방금 하늘에.”
해랑이 준해의 질문에 대답하며 창밖을 가리켰다.
“별똥별이 떨어졌어.”
“뭐? 나도 볼래!”
주방에 있던 재민이 대화 소리를 들었는지 후다닥 거실로 나와 창문에 찰싹 얼굴을 붙였다.
그러나 순식간에 지나간 별똥별을 지금 찾는다고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까 해랑 형이 “어?” 할 때 나와 있었어야지. 다 지나가고 나오면 뭐 해.”
“아냐. 하나만 떨어지고 끝나는 게 아니라 유성쇼일 수도 있잖아.”
일상이 바빠서 지나치고는 하지만, 유성쇼가 펼쳐진다는 뉴스는 의외로 자주 들을 수 있다.
우연히 떨어지는 별똥별 하나를 관측하는 것보다, 우연히 하늘을 올려다본 날이 유성쇼가 펼쳐지는 날이라 별똥별을 볼 수 있었다는 쪽이 더 확률이 높지 않겠는가……라는 것이 재민의 주장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고.”
“형은 그냥 쉬러 나온 것 같은데?”
방에 있던 한이가 일리 있는 소리라면서 거실로 나와 드러누웠다. 방에는 짐이 널려 있어서 누울 곳이 없어 나온 것처럼 보였다.
옆에서 늘어지게 휴식을 취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쉬고 싶어지는 법.
이불 압축팩과 씨름을 하느라 잠시 체력이 소진된 준해도 그 옆에 가서 앉았다.
동생 네 명이 거실에 모이니 우형도 빠질 수 없었다.
“계속 누워있으면 일어나기 싫어진다. 5분? 10분쯤 기다려도 안 떨어지면 다 일어나서 짐 정리하러 돌아가.”
“아, 제발 나도 보고 싶다. 별똥별! 한 번도 못 봤단 말야.”
“너의 중력을 찾아가는 Shooting Star~”
재민은 기도하듯이 손을 모으고 창밖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한이가 <궤도>의 한 구절을 흥얼거렸다.
<궤도>가 바로 별똥별이 지나가는 모습에서 착안하여 완성한 곡이었으니 지금 이 순간의 BGM으로는 아주 적절했다.
소원을 이루러 가는 모노크롬의 우주 열차.
그 컨셉 기획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준해가 멤버들에게 물었다.
“별똥별 떨어지면 소원 뭐 빌 거야?”
“소원은 원래 복권 1등 당첨 빌라고 있는 거 아냐?”
“소원이 너무 유한이스러워.”
“나스럽다는 게 무슨 소리야? 그럼 우주 평화.”
해랑이 ‘유한이스럽다’라고 지적하자 한이는 갑자기 소원의 스케일을 우주 단위로 키웠다.
한이다운 대답에서 벗어나지 않자 우형도 “그것도 유한이답다.”라며 웃었다.
“우주 평화가 뭐 어때서. 그러는 형은 무슨 소원 빌 건데.”
“나는…….”
누구나 복권 당첨이나 일확천금을 꿈꾸긴 하지만, 우형은 그보다는 지금 당장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지금까지 함께해준 사람들이 계속 함께해 줬으면 좋겠다.”
“음. 그건 인정.”
지금 모노크롬이 딱 하나의 소원만 이룰 수 있다면.
멤버 개인이 아니라 모노크롬으로서 소원을 빈다면 멤버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소원 이야기를 나누며 멤버들이 같은 미래를 그리고 있던 그때.
“어! 지금 봤어? 맞지?!”
창문에 바짝 붙어 있던 재민이 멤버들을 향해 뒤돌았다.
모두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고정하고 있는 것을 보니 한 명도 놓치지 않고 본 모양이었다.
“진짜로 떨어지네?”
“아까 것보다 더 밝았어.”
“와, 신기하다. 나 별똥별 떨어지는 거 처음 봐.”
그 찰나의 순간에 같은 생각을 하며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우형은 별똥별이 사라진 하늘에서 시선을 돌려 멤버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진짜 우리 소원이 이뤄지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