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1화
주인이 최 비서에게 휴가를 권유하듯이, 최 비서도 주인의 일이 많았던 날이면 하루 이틀 쉬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하곤 했다.
사람의 체력은 무한하지 않고, 일을 오래 하기 위해서라도 가끔은 쉬어줘야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주인은 무언가에 쫓기듯이 흘러가는 시간을 아까워했다.
최 비서도 평소 같았으면 주인의 휴가를 환영했을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당일 연차 사용.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었고, 그렇다면 비서인 자신이 도움을 주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주인은 그런 일은 아니라면서 쉬기로 한 이유를 알려주었다.
[대표랑 긴히 할 말이 있어서. 중요한 이야기라 생각할 일이 좀 생길 것 같아.]
주인은 그렇게 전달하고는 확인해야 할 일이 있으면 메일로 보내 달라고 지시했다.
불 꺼진 이사실 앞에서, 최 비서는 대표가 갑자기 두문불출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땐 자신 외에는 아무도 대표를 찾지 않았다. 마치 원래 그런 세상이라는 듯이.
그러나 오늘은 그날과 사뭇 풍경이 달랐다.
[이사님이 출근 안 하셨다고요?]
모노크롬 전담팀 직원들은 미니 앨범 티저 공개 일정으로 연이어 회의하던 시기였다.
업무 시간이 시작하자마자 이사실로 찾아왔던 윤희는 주인이 출근하지 않은 것을 알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인이 쉴 정도면 단순한 휴가가 아니라 건강 문제라고 판단했는지 윤희는 바로 적극적으로 나섰다.
[몸이 편찮으신 것 같으면 제가 다녀올까요?]
집으로 찾아간다면 같은 여자인 자신이 편할 거라는 윤희의 말에 최 비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편찮으신 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으시다고 하셔서.]
주인은 대표와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아마 상대가 대표에 관해 알고 있는 자신이기에 솔직히 말했을 터.
다른 직원에게 대표 이야기를 할 순 없어서 최 비서는 건강 문제는 아니라며 윤희를 돌려보냈다.
지금 앞에서 계속 질문을 던지는 재민도 적당히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사님께 전달할 내용 있으시면 대신 전하겠습니다.”
“으음……. 아뇨, 괜찮아요. 컨디션이 안 좋으신 거면 운동하시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이사님이 운동 부족이시던가.
뜻 모를 운동 영업에 잠시 생각에 빠진 최 비서를 두고 재민은 발걸음을 되돌렸다.
연습실로 돌아온 재민은 들은 내용을 멤버들에게 전했다.
“몸이 안 좋으신 건 아니래. 생각할 일이 있으시대.”
건강 문제가 아니란 것은 다행이었지만 멤버들의 얼굴엔 여전히 걱정이 서려 있었다.
“요즘 신경 쓸 일이 많아서 그러신 거 아닐까.”
해랑의 말에 멤버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모노크롬을 둘러싼 상황들이 심상치 않았고, 모두 평소보다는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황.
이 시점에 주인이 시간을 들여 생각할 일이라면 예상 가는 것이 있었다.
“음악대상……. 상황이 좀 어렵게 됐지. 하아. 이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냐고.”
한이도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주인의 음악대상 목표에 동참했다.
그러나 연말이 다가오는데도 음악대상과 관련된 일은 점점 수렁에 빠져들어 가기만 했다.
해랑은 주인이 아버지 이야기를 했던 것을 다시 떠올렸다.
“이사님은 더 중요한 일이 걸리신 것 같던데…….”
이 말을 들은 우형의 표정이 한결 더 어두워졌다.
우형은 이전에 주인과 배명희가 하는 대화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주인은 수상에 실패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더 힘내보려 했지만 현실의 벽은 녹록지 않았다.
그동안 스스로가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커다란 벽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고 무력해지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그래도 우리 할 일 잘해야지. 할 수 있는 게 그거니까.”
리더가 해야 할 말이 재민의 입에서 나왔다.
혼자 굴을 파고 들어가려던 우형은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항상 자리를 지키던 주인이 없으니 회사 분위기가 불안정해진 느낌이었다.
“이사님이 안 계시니까 생각났는데…… 예전에 대표님이 안 나오신 적 있었잖아.”
최 비서처럼 준해도 대표가 회사에 나오지 않았던 날을 떠올렸다.
당시 모노크롬은 스케줄이 없어서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아이리스가 느꼈던 ‘세상이 멈추는 기분’은 모노크롬도 어렴풋이 느꼈다.
준해는 어쩐지 어수선한 기분에 손으로 가슴팍 언저리를 쓸었다.
“그때가 다시 올 것 같은 기분이야.”
***
대표가 내게 갑자기 자신의 스마트폰을 건넨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긴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왜…… 나를 돌려보내려고 하는 거야?”
“네 퀘스트, 성공하기 어려운 상황이잖아.”
“그건 그렇긴 하지만…….”
나나 모노크롬이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상을 사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끼어들 줄은 누가 알았겠어.
이곳이 그저 게임 속이었다면 이런 일 없이 순수하게 활동만으로 수상자를 선정했을 텐데, 이곳은 게임이 아니었다. 아니, 아직은 게임이 아니라고 해야 하나.
“내가 돌아가면, 너는?”
“나는 신주인이 아니잖아. 전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대표는 자신이 신주인이 되려고 했던 대표 캐릭터일 뿐이지, 신주인이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표는 신주인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을 꺼냈다.
“너는 엄마를 버리지 못해.”
그 말대로였다.
나는 엄마를 딸을 잃고 혼자 남은 이로 만들 자신이 없었다.
대표도 그걸 잘 알아서 ‘신주인’을 돌려보내려고 하는 것이다.
엄마를 외면했던 자신 대신, 계속 돌아가려고 했던 나를.
“잠깐 여행을 다녀왔다고 생각해. 2년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 아니잖아.”
“여기서 있었던 일은 다 잊으라고……?”
“응. 그리고 돌아가서 게임은 하지 마. 그냥 네 삶을 살아.”
대표도 나를 잘 알고 나도 대표를 잘 안다.
이게 대표가 내린 최선의 선택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무어라 대꾸하고 싶어도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음악대상 퀘스트가 결과적으로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리면, 내가 이 세계에서 해온 것들이 뭐가 돼…….”
“아니지. 아이리스가 결심해서 내 퀘스트가 끝났고, 내가 엄마한테 널 돌려보내기로 마음먹었잖아. 전부 네 영향이라고 생각해.”
대표는 이 결론에 도달한 것도 내 노력의 결과라고 했다.
대표 시점이기에 아이리스 이야기만 나왔지만, 모노크롬도 얻은 것이 없지는 않았다.
이제 모노크롬은 그들만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니까.
예전과는 다르게 지지해주는 사람이 많아진 길.
거기에 나 하나가 빠져도 모노크롬은 계속 나아가겠지.
하지만 계속 목표로 삼으며 올려다봤던 산의 정상이 실은 저 멀리에 있는 산봉우리라는 것을 알아챈 것처럼 허무함이 몰려왔다.
“하아…….”
지금 당장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머리를 정리할 시간은 몇 주가 더 남아 있었다.
나는 잠시 진정하고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그런데 왜 보상을 받는 날이 하필 생일이지? 너도 생일에 여기로 온 거잖아.”
내가 퇴근하기를 기다리며 대표도 이 점에 관해 생각해 본 듯했다.
“전에 네가 퀘스트 보상은 퀘스트 과정에서 서서히 이뤄가는 것 같다고 말했잖아.”
“응.”
“그런데 현실 복귀는 우리가 노력한다고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세계의 현실화도, 현실 복귀도 우리가 노력한다고 조금씩 이뤄갈 수 있는 목표가 아니었다.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다른 힘이 작용해야 한다.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려면, 우리가 이 세계로 왔을 때만큼의 힘이 필요하겠지.
“현실 복귀를 생일 소원으로 보고, 세계가 소원을 이뤄준다는 거야?”
“퀘스트가 아이돌의 소원인 것도 그렇고, 소원에 반응하는 세계잖아.”
모노크롬의 인지도나 팬 지수 상승과 다르게 내 현실 복귀는 이뤄지는 기분이 안 들었는데 그런 시스템이었나.
게다가 소원이 이뤄진 날은 생일 하루뿐만이 아니었다. 내 새해 소원에 반응해서 나도 이 세계로 왔지.
만일 대표의 퀘스트가 생일 이후에 달성되었더라도 그다음에 소원이 이뤄질 만한 날에 보상을 받게 되지 않았을까.
“내가 가지고 있다가 당일에 널 돌려보낼 생각도 했는데, 네가 직접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마무리를 해야 후련하게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대표는 내게 스마트폰을 넘긴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나도 대표로서 정리할 일은 다 처리해 놓을 거야. 너도 이사로서 할 일을 끝내.”
“내가 이사로서 할 일…….”
연말까지 처리할 일은 정해져 있었으나 이렇게 급히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복잡한데, 기한은 자비 없이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고 있었다.
***
“형, 안 일어나?”
칫솔을 입에 문 재민이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우형을 불렀다.
이불에 들어가 있는 우형은 잠긴 목소리로 느릿하게 대답했다.
“나…… 오늘은 좀 더 자야겠다.”
“주인 님 안 계셔서 형도 출근 안 하는 거야?”
주인도 직원들이나 멤버들이 자신을 찾았단 이야기를 들었는지 오늘까지는 출근을 안 할지도 모른다며 메시지를 남겨두었다.
재민의 질문에 대답하다 보면 어느새 무한 질답의 굴레에 빠진다는 것을 아는 우형은 대답 대신 팔만 내밀어 휘저었다.
재민이 별말 없이 방을 나오는 것을 본 한이가 물을 마시며 물었다.
“형 더 잔대?”
“응. 밤늦게까지 계속 작업하는 것 같던데 졸린가 봐.”
재민은 어젯밤 우형이 책상 앞에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모니터를 쳐다보던 것을 떠올렸다.
작곡을 해 본 적 없는 재민이지만 창작이 얼마나 집중을 요하는 일인지는 알았다.
그래서 방해하지 않도록 먼저 조용히 잠을 청했다. 재민이 잠든 후에도 우형은 아마 몇 시간은 더 그렇게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재민이 일어났을 때, 역시나 우형은 잠을 몇 시간 못 잤는지 수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긴 우형이 형, 요새 일 하나 끝날 만하면 새 일 생기고, 끝나면 또 일 생기고 해서 피곤할 만해.”
프로듀싱 앨범은 모노크롬의 미니 앨범 준비와 크게 겹치지 않으리라 생각해서 기획했을 텐데.
그 이후로 계속 다른 그룹, 선배 가수의 곡 프로듀싱에 참여할 일이 생겼으니.
멤버들보다 컴백 준비를 소홀히 하는 것도 아니었다. 힘들다고 자주 연습실 소파에 눕기는 했지만.
“그럼 여우 형은 이따가 알아서 나오거나 쉬라고 하고 우리만 출근하자.”
요즘 멤버들은 앨범 준비가 바빠서 꼬박꼬박 출근하지만, 피곤한 우형을 끌고 가는 것보단 쉬라고 두는 게 나으리라 판단했다.
모노크롬 멤버들은 우형을 숙소에 두고 출근했고, 한 시간쯤 지나자 주인이 연습실로 찾아왔다.
“어! 주인 님 나오셨네요?”
주인은 문을 열자마자 연습실 전체를 쭉 훑고는 재민에게 물었다.
“우형이는?”
“여우 형 더 잔다고 해서 놔뒀어요.”
“몸이 안 좋은 건 아니고?”
“글쎄요. 피곤해 보이긴 했는데…….”
어제 주인이 그랬던 것처럼 꼬박꼬박 나오던 사람이 안 나오면 다들 건강 걱정부터 하는 걸까.
그러나 주인은 단순히 ‘무슨 이유로 회사에 나오지 않았는지’를 묻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재민은 주인의 굳은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매니지먼트팀에 있다가 연습실로 향하던 민형은 문을 붙잡고 서 있는 주인을 보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 있어요?”
“민형 씨. 잠시 숙소에 다녀올 수 있어요?”
“네?”
“우형이 잘 있나 좀 봐 주세요.”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지만, 주인이 급하게 이런 일을 부탁하는 이유가 있었다.
주인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 화면 속.
우형의 캐릭터 옆에 [상태 이상]이란 문구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깜빡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