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7화
촬영 기간이 얼마나 길어지려나. 그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마지막 촬영이라니.
생각지 못한 내용에 잠시 버퍼링이 걸렸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물었다.
“방송 연장하기로 한 게 취소된 건가요?”
원래 중간에 비는 시간대에 들어가느라 촬영이 길지 않으리란 것은 미리 전해 들었다.
다음에 편성될 프로그램 일정을 미룰 수 없어서 취소한 거라면 어쩔 수 없지.
단지 줬다가 뺏는 기분이라 아쉬울 뿐,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다.
그렇게 체념하려는데 임주미 PD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남 일 얘기하듯이 말했다.
“촬영 연장은 고사하고 예상보다 일찍 끝날 수도 있어요.”
“왜요?”
“제가 마음에 안 들었나 보죠.”
“무슨…… 사고 치셨어요?”
“이사님은 제가 그렇게 사고뭉치로 보이세요?”
네…….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인내심을 발휘하여 다시 꾹 삼켰다.
내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는 것은 개의치 않는지, 임주미 PD는 어깨를 으쓱했다.
“방송국 놈들이 뭐, 다 그렇죠. 수틀리면 팽하고, 자기네들 체면이 우선이고.”
어쩜 이렇게 옳은 소리를.
내가 하던 생각을 그 방송국 사람 입에서 직접 들을 줄은 몰랐다.
“다른 사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PD님이 마음에 안 들어서 방송을 끝낸다고요?”
“연예인한테만 제멋대로 구는 게 아니라 안에서도 이런저런 일이 있습니다. 파벌 따라서 맡고 있던 프로젝트가 엎어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뭐 이딴 회사가 있나 싶겠죠?”
은퇴 얘기로 도발하면서 출연진을 섭외하던 임주미 PD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으려니 어불성설이란 생각이 가시지 않지만…….
방송계라는 파란만장한 세계에서 순탄하게 살아남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임주미 PD도 많은 일을 보고 겪어왔겠지.
그녀도 나름대로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비뚤어진 상태로 버텨온 거 아닐까.
게다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찍혔다는 소리 같은데.
“혹시 음악대상 때문이에요? 이 방송이 방해돼서?”
“다르게 말하자면 저희가 위협이 될 정도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냈다는 거죠. 꼭 그 이유뿐만 아니라 그냥 제가 맡은 방송이 잘되는 게 꼴 보기 싫은 것 같기도 하고.”
이게 이렇게 가볍게 할 소리인가.
음악대상 내정 카르텔이 우리를 방해물로 인식하는 날이 오리라고 생각은 했다.
‘슬슬 승부를 볼 시기이긴 하지.’
<상상 카페>도 방영을 시작하고 시일이 어느 정도 지났기에, 당장 끝난다고 하더라도 당초 촬영 계획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선두에 서 있는 임주미 PD가 농담하듯이 말하니까 내가 엄살을 부릴 수도 없었다.
“으음……. 그래서 PD님은 괜찮으세요? 담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엎어진 거잖아요.”
우리도 스케줄이 줄어들어 버렸지만, 공중파 프로그램의 고정 호스트 역할을 잠시나마 맡았다는 게 어딘가. 보통이라면 게스트로 한두 번 나가는 게 끝인데.
예능 부문으로 잘 풀리는 아이돌도 이렇게 완전체로 장기 출연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기획이나 섭외 단계에선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지만, 임주미 PD는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많이 제공하기도 했다.
내가 화제를 그녀에게 돌리자 임주미 PD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런 걸 물으실 줄은 몰랐네요. 걱정하시는 건가요? 전엔 의심하시더니. 병 주고 약 주시네.”
아니, 걱정이고 뭐고. 회사에 찍혔다는데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평범한 거 아니야?
공동체 내부의 대세 여론에 맞서는 건 외로운 길이라는 사실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임주미 PD는 방송국에 걸맞은 인재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조직 생활엔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저희야 촬영지만 벗어나면 끝이지만 PD님은 계속 방송국에 계시잖아요. 마주치기 껄끄러운 사람들이랑 계속 봐야 할 테고.”
“물론 보기 싫은 면면들은 있지만, 반대로 상대방도 제 낯짝을 보기 싫어할 테니까 딱히 손해 보는 기분은 아닌데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다행이고요.”
나를 기준으로 생각해서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던 건데. 그녀는 나와 멘탈 수준이 달랐다.
임주미 PD는 이런 일들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는지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나를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게 부담스러운데.
“이사님은 작은 일에는 전전긍긍하시더니 큰일에는 의외로 덤덤하시네요. 보통 다른 분들한테 이런 얘기 하면 불똥 튀지 않을까 걱정부터 하시던데.”
다른 분들이라니,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종종 있었던 걸까.
그러나 이런 말에 새삼스레 하나하나 놀라기엔 임주미 PD의 언동에도 조금 익숙해졌다.
“음악대상은 연예대상이나 연기대상과 다르게 ‘QBC 내의 활동’으로 주는 상은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죠. QBC가 어느 정도 입김은 불어넣을 수 있지만 마음대로 주무르면 시상식의 공신력이 없어지니까 대놓고 작당 모의를 못 하는 거고요.”
“네. 그러니까 저희가 지금 노릴 건 대중들 마음이지, 방송국 마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임주미 PD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내게 물었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이사님도 상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요. 음악대상에.”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느끼셨는데요?”
임주미 PD와 음악대상 내정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나눴지만, 모노크롬이 음악대상을 노린다는 이야기는 한 적이 없다.
모노크롬을 평가할 것 같아서 앞으로도 얘기할 생각은 없었는데.
“박형주 씨한테 원한이 있어서 수상을 막으려는 건가 했는데, 의외로 박형주 씨한텐 크게 관심이 없으신 것 같고. 그래서 라솔 씨를 미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고.”
“배명희 선생님을 응원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잖아요.”
“이사님이 저랑 처음 만났을 때, 다른 사람 밀어주는 건 똑같은 게 아니냐면서 회의적으로 나오셨잖아요? 그때도 대상 소문엔 관심이 있으셨는데.”
나를 관찰하기라도 한 건가.
별로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대답을 안 하고 있으니 임주미 PD는 혼자 생각에 빠졌다.
“모노크롬이 대상? 흐음…….”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임주미 PD는 의외로 후한 평가를 입에 담았다.
“급부상해서 기반이 약한 느낌은 있지만, 올해 활동들만 떼놓고 생각해 보자면 최우수상까지는 가능성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다른 해엔 이런 그룹이 안 나올 것 같거든요. 실적이 특이하고 다양하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후한 평가는 여기서 끝이었다.
“그런데 대상? 배명희 선생님도 아니고 모노크롬이 경쟁자로 나서면 만만하게 보고 부담 없이 그냥 제치려고 할 것 같은데요. 박형주 씨도 아예 실적이 없는 건 아니라.”
“……아무래도 아이돌이란 점이 걸릴까요.”
“제작진이 아이돌이랑 개인적으로 친할 수는 있는데, 방송국이 아이돌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진 않거든요.”
아까도 ‘방송국 놈들’ 같은 표현을 쓰더니.
임주미 PD는 본인이 방송국에 몸담고 있기에 좋지 않은 면도 잘 알아서 이런 신랄한 말도 거침없이 꺼내는 듯했다.
“나이가 어린 것도 경쟁력이 떨어지고. 뭐어, 어리단 건 반대로 앞날이 창창하단 얘기니까 다음 기회가 있지 않겠어요?”
내가 시무룩해 보였던 걸까. 임주미 PD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내겐 다음 기회가 없다는 점에서 별로 위로는 안 되었지만.
올해 모노크롬이 해왔던 활동들은 아이돌이고 젊어서 할 수 있는 것들이었는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상 수상자’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 게 발목을 잡다니. 이건 우리가 노력한다고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걸 임주미 PD에게 한탄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화제를 돌렸다.
“그럼 그냥 <상상 카페>가 종영하고 끝인가요? 다른 이유도 아니고 부정을 막으려다 불이익을 받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요.”
임주미 PD도 내부 정보를 들어서 알고 있으니 우리에게 데모곡 표절 문제를 알려줬을 텐데.
이 문제를 아직 터트리지 않는다는 건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어서가 아닐까.
내정 카르텔을 더 막을 방법이 없으니 방송 조기 종영도 막지 못한 거지.
그런데 임주미 PD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밟은 게 지렁이가 아니라 지뢰라는 건 알려줄 생각이에요. 죽더라도 혼자 죽을 순 없죠.”
당당한 걸 보니 믿을 구석이 있는 걸까. 하지만 임주미 PD라면 믿을 구석 없이도 당당할 것 같아서 문제였다.
“다른 계획이라도 있으세요?”
“쉽게 건드릴 건 아니라 아직 알려드릴 순 없고, 언제 터트리는 게 제일 재밌을까 고민 중이에요.”
그녀가 ‘재밌을 것 같다’라고 하면 위험한 냄새가 풀풀 풍겼다.
안지택 PD를 매우 싫어하던 것 같은데, 커리어를 걸고 재미를 추구할 정도인 건가.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범위는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슬쩍 한 발짝 물러나 그녀와 거리를 뒀다.
***
<상상 카페>가 일찍 종영하더라도 다른 활동을 잘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역시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는 않았다.
나는 소파에 앉아있는 대표를 붙잡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QBC 토크 예능 미팅이 잡혔다가 취소됐는데, 혹시 이 일이 관련 있나?”
“미팅 단계에서 엎어지는 건 일상다반사라며?”
“그런데 타이밍이. 최근에 주목받고 있으니까 불렀을 텐데 다음으로 미루겠다는 건 좀 이상해. 그리고 다른 방송 작가도 한번 보면 좋겠다고 연락하더니 갑자기 말을 바꾸잖아.”
모노크롬이 임주미 PD와 한통속이라고 생각한 걸까?
‘따지자면 한통속이 맞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뭘 했다고.
방송 열심히 하고 시청률 올려준 게 죄야? 이건 방송국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잖아.
우리가 음악대상 내정에 관해 알고 있다는 건 임주미 PD와 라솔밖에 모르는 사실이다.
그런데 QBC가 갑자기 모노크롬을 멀리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하나 짐작 가는 게 있다면…….
‘신셋 데모곡 사건 때문에 지레 찔려서?’
연말 시상식 시즌이 다가와서 방해물들을 최대한 치우려다 보니 그때 일이 갑자기 마음에 걸린 거지.
모노크롬이 자리를 빼앗길 뻔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관심을 가지고 진상을 파헤치려는 사람이 있을 테고.
일을 그르칠까 봐 서둘러 취소한 게 아닐까.
“……아니면 뉴마 배우팀이 또 뭔가 일을 벌이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냐.”
이런저런 가능성을 생각하다가 이전에 뉴마 배우팀이 모노크롬의 스케줄을 방해했던 것이 떠올라 중얼거리자 대표가 딱 잘라 부정했다.
“넌 뉴마 일엔 관여 안 한다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내가 언제까지고 뉴마 대표로 남아있을 수는 없으니까 사장이랑 얘기를 좀 했거든.”
“그래……?”
요즘 대표는 ‘신대표’의 신변 정리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뭔가 숨기는 것 같은데 물어봐도 별거 아닌 것처럼 대답하니 자세히 캐물을 수도 없고.
내가 수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대표가 화제를 돌렸다.
“아. 아이리스는 QBC에 미팅 간댔어. <아이돌부 방학캠프> 때문에.”
“그래? 뉴레인에 영향이 간 게 아니라면 다행이네.”
방송국도 뉴마와 뉴레인이 연관된 회사라는 건 잘 알 텐데.
뉴레인의 아이리스는 부르는 걸 보면 우리를 배제하려는 건 아닌가?
그러나 QBC의 이상한 행보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QBC에서 섭외가 들어왔습니다만…….”
내가 QBC 문제로 고민하는 것을 아는 최 비서가 ‘QBC’를 강조하며 이사실로 들어왔다.
하나는 미팅 취소, 하나는 연락이 흐지부지되더니 이번엔 또 섭외?
청기 올려, 백기 올려도 아니고. 이러다 또 취소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번엔 또 무슨 방송인데?”
“<최고의 팀메이트>입니다.”
“손영식 PD님?”
“네.”
아이리스가 나간다는 <아이돌부 방학캠프>도, <최고의 팀메이트>도 손영식 PD가 담당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게다가 그는 ‘미팅이 취소되었다고 들었는데 시간이 되면 그때 보죠.’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혹시 일부러 우리를 섭외하는 거면…….’
QBC 내에서도 파벌이 갈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박형주를 음악대상으로 밀어주려는 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