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6화
배명희가 이런 제안을 할 줄은 몰랐기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모노크롬하고 같이요?”
“아마 후배들이 아니었으면 다시 노래 부를 마음을 못 먹었을 것 같아서요.”
프로그램을 기획한 임주미 PD의 의도는 불순했지만, <상상 카페>에서 만난 인연들 덕분에 배명희는 많은 변화를 겪은 듯했다.
“그리고 역시 가수로 나서는 건 오랜만이라 후배들의 도움을 받고 싶기도 하고. 후배들이 도와주면 다 잘되었다던데요.”
“그런 이야기가 있었나요……?”
그러고 보니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해.
모노크롬과 첫 시작을 함께하면 잘된다고 믿는 유아이TV도 있고, 몬클하우스에는 1위 가수만 놀러 온다는 소문이 돈 적도 있었고.
“행운 부적 같은 느낌이 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기운이라도 받고 싶어서.”
이것도 어디서 자주 듣던 말인데.
모노크롬도 가요계의 토템, 부적으로 통하기 시작한 걸까.
배명희가 모노크롬이 있어야 안심이 된다면 당연히 협조할 생각이 있다.
‘아니지. 이건 협조라기보다는 우리한테 좋은 기회가 들어온 거지.’
이게 배명희의 배려라면 놓칠 이유는 없었다.
“멤버들이랑 라솔 씨와도 얘기해 봐야겠지만…… 다들 좋다고 할 거예요.”
“원하는 노래 느낌이 있는데, 이건 또 나중에 작곡가분을 찾으면 상의해 봐야겠죠?”
“작곡 쪽은 걱정하실 필요 없을 것 같아요.”
마침 모노크롬의 메인 작곡가 우형이 더클랜 프로젝트에선 보조가 되었다.
거기에 당연하다는 듯이 도움을 주려는 작곡가가 한 명 더 있지 않은가. 그것도 배명희의 신곡을 맡을 라솔의 회사에.
여러 상황이 배명희의 컴백을 기다린 것처럼 준비되어 있었다.
‘대가수가 오랜 세월을 거쳐서 공식 컴백…….’
마침 연말, 시상식 시즌을 앞둔 시기이다. 아마 큰 반향이 있겠지.
그러나 지금은 방송이나 음악대상과 같은 외부의 요소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아마도 이게 퀘스트 종료 전 모노크롬과 함께하는 마지막 프로젝트가 될지도 모르니까.
의미 있는 일로 남기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이 들었다.
***
배명희가 라솔의 회사와 접촉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상상 카페>로 배명희에게 많은 이목이 쏠린 상태. 덕분에 방송계에선 특히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빨랐다.
배명희가 은퇴를 고민하는 것은 방송을 통해서도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 라솔과 만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곧 가수로 복귀한다는 설이 가장 유력했고, 음악대상을 주최하는 QBC 내에서도 이 화제가 심심치 않게 사람들 입을 오르내렸다.
“이라솔 씨는 음악대상에 또 도전한다는 소문 있지 않았어요? 거기에 배명희 씨까지 데리고 가면, 와아.”
“그런데 회사 소속 가수가 유명하다고 경력으로 쳐 주나? 그건 아니지. 그럼 소속사 사장님들은 대상 한 번씩은 다 받았어.”
“잠깐만. 그런데 이라솔 씨 말고 배명희 씨도 후보에 오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러게? 연초에 옆 방송국에서 빵 떴지, 연말에는 <상상 카페>에……. 가능성 있겠는데.”
연초와 연말의 화제성을 둘 다 잡으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올해 가장 영향력 있었던 가수’로 기억될 가능성이 크다.
배명희가 유력한 음악대상 후보라는 이야기가 퍼져나갈수록, 박형주를 대상으로 미는 세력은 위기를 느꼈다.
“얼마 전에는 이라솔이 대상을 노린다더니 이제는 아예 이라솔과 배명희가 손을 잡는다?”
어느 쪽이건 이들에게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이 정도면 누군가 박형주를 견제하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갑자기 배명희 씨는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임주미는 조용히 살던 사람을 왜 갑자기 끌고 나와서는.”
부장이 안지택 PD와 마주 앉아 한숨을 쉬었다.
배명희를 띄운 선봉장을 꼽자면 단연 임주미 PD였다.
“안 PD, 혹시 임주미랑 뭔 일 있었던 거 아니지?”
“임주미랑 뭔 일 없는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르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마음에 안 드는 건 들이받고 보는 임주미 PD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그녀와 잘 지내는 사람이 더 드물 것이다.
우연히 배명희라는 거물이 얻어걸린 것뿐이라면 괜찮지만, 다른 의도가 있어서 이들을 일부러 방해하려 하는 것이라면 골치 아팠다.
“뭐 걸리는 거 없지?”
“으음…….”
안지택 PD는 확실히 대답하지 못했다.
떳떳하지 못할 일을 하고 있는데 뒤가 깨끗할 리가.
“이렇게 되면 상을 줄 만한 구실이 더 필요하겠는데 말이야…….”
후보가 쟁쟁하면 박형주가 밀리지 않느냐는 소리가 나올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경쟁자를 후보에서 아예 제외시키면 방송국 입맛에 맞는 사람만 밀어준다는 소리가 나올 테고.
이라솔이라면 대상을 받지 못하더라도 사람들은 ‘재작년에 받았으니까.’라며 수긍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하는 것은 또 달랐다.
“그래도 곧 박형주 씨 다큐멘터리도 나올 예정이고…….”
“그건 이력서에 경력 한 줄 채워주는 거나 마찬가지고. 실제 면접 자리에서는 말이야. 눈에 확 띄는 재능을 보여줘야지.”
다큐멘터리가 나오건 말건 대중들은 임팩트 있는 활동만 기억한다.
“굵직한 프로듀서 이미지로 밀고 있으니까, 히트곡 같은 게 나와주면 좋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박형주 씨 소속사에 가수 많잖아. 이제 연말이야. 뭐 하나든 더 쥐어짜 봐.”
안지택 PD도 구실이 더 필요하다는 말에는 동의했기에 별말 없이 부장과의 대화를 종료했다.
안지택 PD는 박형주에게 이 말을 어떻게 전할지 고민하며 걷다가, 복도에서 임주미 PD를 마주쳤다.
“아이고, 선배. 걱정이 많아 보이십니다? 뭐가 잘 안 풀리기라도 하나 봐요.”
“그러는 너는 얼굴이 폈다? 누구 엿 먹일 계획이라도 짜고 있나 보지?”
“왜요. 엿 먹는 사람이 본인 같아요?”
예전부터 여러 번 갈등을 빚은 이들은 악담이 인사말이 된 지 오래였다.
“예능국 체면 생각해. 경거망동하지 말고.”
“그걸 아는 분이 왜 그러실까.”
혹시나 했는데 역시 뭔가 눈치채고 있는 건가.
안지택 PD는 미간을 좁혔으나 임주미 PD는 눈을 가늘게 하며 얄밉게 웃을 뿐이었다.
“전 언제 그만둘지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누가 일을 더 크게 만드나 보자고요.”
“저, 저 또라이 같은 게……!”
“또라이, 또라이 하지 맙시다. 듣는 또라이 기분 나쁘게.”
임주미 PD는 한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여유롭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
경력이 쌓여 능력을 인정받는 선배 PD와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는 후배 PD.
두 사람 간에 충돌이 있으면 방송국 윗사람들은 십중팔구 선배 쪽의 편을 들어줄 터였다.
내부 문제로 방송국 이미지에 흠집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최대한 묻으려 할 테고.
자신의 신경을 긁는 사람이 다른 이였다면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갈 텐데, 임주미 PD는 행동을 예측할 수가 없어서 문제였다.
‘저렇게 여유를 부린다는 건, 그만큼 확신할 만한 물증이 있어서인가?’
위로 몇 사람이 더 엮여 있는 일인데 일개 PD가 모든 정보를 파악하고 있을 리는 없다.
만일 임주미 PD가 뭔가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박형주의 후보 결격 사유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방송국은 뒤에서 조금 욕은 먹더라도 ‘후보 개인의 문제를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라는 변명으로 직접적인 책임은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쉽게 발을 뺄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벌려놓은 것들이 있으니 웬만하면 계획 그대로 진행하는 게 바람직했다.
‘그러면 임주미가 일부러 배명희를 띄운 게 맞는 건가.’
박형주는 이라솔을 경쟁 상대로 보고 그녀보다 눈에 띄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배명희라는 대선배가 나타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배명희에게는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이상 넘을 수 없는 경력의 벽이 있었다.
물론 중간에 공백기가 매우 길었으나, 그 때문에 오히려 복귀의 임팩트가 컸다.
‘<상상 카페>에서 은퇴 떡밥을 던지던 게 전부 이때를 위해서였나.’
어쩌면 <상상 카페>라는 방송 자체가 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었다.
배명희, 임주미…….
‘그리고 모노크롬?’
<상상 카페>의 출연진을 생각하던 안지택 PD의 머릿속에, 문득 작년 일이 떠올랐다.
<쉰셋돌>을 준비하면서 타이틀곡 작곡가 자리를 박형주에게 넘기려고 한 적이 있었다.
원만호가 작곡팀이 가져왔던 데모곡을 가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결국 투표까지 갔다가 무산되어 버렸지만.
그땐 박형주와 음악대상 이야기를 나누기 전이었고, 타이틀곡 작곡가 자리도 모노크롬과 라솔이 데려온 작곡가가 다시 가져간 터라 잊고 있었다.
임주미 PD는 혹시 거기서 실마리를 잡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라솔과 모노크롬도 처음부터 한패였나?’
안지택 PD는 사람이 없는 복도 구석에 가만히 서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
배명희의 제안을 전하자 멤버들은 역시나 흔쾌히 받아들였다.
“오히려 저희가 감사할 일 아닌가요?”
우형의 말에 나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도 선생님이 우리를 배려해서 제안해주신 것 같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너희가 바빠질 것 같아서.”
“선배님이 생각해두신 멜로디가 있으면 곡 작업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다행히도 배명희는 부르고 싶은 노래의 멜로디를 꽤 자세히 생각해뒀다.
게다가 라솔의 회사가 배명희의 신곡 발매를 책임지기로 이야기해 둔 상태.
우리는 노래를 완성하고 부르는 것 외의 부수적인 부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여우 형이 괜찮으면야, 뭐. 댄스곡은 아니잖아요?”
“그렇지.”
“그럼 전 곡 나올 동안 더클랜 애들이랑 있어야겠네요.”
“……그런데 왜 이렇게 즐거운 표정이야?”
더클랜의 안무를 책임지겠다는 재민은 뭐가 그리 좋은지 방싯방싯 웃었다.
못 말린다는 듯한 표정의 준해가 재민 대신 입을 열었다.
“더클랜이 퍼포먼스에 특화됐잖아요. 그래서 체력도 좋고 트레이닝 할 맛이 난대요.”
“<쉰셋돌> 때 이담이는 트레이닝 꽤 힘들어하지 않았어?”
“이담이담은 메인 보컬이잖아요.”
같은 메인 보컬인 한이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메인 보컬이라 노래를 안정되게 부르기 위해 동작이 간소화되는 파트가 많다나.
‘그럼 체력 좋은 멤버들 사이에서 이담이는 더 힘들어지는 거 아니야……?’
<쉰셋돌> 때는 다른 신셋 멤버들이 같이 힘들어해서 괜찮았는데 지금은 상황이 다른 거지.
혼자 쉬겠다고 말도 못 하고 끙끙대고 있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재민이 한계치까지 몰아붙이긴 해도 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굴리지는 않으니까 괜찮으려나.
“더클랜 애들도 댄스 크루 만들면 들어오겠대요.”
“진짜 만들게?”
“네. 할 수 있는 대로 사람 모아서 크게 만들 거예요. 앞으로 아무도 춤을 그만둘 생각 못 하게.”
“조금 섬뜩한데…….”
분명 건전한 의도인데 춤을 향한 집착이 느껴져서 약간 오싹해졌다.
아무튼 일이 하나 더 늘어나서 멤버들은 각자 역할을 분배받았다.
해랑과 재민, 준해는 더클랜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우형과 한이는 배명희의 곡을 같이 준비하기로.
배명희는 피아노를 치며 생각을 많이 정리했다면서 노래에도 피아노 반주를 넣기를 바랐다. 이 부분은 한이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잘 풀리는 일이 있으면 반대로 잘 안 풀리는 일도 생기는 법.
다음 <상상 카페> 촬영을 위해 모였을 때, 임주미 PD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저번에 저희 방송이 반응이 좋아서 조금 더 길어질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네. 이야기해보신다더니 어떻게 됐어요?”
임주미 PD가 가벼운 얼굴로 이야기를 꺼내기에 나도 가볍게 대답했다.
스케줄이 길어지면 우리야 좋지.
연말 시상식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중요한 시기에 사람들에게 모노크롬을 더 오래 각인시킬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임주미 PD의 입에서 나온 건 예상과 다른 내용이었다.
“마지막 촬영이 생각보다 빨라질지도 모르겠어요.”
“네……?”